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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730_목요일_07: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31번지 Tel. +82.2.790.1178 amadoart.org
가능성으로서의 기호: 예술의 의미 ● I wish I could see what my eyes see. - Vanilla Fudge 21세기는 다원주의 시대로 표현된다. 민중과 대중은 탈집단화되고 탈계급화되어 다중이란 말로 바뀌고, 예술은 탈 영토화의 과정을 거쳐 예술가의 영역에서 '예술인간'의 영역으로 옮겨가며(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2015)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의 미학을 역설하는 시대가 되었다. ● 예술과 미는 짝 개념으로 미적 경험은 예술작품의 오브제에 의해 매개되지만 다원주의 시대에 예술 작품의 오브제는 물리적 매체나 대상을 넘어 추상화, 이미지화되고 있으며, 행위미술 혹은 예술처럼 우연성을 통한 생성과정을 표현하는 등 복합 매체의 성격을 띤다. ● 예술 작품의 오브제가 굳이 창조적인 것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은 이미 기성품을 오브제로 사용한 마르셀 뒤샹의 「샘」과 앤디 위홀의 「브릴로 상자」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예술의 정의만큼 다양한 예술에 대한 태도는 다원성에 대한 담론을 확장시키며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의 모호성(vagueness)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 이런 점에서 가능성의 기호로서 예술이 갖는 의미를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의미는 다중으로서의 예술인간의 출현으로 그 예술적 가치가 상대적 가치, 혹은 교환적, 상징적 가치로 인식되어 "모든 것이 예술이자 어떤 것도 예술이 아닌 것"이 되었다.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창조성의 긍정적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학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적, 수사학적 측면인 '테크닉'과 '지각적 사건'으로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관심이 절실하다. ● 탈 영토화는 예술의 이상적 가치의 다양성을 표현하며 그 본연의 생명력을 얻는 기회를 얻었지만, 한편 예술에 대한 다원주의적 태도는 진정한 미에 대한 의미와 아울러 예술작품을 판단할 수 있는 미적 판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의 진화는 다양성을 담보로 설명될 수 있지만 다원주의적 관점에서의 상대론적 태도는 미학적 경험으로부터 오는 초월적 대상과 자질에 대한 숭고한 감정과, 감수성, 그리고 예술적 가치의 중요성과 의의를 약화시킨다. ● 예술비평가인 아서 단토와 철학자 넬슨 굿맨은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각각 '무엇이 예술인가?(What art is), 또는 언제 예술이 되는가(When is art)라고 되물음으로써 각각 예술을 바라보는 상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전자는 '경험의 체현' (embodiment of experience)으로서의 예술을, 후자는 과학, 논리와 연결된 상징체계로서의 예술을 논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혹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관람자가 예술작품을 조우하는 순간, 즉 예술적 사건을 통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술은 하나의 사건으로 삶에서의 실험적 순간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반응하게 하는 조우(encounter)이다. 관람자가 미학적 경험으로 예술을 지각할 때 그는 창조자로서의 예술가 정신과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예술적 사건(현간, 玄間)이 일어나고, 그 순간, 무간(無間, 사이 없음)을 통해 예술가와 관람자의 정신은 하나로 융합된다. 융합의 찰라 검은 바탕의 공간(空間)에 '玄間'의 글자 이미지가 어둠을 가르고 출현하면서, 현간적 사건을 촉발하며 관람자가 예술을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 최수정 작가가 구현하는 예술은 하나의 사건이자 가능성의 기호로서 예술적 공간을 관계성의 미학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사이 없음(無間)의 자질인 익숙함, 친밀감, 충만함과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검은 장애물(玄間)로 인한 거리감, 이물감, 낯설음, 불안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중적 변주를 통해 관람자의 정신을 그에게로 불러낸다. 어떤 경우에는 끊임없는 반복과 익숙함으로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키고, 또 다른 경우에는 너와 나 혹은 나와 대상 사이에 놓인 검은 바위 저 너머에 있는 너를 상상하며 하나가 되려고 하는 무간(無間)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이중적 의식의 긴장을 만들며,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사유의 경험 세계로 인도한다. 전등불 아래 시들어가는 꽃을 통해 재현되는 열정과 차가움의 자질, 회화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질서와 혼돈, 밝음과 어두움, 자유와 속박, 현실과 허구, 지옥과 천국, 그리고 빛과 소리의 영상물에서 느껴지는 색과 언어의 원초적인 재료의 물질성과 정신적 이미지의 대비에 이르기까지 관람자를 가능성의 기호의 세계 속으로 초대하며 반응하게 한다. ● 회화적 공간에서 재현되는 다양한 파편적 이미지는 각 대상이 공간에 자기 위치를 점하며 출현하는 현간(玄間)의 사건으로, 공존하는 수 많은 이질적 존재와 사물이 만들어내는 동시성은 비논리적이며, 무질서하게 혼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피터 부르겔의 회화이미지와 중첩되며 텍스트 밖의 유사한 이미지를 불러오는 상호시각성(intervisuality)의 효과를 가져옴으로써 공간, 현간, 무간의 개념은 중첩된다.
빛과 소리가 결합되어 생성되며 반복되는 동영상 이미지의 효과는 추상적이기에 오히려 원재료의 낯선 물질성, 혹은 현상적 자질을 부각시키며, 창조적인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이로 인해 관람자는 기억이나 사실에 의존한 상상이 아닌 순수하고 충만한, 합일의 세계에서 새로운 소리의 의미를 만들어야 하는 창조적 자아의 감수성이 솟아난다. 관람자 스스로가 빛과 소리로 진정한 예술의 언어를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기를 요청 받는다. ● 간헐적으로 그렇지만 반복적으로 보이는 이미지 속의 눈동자는 관람자의 눈에 이렇게 말한다. 왈도 에머슨 시의 스핑크스가 말하듯이 " 나는 너의 정신, 너에게 예속된 자이며, 너의 눈에 나는 눈동자 빛이다" 이 같은 빛과 소리의 결합 이미지는 '현간'의 예술적 사건으로 일종의 초월적이며 현시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전등불 아래서 시들어가는 탁자 위의 꽃은 현실적 공간에서 현간(玄間)의 긴장, 고통의 이미지를 통해 무간(無間)을 욕망하는 작가와 관람자를 포함한 '예술인간'의 삶의 모습, 즉 삶의 미학을 재현한다. 꽃과 전등의 이미지는 생성 혹은 파괴되는 과정을 재현하는 예술적 이미지, 죽음을 통해 삶을 재현하는 이미지, 끝이 시작에 있음을 재현한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 이처럼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사건은 그 결말이 충분히 예측된다. 즉 전등의 열은 꽃을 죽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말라 시들어버린 죽은 꽃은 하나의 지표이자 시간의 흔적이다. 그 말라비틀어진 꽃은 그 자리에서 흔적을 통해 또 다른 무엇인가를 재현한다. 말라버린 꽃은 이미 과거가 된 미래를 재현하는 동시에 오래된 미래, 즉 가능성의 기호로서의 '오래된' 미래를 재현한다. ● 인간은 시작과 처음을 알 수 없고 현재의 긴장과 고통 속에서 기억하고 추론할 뿐이다. 마치 풍향계가 자신의 몸에 바람의 방향을 흔적으로 남기면서 돌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어떠한 모양인지는 모르고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드러내듯이 예술가는 그러한 바람의 정신을 자신의 창조물인 작품을 통해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관람자는 그 몸의 흔적을 주의력 있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찰하고, 무간의 욕망을 통해 예술가의 정신과 만나게 될 때, 진정한 미학적 경험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기꺼이 그러한 몸을, 현간(玄間)을 통해 보여주고, 몸을 통해 무간(無間)을 욕망하며 우리 모두가 자신을 발견하는 그러한 연결된 정신이 예술작품을 매개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작가는 어두움, 현간(玄間), 지옥, 고통, 열, 죽음에서 삶과 빛, 자유, 에너지, 무간(無間)과 더 나아가 작품 너머 소리와 빛의 얼굴들을 본다. 이곳(thisness) 현실의 긴장과 고통을 재현하는 현간(玄間)의 이미지는 이미 미래와 과거를 공간과 무간의 개념을 통해 포용하고 있다. 이제 조우로서의 예술적 사건인 현간(玄間)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력(attentiveness) 있는 태도와 사랑뿐이다. ■ 이윤희
Vol.20150730d | 최수정展 / CHOISOOJUNG / 崔秀汀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