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정덕현展 / JEONGDEOKHYEON / 鄭德鉉 / painting   2015_0814 ▶ 2015_0905 / 월요일 휴관

정덕현_낙서_종이에 먹, 호분_130×13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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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 홈페이지_www.deokhyeon.com

초대일시 / 2015_0814_금요일_06:00pm

기획 / 정덕현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합정지구 Hapjungjugu 서울 마포구 서교동 444-9번지 105호 Tel. +82.10.5314.4874 www.facebook.com/hapjungjigu

밤과 안개1) : 정덕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눈뜨지 않고도 / 빛깔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 내 손가락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스쳐왔던가" (김선우,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중에서) 00. 반복 ● "어떤 설명이나 묘사될 수 없는 공포가 계속됐다."2) 그럼에도 "우린 그 표면 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무력감 앞에서 정덕현은 멈추지 않는다. 표면이 명증한 이야기로 고착되어 판단되기 전에 정덕현은 다시 붓을 댄다. 아직 마르지 않은 종이는 자신에게 다가온 또 다른 자극(먹)을 받아들인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확장될지 모르는 먹의 움직임이 대상의 경계를 지운다. 쌓이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다. 대상으로 향하던 표면의 말이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잃는다. 어쩔 수 없이 대상에 대한 사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왜 내 앞에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자꾸 살피고 더듬는다. 그리고 이를 '반복'3) 한다. "파괴하되 생산적"인 이 '반복'은 정덕현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쓰고-지우고-생각하고-쓰고-지우는 이 과정은 무의미하고 지난해 보인다. "가끔은 평화로운 풍경처럼 살만한 세상이 멀지 않은 듯" 보이지만, 공포는 여전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덕현이 찾은 생존전략이다. 설명이나 묘사 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삶의 방향은 나를, 너를 살피고 더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01. '고수(固守)' 아닌 '수고(愁苦)' ● 정덕현의 첫 전시는 2013년 gallery101에서 열린 『검은 사각형』展이다. 당시 기획자(이대범)는 참여 작가에게 자신의 창작방법론의 지향 혹은 탈주를 근간으로 검은 사각형 제작을 요구했다. 기획자는 검은 사각형을 어떠한 당당함보다는 미로에서 마주한 떨림, 긴장, 부유, 방황, 우연, 어리둥절함이기를 희망했다. 정덕현은 이 전시에서 제도지에 다양한 연필(6H, 4H, 2H, HB, 2B, 4B, 6B)을 사용해 실 꾸러미를 기록했다. 「검은 사각형: 억압하다」(2013)는 제도지와 자신의 몸 사이에 놓인 연필에 변화를 주면서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매번 새롭게 바라본 것이다. 7장의 드로잉을 하는 동안 정덕현의 그리기는, 정확히 말하면 몸의 움직임은 매번 변했다. ● 정덕현에게 연필은 대상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익숙한 언어를 억압하는 작동원리이다. 연필의 질감에 따라 작가의 그리기는 변해야 했다. 오히려 자신에게 "익숙한 증상을 감춰"야 했다. 그것은 제도지와 자신을 매개하는 연필의 질감에 기반을 둔다. 자신의 언어 자체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의 질감이 주는 자극을 수용한 자신의 몸을 기록한 것이다. "메시지는 바닥에 떨어진다." 어리둥절함이 주는 이 언어에 기대어 정덕현은 자신을 자극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잃었던 무엇인가를 회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정덕현은 "믿지 못하거나 곧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 까지도 익숙한 자신의 언어를 점검하는 요소로 사용했다.

정덕현_황국_종이에 목탄, 먹, 호분_193.9×130.3cm_2015

02. '바르게 살자' ● 2014년 경상남도 산청 성심원에서 열린 『지리산 프로젝트 : 우주 예술의 집』의 전시 속의 전시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별.별.밤. 기획)4) 에 참여한 정덕현은 기획자가 제시한 걷기, 그리기, 사유하기를 수행했다. 성심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소통의 어려움과 힘겨움에 대한 전시였던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에서 정덕현은 무심히 드로잉 한 점을 제작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다 본 나무를 그린 「내려다 본 향목」(2014)에는 글귀가 적혀 있다. '2014년 8월 14일 성심교를 건넌 후 향나무를 그렸다. 위에서 본 적은 없지만, 위에서 본 나무를 그렸다.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서'라는 짧은 문구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드러낸다. 본 적이 없는 시선으로 나무를 그린 후 '이렇게 생겼다'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진술이 아닌, '생겼을 것 같아서'라는 변화 가능한 진술을 남긴다. 대상에게 다가가 한 번에 포획하여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대상과 거리 두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유보적인 태도이지만, 어쩌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솔직한 윤리적 고백이다. ● 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재현한다고 해서 대상이 내 것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린다면 그것은 거짓된 희망이자, "환상이다." 고작해야 "벽돌로 된 공동 침대와 고통스러움 꿈"의 표면 정도를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난 책임이 없습니다, 난 책임이 없소, 난 책임이 없다"라고 말한다. 대신 정덕현은 변화 가능한 진술을 통해 전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문제/책임을 통감한다. 이 자백은 고스란히 「낙서」(2015)에 새겨진다. 어딘가에 붙어서 누군가와 함께했던 삶의 내력을 지녔을, 그러나 현재는 무참히 버려질 운명에 놓인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가 표지석(標識石)처럼 좌대에 놓여 있다. 궁서체로 '바르게 살자'가 있음직한 자리에는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 '관찰자가 될까봐 경계하고, 프로파간다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나의 태도' 대상을 한 번에 포획하지도, 그렇다고 모른척하지도 않으려는 정덕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태도는 정덕현 그리기의 근간이다. 레타나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요'된 선택의 모순에 대해서 언급한다. 선택을 함으로 얻어지는 것은 안정과 편의성이다. 하지만 정덕현은 선택을 거부함으로 파생하는 머뭇거림과 불안정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숨기려 했던 "밤낮없이 계속되는 굶주림, 갈증, 질식, 광기"의 실체를 목격한다.

정덕현_황국_종이에 목탄, 먹, 호분_193.9×130.3cm_2015

01+02.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5) : 가만히 있으라 ● 2014년 4월 16일 TV로 중계된 장면은 정지된 화면을 장시간 보듯 지루했다. 망망대해에 배 한척이 기울어져 있었으며,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장면을 매일매일 곳곳에서 봤다. 사실 그때는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이렇게 무참히 깨지고 있는지 몰랐다. 지루한 장면을 보면서 보이는 그대로 아무 일 없다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남기고 누군가는 빠르게 배를 떠났다. 그러나 수색이 중단된 2014년 11월 19일에도 여전히 9명은 배를 떠나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에는 그늘이 있었다. 4·16은 이를 가시화했을 뿐이다. 이전에도 누군가는 자신만의 안락함을 위해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가만히 있으라'는 누군가가 주변에서 늘 이야기 하고 있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 허울 뒤에 숨은 게 뭘까?" 아무리 슬퍼해도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피부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표식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문제적 질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이다.6) ●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덕현은 마르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붓을 댄다.7) 사물을 거대한 초상화처럼 다루는 정덕현에게 이런 행위는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이 '반복'은 생산적인 무의미이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작가는 대상의 '옆'에 다가간다.8) 동일화가 아닌 '옆'에 머무르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음, 즉 그들의 절대적 외부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태도이다. ● 같은 화면에서 '반복'을 통해 그리기를 했던 정덕현이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것은 미싱과 황국이다. 한국 근대화의 「기념비」(2012)적 기계인 미싱은, 어두운 「그림자」(2012)를 내재하기에 「피에타」(2013)이다. 노동(과 노동자, 노동환경)은 자본에 종속된다. 착취에 가까운 이러한 종속은 지금도 반복되는 문제이다. 정덕현은 반복을 반복함으로 이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임을 자각하고 다가간다. 한 마디로 표상하여 누군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지난하게 덧칠하고, 흘리고 그 자극을 수용하고 몸에 체화하면서 고통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 「황국」(2015)은 같은 제목의 두 작품이다. 각 작품은 삶과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은 그 전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목탄이라는 재료적 차원이 아니다. 그간 정덕현의 작업은 '반복'을 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흐트러지고 이는 다시 대상에 대한 사유를 야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작가의 고민과 번뇌가 추상적으로만 드러났다. 「황국」의 가치있음은 선과 선이 충돌하면서 긴장의 장으로 화면이 구축됐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덕현은 그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비가시적으로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것들을 힘겹게, 힘겹게 가시성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자명한 것은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하므로 정덕현의 움직임은 더욱 더 힘겨워진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정덕현_오른쪽 왼쪽_종이에 먹, 호분_193.9×130.3cm_2014
정덕현_흔들_종이에 먹, 호분_27×22cm_2014
정덕현_장벽_종이에 먹, 호분, 아크릴채색, 접시물감_227.3×727.2cm_2015

01+02.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 ● "한 국가는 한 목소리를 내"려 한다. 그들의 "슬로건만큼 소름끼치는 건 없다." 자기계발서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삶에서 '잠'까지 추방하며 가만히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신자유주의는 실제적인 휴식 상태인 잠을 '절전대기' 상태로 전환한다.9) "기계가 작동을 시작한다." 「오와 열」(2015)을 맞추고 「오른쪽 왼쪽」(2014)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불만도, 불평도 없이 일에 착수한다." 피로로 지친 육신은 "붕대 감은 손으로 노동을 계속한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문이다." 노동의 주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본의 「대리인」(2015)이 된다. 음소거 된 「묵음」(2014) 상태이다. 자본은 「모가지」(2015)를 담보로 삶을 장악한다. 자본의 요구에 빠르게 더 빠르게 움직여야/변해야 한다. 「목이 막히다」(2015)처럼 제 임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지만,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 ● 1933년 2월 1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피드 행진곡, 자동차 등살에 인력거 수난'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력거는 스피드 경쟁에서 밀린다. 일자리를 잃은 인력거꾼들은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라는 핏켓을 들고 시위를 펼친다.10) 80년 전, 인력거꾼들의 생존을 건 '세상을 속력을 요구한다'라는 외침은 결코 고리타분한 목소리가 아니다. 취업(사회 진출)을 위한 무한경쟁 사회는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요한다. (무의미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유의미하게) 빠르게 변할 것을 요구하는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속력을 따라가지 못했을 경우 제시되는 실업은 오롯이 '열심히 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 즉 「스스로 알아서」(2015)해야 하는 문제로 환원한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한다고 해도 '?'만 남는 거대한 소통 불가능의 「장벽」(2015)이 도사리고 있다. ● "피는 말랐고, 혀는 침묵에 빠졌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초가 막 꺼진 상태를 그린 「묵음」은 이중적이다. 온 몸을 녹여 말을 하던 초가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음소거 됐다는 측면이고, 또 다른 하는 완벽하게 꺼진 상태가 아닌 막 꺼진 상태, 즉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고, 최후의 순간까지 말을 한다는 점이다. 꺼졌으나 꺼지지 않는 상태에 「묵음」이 놓인다. 모서리에서 「흔들」(2014)리지만, 그럼에도 버틴다. 그러나 '버팀' 그 자체에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버팀으로 멈춤이 아니다. 정덕현은 꺼졌으나 꺼지지 않는 상태를, 버티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상태를 지향한다. 요구하는 속력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속력의 실체를 마주한다.

정덕현_무명_종이에 먹, 호분_52×37cm_2014

다시 00. "수용소의 잔디는 다시 무성해졌다" ● 상이해 보이는 '가만히 있어라'와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는 '무력함(helplessness)'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경쟁, 부채사회가 야기한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현재', 그리고 이에 따르는 실존의 위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11)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질문은 여전하다. (영화/글) 『밤과 안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버려진 마을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소각로는 사용되지 않고 나치의 교활함은 이제 애들 장난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떠도는 9백만 명의 원혼에도 우리 중 누가 이 괴상한 감시탑에서 새로운 처형자들의 도래를 경고할 것인가? 그들의 얼굴은 진정 우리와 다를까? (중략) 우린 진정한 시선으로 잔해를 살폈지만, 옛 괴물이 돌무더기 아래 영원히 깔려 버린 듯 과거를 잊고 희망을 찾은 척한다. 마치 수용소의 상처를 한 번에 치유한 듯, 마치 단 한 번의 과오처럼 꾸미고 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살피지 않고, 인류의 끊임없는 울부짖음을 듣지 않고 있다." ■ 이대범

* 주석 1) 이 글은 기획자와 작가로 3개의 전시(『검은 사각형』(gallery101, 2013),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성심원, 2014), 『살아있는 밤의 산책자 01』(공간 지금-여기, 2014)를 함께 작동시킨 이대범과 정덕현이 나눈 대화와 기울인 술잔에 대한 '우정'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이 글은 대화와 술자리에 함께 했던, 강동훈, 노승표, 안동일, 하정현 등과 함께 쓴 것이다. 2) 본문에 표기된 직접 인용은 영화 『밤과 안개』(알랭 레네, 1955)의 내레이션에서 무작위로 가져왔다. 『밤과 안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 기록 영상(흑백 영상)과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버려진 수용소(컬러 영상)를 병치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 『밤과 안개』를 기억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학살을 직접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재적 증거로서 과거를 다룬다. 망각에 저항하는 것을 실천의 덕목으로 생각한 알랭 레네는 구체적 인물, 집단, 국가에 과거 어두운 역사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집단 책임을 묻는다. 이는 정덕현의 전시 제목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와 맞닿아 있다. 3) 작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정덕현의 작업은 '노동(자)'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는 오해를 야기할 만한 성급한 도출이다. 정덕현의 작업이 '노동'으로 설명 될 수 있는 것은 두 측면 때문이다. 분명 그의 작업은 협소한 의미에서 '노동'의 대상을 표면에 그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유로 정덕현의 작업에서 '노동'을 언급한다. 하지만 정덕현의 '노동'은 노동과 관련된 대상의 선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덕현이 말하는 노동은 자본에 종속되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이 야기하는 '신명'에 의한 몸의 움직임을 말한다. '상품'을 만드는 움직임이 아닌 그 자체로 동력을 가진 몸의 움직임이다. 물론 이는 무의미해보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무의미한 몸의 움직임을 '반복'이라 칭하고자 한다. 4)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전은 '절대적 외부 세계'에서 성심원에 불시착한 6명의 작가가 우리의 몸 언저리에서 들숨과 날숨을 내뱉는 숙소 앞의 나무, 경호강, 성심교를 매만지며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자 했다. 두려웠고, 어색했고, 불편했고, 결국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함은 오히려 성심원을 가렸다. 그러기에 6명의 작가는 성심원을 떠나오면서 "익숙해졌지만, 그 사실이 두려울 정도로 여전히 낯선 공간이다"라는 고백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5) 이번 전시 제목인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는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에 실린 김연수의 글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에서 가져왔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했던 전시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의 문제의식이 세월호 사건 이후 야기된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의 기획자는 참여 작가들에게 전시 참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선물했다. 6) 정원욱, 「4·16과 애도담론 :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윤리적 과제」, 『자음과모음』, 2014년 겨울호, pp. 318~329. 이 글은 2014년 여름 문학잡지에 게재된 세월호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하고, 사회 또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과제를 반갑지 않은 짐이나 부채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4·16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지만, 동시에 사는 법을 다시 배우게 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라는 의미심장한 명제를 제기했다. 7) 가만히 있으며 무언가를 굳건하게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움직이며 '반복'한다. 당연지사 종이는 반응을 하고, 형상은 일그러진다. 어느 정도 형상이 구축되면 다시 붓을 댄다. 작가는 종이가 마른 상태에서는 자꾸 머뭇거리게 되어 다시 작업을 시작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8) 이현은 『아트인컬처』(2015년 7월호 'NEW LOOK' 코너에 정덕현을 소개하면서 "작가는 붓에서 물감이 떨어지건 말건 종이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심하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정덕현은 무심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그리는 대상의 '옆'에 서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기에 종이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정덕현 작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9) '절전대기'는 잠을 그저 가동성(operationality)과 접근이 연기된 상태로 개조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꺼지지 않으며, 실제적인 휴식 상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p. 30. 10) 이승원, 『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2011. 참조. 11) 대표적으로, 영화 『화차』(변영주, 2012), 『똥파리』(양익준, 2009), 그리고 소설 『환영』(김이설, 『환영』, 자음과모음, 2011), 「엄마들」(김이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10), 「서른」(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달콤한 게 좋아」(정미경,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등이 있다.

Vol.20150814a | 정덕현展 / JEONGDEOKHYEON / 鄭德鉉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