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ready-Always 이미-항상

이정배展 / LEEJEONGBAE / 李正培 / wall painting.installation   2015_0625 ▶ 2016_0625

이정배_Already-Always 이미-항상_아크릴, 시트지, 벽화_2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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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광복70주년기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씨앗 프로젝트展

주최,후원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시간 / 09:00am~08:00pm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 Tel. +82.2.360.8590~1 www.sscmc.or.kr

정치적 미학 ● 이정배 작가의 「씨앗 프로젝트- 이미, 항상」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의 1층짜리 사무동 전면 유리벽에 씨앗 모양의 이미지로 붙인 자유, 평등, 평화, 박애라는 글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게 하는 프로젝트다. 이 작품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필자가 건낸 말은 "이 작품이 시작은 볼품없어야 맞아요~" 였다. 그런 격려의 말을 건낸 이유는 「씨앗 프로젝트」의 첫인상이 볼품없어 보여서였는데 스펙타클이 없음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작은 건물의 거무튀튀하게 처리 된 유리 외벽에 점을 뚝뚝 찍어 붙인 자유, 평화, 평등, 박애라는 검은 글자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았거니와 역사관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포스터나 공고문을 함께 붙이기로 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리창 장식인지 예술작품인지 분간하기란 어려워서였다.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른 곳도 아니고 독립을 위해 싸우다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이들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이니 혹시 비통함이나 숭고가 연상되는 종류의 감동을 예상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적잖은 실망이겠다 싶었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공공미술, 예술작품, 그리고 자유, 평화, 평등, 박애라는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이 가진 권위에 대하여 마땅히 보내져야 하는 충분한 배려와 존중은 무시하는 혹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나라의 더구나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마지 않은 '우리' 유관순, '우리' 독립군, '우리'의 민주주의 열사들을 포함하는 6,000 여명의 넋이, 아니 집계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수만 명의 넋이 떠도는 장소에서 자유, 평등, 평화, 박애를 다루는데 사용된 먼지 앉은 검은색의 활자는 6,000원도 쓰지 않았을 법한 시트지를 오려 붙인 아주 초라한 것이었고…

이정배_Already-Always 이미-항상_아크릴, 시트지, 벽화_2015~16

여기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가 있다면 참 다행이고 그 호기심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혹시 작품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채워도 시원치 않을 서문의 자리에 오히려 예술을 깎아 내리는 문구들로 가득 찬 문단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끼셨다면 이 글은 이미 반 이상 성공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싶다. 맞다. 이 글은 당혹감을 유도하기 위해 쓰여진 서두에서부터 - 모든 글이 그러하겠지만 - 이미, 항상 '정치적인' 글이다.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두세 개의 층위를 갖는다. 하나는 다스린다는 정치, 둘 째는 자유, 평등, 평화, 박애라는 도덕적인 가치판단이나 그것이 사회에서 누려지고 있는가의 여부, 즉 사회적 문제를 논할 때 정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치를 주제로 생산되는 작품을 우리는 정치적인 작업이다 라고 표현하며 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자가 되는 이 때의 정치는 '명사'형의 단어이다.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세 번째 층위는 인간이 살아가고 서로 관계하는 역학과 관련된 진행형의 '동사어' 이다.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필자의 글쓰기는 의아심이나 반감과 같은 인간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자극해서 각자의 입장이 작품감상과 관계 맺도록 하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씨앗 프로젝트」에는 여러 사람의 입장이 잠재한다. 작품을 만든 사람, 프로젝트를 주최하고 제작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 그리고 프로젝트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공공적 취지에 부합하는지를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위의 문단이 자신의 입장을 깎아 내리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에 껄끄러웠을 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예술작품이란 고귀한 무엇이기 때문에 유리창의 디자인쯤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싫어하는 이가 있다면 기존의 예술이 누렸던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의 사람일 것이고 위에 적은 혐의가 일부분이나마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왜 볼품없냐고 반대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이 작품이 예술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역사관 방문객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씨앗 프로젝트」라는 예술작품을 논하는 자리에 '볼품없음'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정치적 위상과 작품과의 관계를 맺는다. 필자는 이 지점이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가진 세 번째 층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라건대 '볼품없음'라는 단어가 이 때만큼은 실재의 층위에서 작동했으면 한다.

이정배_Already-Always이미-항상_아크릴, 시트지, 벽화_2015~16

이정배의 「씨앗 프로젝트」를 평하는 서문에 '정치'를 들먹이는 이유는 그가 이제는 중지되어서 볼품이 없어진 관념의 영역에서 예술을 실재의 위치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씨앗 프로젝트」 작업의 열쇠 말 또한 '정치적'이 되고 그의 예술작업은 정치적인 장소가 된다. 사실상 자유, 평등, 평화, 박애는 죽은 말이다. 반면 일제 강점기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떠도는 재소자들의 넋의 살아 생전에는 그 단어들 또한 살아서 작동하는 말이었으려니 한다. 당시 재소자들은 이 단어들이 상징하는 가치를 그의 가족들이, 동포가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혹은 그들 스스로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고 세상에 남겨진 나머지 사람들 또한 자신이 이들 덕에 자유, 평등, 평화, 박애를 몸으로 체험함을 알고 있었고 그 감각은 공유되었다. 따라서 자유, 평등, 평화, 박애는 충분히 정치의 세 번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유관순, 우리 열사라는 표현에서 '우리'의 실질적인 작동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 평등, 평화, 박애는 고매한 가치를 대리해서 지칭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 평등, 평화, 박애가 이 땅에 이루어졌고 우리가 이를 충분히 누리고 있기 때문에 죽은 말이 된 것은 아니다. 그 가치들을 누리고 있건 누리지 않건 간에 현실이 아닌 관조의, 형이상학적인 단어의 위치로 멀어져 갔기 때문에 죽은 말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술작품 또한 예술적 교양을 갖춘 이들이 미학의 논리를 따랐을 때 해석 가능한 기호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어느 특정 작품이 아름다운가의 여부는 미학이라는 사전에서 키워드를 찾아 이미지와 등치시키면 되는 무엇이 되었다. 이런 경우에 예술작품은 정치가 중지된 기호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정배_Already-Always이미-항상_아크릴, 시트지, 벽화_2015~16

「씨앗 프로젝트」의 시작점은 그것이 활자의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정치적일 수 없고 작동하지 않은 결핍되기 십상이었다. 이 시점에서의 「씨앗 프로젝트」는 '자유의 씨앗이 싹이 튼다'와 같은 관념적 명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젠가 이정배 작가는 필자에게 예술이란 온전함을 주장할 수 없는 그래서 잠재성을 가진다는 말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또한 예술이 실재와 거리를 둔 가상의, 관념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작동하는 정치적인 사건이기를 바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서대문 형무소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보니 「씨앗 프로젝트」에서 씨앗 모양의 글자에서는 예쁜 연두색 풀잎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무더운 여름을 맞아 풀이 무성해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만약 이정배 작가가 자신의 예술이 기호 해석의 차원에 머물러도 괜찮았다면 「씨앗 프로젝트」는 자유, 평등, 평화, 박애라는 글자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노트나 서문은 자유, 평등, 평화, 박애가 얼마나 미술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갖는가와 관련된 논리를 늘어 놓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지점에서 작품을 완료하지 않았다. 대신에, 보도 블럭 사이를 뚫고 자라나는 잡초처럼 유리 벽 위의 활자에 싹을 틔웠다. 그 과정을 보면서 필자는 '어라?' 하는 즐거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바라본다는 행위를 논리의 영역 바깥으로 데려가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왜냐면 필자는 평론가로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다음 단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해석은 이 작품의 설정, 즉 형무소 역사관에 놓인 자유, 평등, 평화 박애라는 활자가 싹을 틔워 자라난다는 형이상학적, 도덕적 가치에서 이미 완료되어있다. 이러한 설정은 너무나 단순 명료해서 해제고 뭐고 필요도 없는 거의 슬로건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굳이 형무소까지 찾아가야만 해석되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싹이 돋아나는 광경을 목격함으로 해서 이제 내게 이 작품은 더 이상 해석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시각적 기호가 아니었다.

이정배_Already-Always이미-항상_아크릴, 시트지, 벽화_2015~16

필자는 이 작품의 풀잎에서 귀엽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마음 속으로는 그러면 안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작가가 작품을 귀엽게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감상자가 이 형무소의 기념비적인 예술을 귀엽다고 감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일까? 미학의 영역에서 작품을 분석하자면 이 것은 그다지 이야기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 작품을 대하고 나서 해석되는 논리와 감정 사이에는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움 점이 생겨난다. 자유, 평등, 평화, 박애라는 글자와 글자 사이에 사전적 의미를 초과하는, 우리가 체득한 의미가 존재하듯이 예술에 있어서도 작가나 관객은 스스로가 살아 온 과거가 쌓여 만들어진 대한 개인적 입장을 갖게 된다. 필자 또한 작품을 평가하는 이론가의 시점과 살아오면서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신현진으로서의 취향이 종합된 특정한 입장을 가진다. 그리고 지금 공식적인 입장과 개인의 입장과의 불일치라는 불편한 심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로 각자 상이한 감정을 품게 될 터이다. 그러니 이 상황은 '볼품없음' 라는 단어를 서두에 놓으면서 독자를 자극했듯이 글자에 싹을 틔워 우리의 감정을 작동시킴으로써 개별적 관객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공식적인 분석이나 혹은 작가의 의도와 합의 되(지 않)는 정치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역사책이나 사전에서 찾아낸 관념적 의미나 미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나'의 입장이 예술의 감상에 논의되어야 한다면 이러한 불일치는 중재되거나 고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부여한 「씨앗 프로젝트」의 의도와 내가 합의에 다다를 수 있거나 없는가는 가장 우선된 사안은 아니다. 더구나 가치의 고하를 논의하는 것은 더군다나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작가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예술 작품과 감상이 언어화 할 수 없는 영역으로 구성된 이상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라는 평가행위는 예술계 안에서의 게임일 뿐이라고, 자신은 그저 혹시 몇 명이라도 자신의 작업을 좋아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작가는 예술에 있어서 가치 판단의 문제를 관념으로부터 해방하고 실재 안에서 정치적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 그렇다고 그의 예술작품이 시각적 기호로 구성된다는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의 작업은 어쨌거나 유리 벽 위의 글자 + 풀잎의 이미지로 구성되니 말이다. 그리고 기호로서 그의 작품은 관념의 위상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에 답하듯 작가는 겨울이 되면 이 작품을 유리 벽에서 뜯어 버리겠다고 한다. 단어가 갖는 추상적인 관념과 현실과의 거리, 그리고 글씨-이미지가 비록 일년을 지나면서 싹이 나고 잎이 무성한 여름을 지나 겨울을 맞아 잎이 떨어지는 진행형의 실재를 위해, 그리고 그것이 이미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갖게 될 관념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정배씨의 작업이 내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면 충분히 정치적 아닐까? ■ 신현진

Vol.20150625e | 이정배展 / LEEJEONGBAE / 李正培 / wall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