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body

김준展 / KIMJOON / 金俊 / printing.video   2015_0522 ▶ 2015_0621 / 일,공휴일 휴관

김준_Somebody-009_C 프린트_160×10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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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홈페이지_www.kimjoon.net

초대일시 / 2015_052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박여숙화랑 PARKRYUSOOK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306호 Tel. +82.2.549.7575 www.parkryusookgallery.com

미지의 도래할 어떤 몸을 향한"몸이란 말이 어째서 그토록 새침하고, 편협하고, 빈약하고, 냉랭하고, 까탈스러운 동시에 혐오스럽고, 기름지고, 의뭉스럽고, 음란하고, 외설적인 시선을 하고 있는지 따지지 말자. (...) 몸은 또한 그런 방식으로 경계에, 극단에 자리한다. 몸은 가장 먼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하며, 그렇듯 증식하며 도래하는 몸이 곧 한계의 지평이다." (장 뤽 낭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2, 13~14쪽)

김준_Somebody-001, Somebody-003_C 프린트_90×210cm×2_2014

장 뤽 낭시(Jean Luc Nancy)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몸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져만 가고, 몸은 날이 갈수록 증식하고 있다. 수많은 몸들이, 아니 몸을 둘러싼 수다스러운 말들로 혹은 도처에 포진한 미디어의 갖가지 몸에 관한 확장과 변이들로 정신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대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동시대 미술 또한 이러한 몸에 관한 갖가지 수다들로 소란스럽기만 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있을 터, 몸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의 터이자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감각의 자리이고 그런 감각적인 것들의 치열하고 예민한 장(場)이어야 하는 예술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몸의 갖가지 확장, 변형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그렇게 삶의 욕망과 함께 하는 기쁨이자 생의 환희의 원천이요, 동시에 인생의 긴 순환에 따라 겪어야 하는 슬픔의 어떤 이유들이고 이러한 희비들의 교차로 인한 애매하고 모순적인 감각들이며, 때로는 현실과 가상이 반복되면서 넘쳐나는 과잉이자 실재적인 몸의 상실과 덧없음으로 인한 부재 같은 것들이다. 상황이 이럴 진데 한낱 예술이 이를 외면하기엔 수다한 몸을 둘러싼 감각들의 변이와 그 강도가 너무 클 뿐이다.

김준_Somebody-021_C 프린트_90×64cm_2015

하지만 이렇게 몸의 확장으로 때 아닌 몸살을 겪고 있는 이 시절은 또한 몸의 상실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의 말처럼 몸으로 회귀하는 현재의 미술은 역설적으로 몸의 사라짐을 보여주고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다루는 몸의 이미지는 기존의 단단하고 고정적인 몸 개념에 대한 불편하고 편치 않은 속내를 드러내면서,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몸에 관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잃어버린 몸을 향한, 그 생생한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 혹은 권력화 되고 상품화된 몸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위계적이고 규율적인 몸, 그리고 그렇게 규격화되고 대상화된 몸이 아닌 자율적이고 차이화 된 온전한 감각으로서의 몸에 관한 새로운 윤리학, 미학을 펼치고 있다. 때로는 사회문화적 현실 속에서 상처입고 고통 받고 있는 몸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절단되고 파편화된 몸들, 이를테면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한 몸에 관한 불편한 주장들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몸은 이렇게 살아있는 개인의 감각의 차원이자 동시에 그 감각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감각들의 자원이다. 그리고 이렇게 작동하는 몸들은 야릇하고 위태롭게, 그렇게 아슬아슬한 감각들로 우리의 굳어진 이성들을 자극하면서, 견고하기만 한 제도의 틀을 가로지른다.

김준_Somebody-005_C 프린트_120×120cm_2014

작가 김준(의 몸을 둘러싼 일련의 작업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서 있는 지점은 여느 작가들과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아니 늘 조금씩 다르게 변해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전시가 특히나 그러한데, 무언가 '다른 몸(some body)들로',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some where), 다른 것들(some thing)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만 하더라도, '문신'이라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혹은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를 둘러싼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었다. 몸에 각인되는 문신은 그 자체로 육신의 고통이자 쾌락, 혹은 상처이자 욕망이며 심미적인 위반의 정치학이자 미학으로 제도적인 금기와 억압(과 그 해방)을 다층적으로 상징한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이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보다는 이런 모두를 포함한,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것들을 함축하고 포괄하는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문신이라는 행위가 담고 있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들, 그 양가적이고 모호한 사회적 감각의 작동 말이다. 게다가 작가의 작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의 문신 행위가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서 단지 문신처럼 미학(정치, 윤리)적인 의미를 파생시키는, 예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가 문신이라는 몸에 각인되는 사회적인 감각의 차원에 대한 일정한 관심이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둘러싼 오래된, 혹은 이미 굳어진 여러 의미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의적인 의미들이 포개지는 지점들, 다층적이고 복잡한 감각의 차원들을 자신의 미술적 실천의 전략으로 전용(appropriation)하려 했을 뿐이다. 몸에 이미지를 각인하는 문신이라는 지극히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행위, 그리고 몸을 둘러싼 사회문화적인 의미효과를 빗대, 작가 특유의 작업들을 에둘러 펼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_Somebody-008_C 프린트_160×100cm_2014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이전 작업들에 비해 훨씬 문신이라는 구체적인 행위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이전 작업들보다 더 사실적이고 직접적이고 이미지를 만들고 있음에도 말이다. 작가가 활용하는 3D Max라는 프로그램의 구현은 더 능수능란해졌지만, 그래픽적 이라기보다는 좀 더 회화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작업은 첨단 디지털 기법이긴 하지만 이미지의 선별부터 시작하여 지극히 노동집약적인 (감각) 행위이기에 더욱더 감각적이고 회화적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리고 문신과 같은 특정 이미지의 차원보다는 몸의 원형적이고 날 것 같은 감각 차원이 더 앞선다. 문신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나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것이 아니라 절단된 몸들의 현란한 색감과 형태들이 이루는 자유로운 배치와 구성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절단된 몸들의 자유로운 형태와 색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의 선들, 그러니까 외곽선들의 자유로운 운용들도 눈길을 잡아끈다. 종종 여유 있게 자리한 여백들도 이러한 자유로움을 더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각각의 피부에 각인된 문양들도 뱀피나 송치는 물론 민화 같은 동양적인 이미지나 만화, 일상적인 것들까지 다채로워서 훨씬 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러한 자유롭고 역동적인 형상들의 배치들로 인해 전체적으로, 인공적이고 가상적인 디자인의 느낌들보다는 사실적이고, 동시에 추상적인 회화의 그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루고 있는 이미지의 사실적인 느낌들로 인해 몸이라는 살아있는 감각의 생생한 현실성을 감각하게도 하지만, 절단된 사물들의 감각적이고 구성적인 배치로 추상화의 압축된 형상들(의 배치)로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몸을 다루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작가가 드러내고 있는 몸은 살갗에 국한된 표면들이고, 점점 더 그가 다루고 있는 문신 이미지들이 일대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벗어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평면상의 이미지들로 확장하여, 혹은 이러한 이미지들의 복합적인 관계들로 확대되어 이들 관계들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변해왔기 때문인 듯싶다. 특히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해체된 몸들이 이루는 비정형의 배치는 종래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신체성에 대한 위반의 형상들이기에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준_Somebody-012_C 프린트_90×210cm_2014

작가는 이처럼 기존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신체의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비례, 조화, 규범 등을 가로질러 해체된 조각난 몸들로 이를 절단하고, 연결하고, 포개놓는 일련의 (재)배치를 통해 작가 특유의 살아있는 조형 감각들을 작동시킨다. 회화 역시도 이러한 몸들의 예술, 자유분방한 감각이 빚어내는 예술 아니던가. 특히나 작가의 경우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몸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이미지가 각인된 살갗의 유동적인 배치들에 더 눈길이 가기 때문에 이들 이미지들의 평면적인 구조가 더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고, 이러한 요인들이 동시대 회화들과의 유비를 가능케 한다. 안과 밖이 자리하기도 하지만 동시대 회화의 특정한 흐름들은 오히려 이러한 이미지들의 표면 혹은 살갗에 집중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정서적 감응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살갗이라는 신체의 표면, 그 살아있는 촉감이나 질감에 집중토록 하는 작가의 작업도 같은 맥락이다. 몸은 부분으로도 전체를 표상하는 법. 작가의 경우 이런 절단되고 해체된 몸들을 마치 객관화된 사물이나 물건들(의 이미지들)처럼 거리를 둔 채, 그 생생한 감각들의 단편들을 작가 특유의 유기적인 배치와 구성으로 화면을 이루게 하여 전체적으로 지금 시대의 몸(혹은 사물)의 현상학에 대한 이미지(나 회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전체적이고 완결되지 않은, 불협화음의 화음처럼 절단되고 해체된 것들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이른바 비정형성의 살아있는 감각들이 더 의미를 발휘하는 그런 시대의 이미지 말이다.

김준_Somebody-018_C 프린트_120×120cm_2015

아울러, 머리 없이 덩어리로 자리하는 토막 난 몸들은 그 자체로, 몸이 상실되어가는 이 시대의 (잃어버린) 살아 있는 몸 감각들을 대변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상품미학 사회의 특정한 이미지 혹은 사회의 욕망들이 각인된 몸, 사물들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인 몸, 사물들은 다른 욕망들을 끊임없이 유희하듯 자유롭게 접속하려 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속에는 한계가 없기에 이들 욕망들은 무한하고, 도착적이고, 기묘한 경우들이 많다. 작가 역시 이러한 사회적인 몸을 둘러싼 의미의 여지와 가능성들을 여전히 열어놓고, 지속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명시적인 의미들로 작업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 해체된 몸 이미지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색과 형의 배치에 더 무게를 두어 전체적으로 이런 개념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형상적인 이미지들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절단된 신체의 배치들이 기관 없는 신체처럼, 무한한 욕망의 선들로 배치된,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현실의 어떤 사회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어떤 현실을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도 아닌 것 같기에, 그저 이미지들의 자유로운 동학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모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한 잠재적인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점도 작가 작업의 미덕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첨단 테크놀로지의 사실적인 표현성으로 인해 화면에서 질감이나 촉감이 도드라지고, 종종 실재의 몸을 찍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가상의 감각들이 실재의 감각사실보다 더 사실인 것 같은, 시대 논리마저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김준_Somebody-023_C 프린트_70×70cm_2015

몸은 이처럼 (거짓된) 이미지들조차 우리의 감각들을 꾀어내고, 은근슬쩍 유혹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가 역시도 이러한 몸의 유희 혹은 시뮬라크라(simulacra)가 빚어내는 욕망의 논리 대해 어떤 거리감을 갖고 있지 않아 보인다. 몸은 비판의 감각 이전에 원초적인 감각의 긍정이며, 고통과 거짓일지라도 쾌감 또한 수반하는 묘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문신 개념에 천착한 이유도 이런 이유들이었을 것이다. 마치 실재의 문신 행위처럼 몸에 각인되는 생생한 감각의 차원, 곧 살갗을 관통하는 그 통렬한 통증과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나 쾌감 같은 기묘한 감각들 말이다. 또한 몸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이지만 이런 사적인 감각을 매개로 하여 타자와 교감을 이루는 감각이기도 하기에, 더 크고 넓은 공동체를 향한 공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몸들의 연결접속도 이러한 감각의 관계학, 우리라는 공통감각을 향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지 않을까. 몸이라는 감각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 나와 우리, 주체와 대상, 부분과 전체 등의 이항 대립적 설정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김준_Calf_3D 애니메이션_00:00:25 loop_2015

한편, 컴퓨터 디자인 툴을 사용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즉흥성이나 우연성을 중시하는 작가 특유의 자동발생적인 감각이 주를 이루는 작업이라 여느 디지털 이미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긴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몸(감각)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몸에 관한 어떤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회의 의뭉스럽고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몸이라는 저 멀고도 가까운 실체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쇼핑하듯 수집하여 재배치하고 있지만) 그런 몸들을 작가 스스로의 자유롭고 살아있는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기에(그림 그리듯 육화된 감각으로 이를 다시 재구성하고 있기에), '그리면서 그려지는' 그런 형국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작가 특유의 본능적인 감각 작동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온전히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게 누군가의 몸이기도 할 어떤 이미지들, 혹은 문화적 사물들의 표면들이자 살갗들을 재배치하고 구성한 이미지들이라는 점이야 말로 작가의 작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효과들, 곧 넘쳐나는 이미지(와 몸) 과잉과 상실이라는 이 시대의 맥락과 상응하는 중요한 면모들이다. 이런 '그리고, 그려지는' 과정 혹은 '이미지들의 이미지화'라는 과정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른바 이미지 내파의 시대, 이 조차도 한 몸 일 테니 말이다.

김준_snake_3D 애니메이션_00:00:30 loop_2015

작가는 명민하게도 이런 시대의 생리들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고, 그런 생생한 감각들로 자신의 작업을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와 조우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금 시대는 온갖 미디어가 토해내는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미지들의 세상, 우리 개개인의 살아있는 몸 감각조차도 이들 현란하고 거짓된 이미지들에 의해 구속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몸들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이 익숙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이 넓디넓은 대지에 서 있고, 수많은 감각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현존이다.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러한 시대 속에서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 몸의 감각적 현존을 일깨우고 몸의 감각이 가진 무수한 잠재적인 가능성을 향해 자리한다. 수많은 의미로 충만한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몸에 관한 감각들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이들 몸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경계와 극단에서, 저 의뭉스러운 몸 감각이 가진 숱한 열린 가능성을 전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전해진 감각들이 아주 멀리 있는 요원한 무엇만은 아니란 것이다. 몸은 가장 가까이 자리하면서 가장 멀리 있는 나 혹은 우리에 대한 감각인 동시에 그러한 잠재적이고 열린 가능성을 향한 감각들이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도 이를 분명히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미지의 도래할 어떤 몸을 향한, 그 수다스러운 감각의 속삭임들을 우리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 민병직

Vol.20150522e | 김준展 / KIMJOON / 金俊 / printing.video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