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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60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북촌로 5길 64(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디지털 바로크 정신의 내부 ● 이예승의 작품을 체험하기는 쉽지만 지각하기란 어렵다.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 풍부한 경험의 재료를 제공한다. 사물은 이미지로 이중화되어 있고, 색채와 소리는 선명하고, 빛과 그림자는 얽혀 있다. 그의 작품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놀이동산처럼 그의 작품은 매혹과 유희의 장소로서 놓여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감상이 끝나도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풍경의 한 장면? 또는 전기 멀티플러그? 우리 머릿속에 남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들이다. 이는 현대 미술 일반이 통일성을 기각했다든지, 디지털 미디어가 본성상 파편적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와 관계된다.
가상과 실상의 식별불가능성 ● 이예승은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뒤집고, 늘어놓는 작가다. 제작의 원천들을 흡수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내부와 외부의 구획을 계속해서 역전시키고, 그리고 사물과 이미지들을 설치하는 데 정교함과 뻔뻔함을 동시에 구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덜어내기보다는 더해간다. 남들이라면 한 장의 종이에서 절반을 버려야할 때, 그는 반으로 접고, 접고 또 접은 다음에 그만의 방식으로 펼쳐놓는다. 복잡하게 접힌 선의 자국들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온전히 그의 작품을 지각하기란 어렵다. 작품을 생산하는 원리로 작동하는 사유와 에너지가, 작품의 굴곡 저 사이 어딘가 감추어져 있어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 그의 작업은 여러 종류의 대결선들이 교차하면서 종합되고 있다. 최소한 사중의 대결이 진행 중이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미술과 기술의 대립이 그것이다. 양자는 서양에서 18세기 이후에 각각 유희와 법칙의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적절하게 상기시켰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포이에시스'(poiesis)는 양자를 포괄하는 '제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예승은 제작의 작가이다. 그는 이미지의 안쪽에 기술적 사물들을 배치함으로써 미술의 배타성을 부정하고 기술적 핵심을 복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미술과 기술 사이의 위계를 역전시키는 듯 보일 때, 그는 미술 작가로서 위험한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를테면 그는 전선(電線)을 필선(筆線)처럼 사용한다.
위의 연장선상에서, 두 번째로 동양화와 디지털 미디어 사이의 긴장이 놓여 있다. 작품과 공간을 감싸고 있는 원형의 스크린은 화선지의 족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위치해 흔들리는 정물이나 풍경을 볼 때, 화폭 속으로 인물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전통 문인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옛 선인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 폭포소리가 너무 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던가. 이것은 평면 캔버스의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는 서양화의 문법과는 다른 특이한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미디어의 스크린이 관객의 관조적 시선이 가닿는 표면의 역할을 한다면, 작가의 작품에서는 바깥쪽과 안쪽을 나누는 공간을 창출한다. 그리고 관객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진입하게 된다. ● 세 번째로, 강제와 성향 사이의 괴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강제된 요구 속에서 살아가는 바, 그 결과는 타인들에게 인격(페르소나)으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원 그대로, 하나의 마스크 또는 이미지이다. 반면 성향은 각자 안에 감추어진 채로, 그러나 끈질기게 작동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대립적인 두 개의 축, 그러나 창조적 공간을 여는 타원의 두 개의 초점이다. 작가가 얼핏 암시한 개인사와 비추어볼 때, 이 괴리는 위에서 말한 대립들과 결합된다.
네 번째로, 가상과 진실 사이의 식별불가능성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미지를 무한 증식시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대표적으로, 오늘 이 작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이전 작품「A Wild Rumor」(그룹전 xLoop, 2013년)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관객은 원형 스크린 바깥에서 이미지들을 먼저 보게 되고, 다음으로 스크린 안쪽에서 이 이미지들의 원천인 사물들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대비해서 갖는 사물의 진실성이 아니다. 작가가 관객들을 위치시키고 싶은 지점은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불일치, 간격 자체이다. 이미지들이 미학적인 만큼이나 사물들은 과학적이고, 전자가 빛에 의존해 겨우 나타나는 만큼이나 후자는 견고한 과학적 법칙을 상징한다. 이 간격을 이용해, 작가는 관객을 어떤 사고실험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사물은 이미지에 대비해 견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물들 역시 여러 단계의 실재성 안에서 또 다른 것의 이미지에 불과할 수 있다. 그는 인식의 근본적인 불가능성, 지각의 숙명적인 오류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 가상과 실상, 이미지와 사물은 최종적인 지점에서 식별 불가능 할 것이다. 이것은 장자가 말한 '호접지몽'(胡蝶之夢), 들뢰즈가 말한 결정-이미지(image-cristal)의 핵심에 가닿는다. 작가는 이 테제에 모든 내기를 걸고, 이것 위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대립선을 중첩시킨다. 식별불가능성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은 서로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뫼비우스 띠처럼 서로 맞물리게 된다. 이것이 일상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 하에서 그의 작품에서 무엇이 지각되는지 분명하지 않은 이유이다. 기술적 사물들은 가장 미술적인 이미지를 방출하고, 미술은 첨단 기술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동양화의 꿈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며, 스크린은 동양화의 곡면으로 등장한다. 내부의 성향은 외부의 강요와 대비해서 더 빛을 발하겠지만, 강요된 인격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디지털 바로크 ● 오늘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고스란히 중첩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더해가는 작가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산술적인 누적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역전을 일으키고 있다. 작품「Moving movements」은「A Wild Rumor」가「두정현씨의 정신풍경」(공동작업, 2014년)을 거치면서 일으킨 변이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A Wild Rumor」가 하나의 신체라면,「Moving movements」는 어떤 정신처럼 보인다. 전자에서 빛과 사물은 노출되어 있지만, 후자에서 이미지의 원천은 은폐되어 있다. 전자에서 관객의 시선은 이미지와 사물들을 하나씩 더듬어가게 되지만, 후자에서 관객은 이미지의 풍경 안쪽에 단번에 위치한다. 전자에서 붉은 비커가 심장처럼 사물과 이미지들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면, 후자에서는 중앙의 미디어 탑이 차갑게 주위의 영사 상황을 지시하고 통제하고 있다. 전자에서 관객은 물체들이 형성하는 유사-신체를 체험하게 된다면, 후자에서 꿈-이미지로 둘러싸인 정신의 내부에 위치한다. 요컨대 후자에서 이미지의 원천은 어디론가 '말려 들어가 있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정신은 외부가 주름 접혀 들어간 내부이다".「A Wild Rumor」에서 작가는 신체의 제작에 도달했다면,「Moving movements」에서는 정신의 내부를 발견하고 있는 것일까. 두 작품을 함께 놓고 볼 때, 작가는 공간의 구축 작업 안에서 생명-기계의 제작 같은 것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원형의 폐허」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말할 때, 그는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 문학 세계에 훨씬 더 가깝게 속해 있을지 모른다. 양자 모두, 공간의 재구축과 인격의 상상적인 창조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디지털 바로크의 계보 속에 정당하게 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사에서 바로크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미지의 무한증식이다. 회화와 조각과 거울에 의한 이미지의 범람 안에서 사물과 이미지의 구분은 무한히 지연되거나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요 특징으로는, 빛의 궤적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크의 건축 안에서 빛은 모든 것을 이미지로 이중화하지만,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원천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건물 위쪽 어디에선가 들어온 빛은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굴절을 하면서 건물 안에서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종종 디지털 바로크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유례없는 이미지의 증식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 점과 관련하여, 작가가 빛을 사용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그는 상을 만들기 위해 빛을 세 가지 방식으로 사용하고, 이 다양한 실험 방식을 분명하게 노출한다. 빛은 사물의 반투명한 음영을 만들거나,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거나, 컴퓨터 내부에서 영상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연산한다. 이것들은 각각 그림자, 스크린, 미디어 탑 안에서 대표적으로 실현된다. 우리는 그것을 각각 화학적, 광학적, 정보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세 번째 것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의 이유는 중요하다. 그것은 이미지의 원천을 감추기 위해서, 스크린의 안쪽과 바깥쪽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미디어 탑의 연산은 이 시대의 정신 또는 지능을 상징한다. 그것이 인공 지능인지 몽상의 정신인지 구별해 말하기 어렵다. 이 식별불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해, 이예승 작가는 정보적 이미지로 가득 찬 디지털 바로크 시대의 정신 내부로 우리를 초대한다. ■ 이찬웅
Vol.20150604k | 이예승展 / LEEYESEUNG / 李芮承 / media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