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이쾌대展 / LEEQOEDE / 李快大 / painting   2015_0722 ▶ 2015_1101 / 월요일 휴관

이쾌대_두루마기 입은 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60cm_1940년대_개인소장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06f | 이쾌대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수,토요일_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5-1번지) 제1,2전시실 Tel. +82.2.2022.0600 www.mmca.go.kr

작가소개1. 이쾌대는 누구인가? 이쾌대(李快大,1913~1965)는 백남준(白南準, 1932~2006)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며, 그가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은 한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월북화가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거론되는 것이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존재조차 가려져 왔던 화가가 이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완벽에 가깝게 인체를 그려내는 뛰어난 능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역사와 시대가 녹아있는 작품의 주제가 감상자들을 작품 속으로 깊이 빨아들인다. ●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의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이쾌대는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재덕(崔載德, 1916∼?) 등 일본 유학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인 감성의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이쾌대_무희의 휴식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1937_개인소장

해방 후에는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하여 「군상―해방고지」(1948)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쾌대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예술가의 역할과 사명을 고민하면서 창작의욕을 불태우는 한편, 홍익대학교 강사,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가 발발했을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게 되었고, 국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 이쾌대가 어떠한 구속도 없이 회화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1933년부터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이쾌대가 남긴 작품은 30대의 화가가 남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탐구정신과 예술세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는 이쾌대의 17살 때 그린 수채화부터 월북직전 포로수용소에서 남긴 드로잉까지, 이쾌대 예술의 전개와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이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 최초로 공개되는 드로잉, 잡지 표지화, 편지, 그리고 각종 유품들은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한 단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이쾌대_운명_캔버스에 유채_156×128cm_1938_개인소장

2. 이쾌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 이쾌대는 일제 식민지시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새로운 민족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화가다. 그는 진지한 탐구정신과 뜨거운 열정으로 당시 화단을 이끌었고, 탁월한 그림 실력과 독자적인 주제의식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1953년 월북 이후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 석 자조차 언급이 금지되었다. 북한에서 역시 평탄치 않았다. 주체사상이 대두되면서 금기작가가 되고 만 것이다. ●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했다. 남한에서는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1991년 신세계미술관의 『월북작가 이쾌대전』 이후 대중에게 점차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북한에서는 1998년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북화가라는 이력 때문에 이쾌대에 대한 불편한 오해가 계속되었고, 작품의 대다수가 유족 소장으로 전해져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쾌대라는 예술가를 온전히 만나고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 이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70년, 이쾌대가 타계한 지 50년이 된 2015년 마련된 이번 전시는, 그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을 대면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쾌대_이여성_캔버스에 유채_90.8×72.8cm_1940년대_개인소장

3.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 6․25가 발발했을 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공산 치하의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은 국군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이쾌대는 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과 가족들을 두고 집은 떠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쾌대는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과 조각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1948년 초 이미 월북을 감행한 친형 이여성 때문에 남한 사회에 돌아가기가 불안했기 때문인지, 좌우익 간의 내부 갈등이 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하였다. ●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월북작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집 주위에는 늘 사복경찰이 맴돌았고, 부인 유갑봉 여사는 경찰에 불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유갑봉 여사는 그림들을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하였다. 이쾌대와 유갑봉 여사가 살던 신설동 집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공간이 있었다. 이쾌대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될 때 갓난 아기였던 막내아들 한우(1950년 8월생)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다락방에 숨겨진 그림의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이쾌대가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라고 당부했지만, 유갑봉 여사는 어린 네 자녀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낸 것이다. ● 1988년에서야 월북화가들에 대한 해금이 단행되었다. 그동안 거론조차 할 수 없었던 이쾌대를 당당히 말하고, 어두운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그림이 햇빛을 보게 되었지만, 이미 유갑봉 여사는 1980년 1월 세상을 뜬 뒤였다. 해금 이후 막내아들 한우는 미술품 수복 전문가에게 작품의 복원을 맡겼고, 드디어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개최되었다. ● 그로부터 24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전시되어 왔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망라하고, 여기에 더하여 미공개 유품과 드로잉을 함께 소개하여 이쾌대의 예술, 이쾌대의 사랑을 조명한다.

이쾌대_군상 I-해방고지_캔버스에 유채_181×222.5cm_1948_개인소장

전시 소개1. 사랑을 그리다 : 1929~1937 이쾌대가 휘문고보 시절 제작한 수채화 「정물」(1929)부터, 제국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무희의 휴식」(1937)까지 수업기의 작품을 소개한다. ● 이쾌대는 휘문고보에서 서양화가 장발(張勃, 1901~2001)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휘문고보 5학년인 1932년 미술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로 입선하였고, 졸업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 휘문고보 졸업반이던 때에 유갑봉과 결혼한 이쾌대는 유학시절을 아내와 함께 보냈다.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쾌대는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사랑하는 아내 유갑봉은 이쾌대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이쾌대의 여성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이쾌대의 예술에서, 여성은 자신이 처한 운명을 극복해 나아가는 강인한 민족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쾌대_군상 Ⅳ_캔버스에 유채_177×216cm_1948년 추정_개인소장

2. 전통을 탐구하다 : 1938~1944 ●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는 1938년부터 해방이전인 1944년까지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 시기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서양화 양식을 모색해가는 모색기이다 ●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8년 일본의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 「운명」으로 입선하고, 1939년, 1940년 같은 전람회에서 잇달아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가 되어 귀국한 그는 1941년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진환, 이중섭,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 이쾌대는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매우 고심하였다. 초기에는 어둡고 침통한 분위기의 그림들을 그렸지만,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하면서 서양화에 전통 회화의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새로운 회화를 선보였다. 과감한 색면 처리, 밝고 명랑한 색채의 사용, 검은 필선의 강조 등 예술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는 그의 탄탄한 데생력과 결합되면서, 이후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 시대를 끌어안다 : 1945~1953 ● 좌우의 이념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해방공간에서 시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예술의 방향을 수립하고 대작을 발표하는 전성기의 작품을 소개한다. ● 1945년 8월 일제의 식민지배가 종식을 고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이쾌대는 새로운 민족미술의 건설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일제의 잔재를 벗은 새로운 미술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미술의 시급한 과제라 생각했다. ● 이쾌대는 그동안 연마한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장대하고 역동적인 군상들을 발표하였다. 수십 명이 한데 엉켜 있는 군상은 이쾌대가 지금까지 쌓아 온 인물화 기량과 조형감각이 아낌없이 표출된 작품들이다. 이쾌대는 르네상스 미술부터 20세기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미술을 폭넓게 수용하였고, 여기에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전통의 색채를 결합함으로써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하였다. 이로써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그림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이쾌대의 예술적 사명은 독자적인 회화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꿈은 멈추고 말았다.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연계 강좌 및 학술세미나   1. 강좌 - 대상: 일반인·전문인 대상, 각 60명 - 일시: 10월 7일, 10월 21일 수요일 18시-19시 30분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시청각실 10.7.(수), 18:00~19:30 / 이쾌대와 일제강점기 한일 서양화단의 관계 / 최재혁(성신여자대학교 강사) 10.21.(수), 18:00~19:30 / 해방공간 이쾌대의 미술활동 /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 학술세미나 : 아카이브를 통해 보는 이쾌대 - 대상: 일반인·전문인 대상, 60명 - 일시: 10월 31일 토요일 14시-17시 20분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시청각실 14:00-14:40 /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사이―이쾌대의 드로잉 읽기 / 권행가(덕성여대 연구교수) 14:45-15:25 / 이쾌대의 도상 참조 양상 / 김현숙(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15:40-16:20 / 한국전쟁기 이쾌대의 행적 / 최태만(국민대학교 교수) 16:25-17:20 / 토론 및 질의응답 / 좌장 윤범모(가천대학교 교수)_신수경(명지대학교 강사)_정은진(서울대학교 연구교수)_홍지석(단국대학교 연구교수)   * 온라인 사전예약을 통해 참여 가능하며, 참여 신청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교육/행사]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02-2022-0646

Vol.20150722h | 이쾌대展 / LEEQOEDE / 李快大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