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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0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링크 GALLERY ARTLINK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6번지 Tel. +82.2.738.0738 www.artlink.co.kr
한국현대미술작가들의 국제적인 활동이 주목을 끌고 있는 요즈음, 가장 눈에 띄는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김준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우리의 대중문화와 생활문화가 세계적으로 홍보되면서 점화된 한류 열풍을 한국적 미학의 세계화로 종결시킬 순수 예술 분야 작가들의 국제적 활동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다 할 것입니다. 김준은 유럽, 미국, 중국 등의 다양한 지역에서,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등의 다양한 미술현장에서, 예술적 평가와 미술시장에서의 성과를 고루 보이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렇게 세계미술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21세기 한국현대미술가가 어떤 차별성을 표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환경을 활용하는 그의 그림은 인터넷 상의 이미지 쇼핑에서 시작하여, 첨단 3D 기법을 노동 집약적 방법으로 구현하는 캔버스와 붓 없이 그리는 회화입니다. 대학원 시절 오브제 작업에서부터 지금까지 천착해온 김준의 작품주제는 우리 의식에 각인된 문신(TATOO)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게 모르게 영혼에 깊이 각인된 문신이자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몸뚱이들, 결국은 병들고 다치고, 부셔지는 몸뚱이들은 도자기 파편으로 은유 되고 작가와 우리의 지난 시간 속에서, 영혼을 붙들어 타투 시켰던 존재들의 이미지들이 새겨집니다. ● 연약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정교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 표현 해 낸 김준의 최근작『블루스』展에 초대합니다. ■ 갤러리 아트링크
김준『블루진 블루스」에 부쳐 : 감추어진 채 드러나는 세계(들) ● 세계는 넓다. 그리고 세계는 너무나도 깊다. 우리는 그런 세계 안에 살면서 사실 그 세계를 모른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 안에서 자신의 몸과 영이 속해 있는 세계를 감춘 채 살아간다. 이 감추어진 세계는 그러나 절대로 감추어져 있지 않다. 예술가는, 더구나 시각예술가는 자신의 시야에 잡히는 세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시야를 감추어져버린 세계에로 활짝 열어서 시야 안으로 그 세계(들)을 불러들이려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의 행위를 보고, 세계가 시야 안으로 잡혀들어 온다고 말해야 옳다. 그들은 세계의 됨됨이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자신의 시야로 잡아둔다. 그런 예술가들의 행동을 우리는 "눈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눈뜸"은 곧 예술이며 작품이고 또한 예술가와 감상자의 관계를 정리해 준다. 김준의「블루진 블루스」에서 그 "눈뜸"은 앞 선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깊이를 더하고 있다.
김준의 작품들은 일련의 구획들로 전체를 이루어낸다. 몇 년 전의 작품부터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작품까지 그래서 그의 전체는 각 각의 부분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는 전체를 상정하고 부분을 보여주지는 않으며,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작업 방향을 유지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의 작품이 보이고 있는 하나의 경향에 대해 무덤덤하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우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우연의 개입이 작업의 방향을 만들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독립된 소주제,「블루진 블루스」에 묶여 있으면서 앞 선 작업들이 내보이던 연장선 위에서 '하나'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는 "블루스"(Blues)로 우리를 세계에 초대하고 있다. 그렇게도 애잔하게 노래 불러 세계를 돌려 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분의 종합으로 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영(靈, spirit)보다 몸(肉,flesh)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먼저 보인다. 그 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편안하게 김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쫓아가며 웃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의 작품은 비례의 정합과 다소 엉뚱한 균열을 함께 내밀면서 그 사이를 웃음으로 채우는 솜씨로 마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블루진 블루스」에서 김준은 "그 사이"에 웃음보다 애수(哀愁,phatos)를 집어넣고 있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힘이 찬 팔둑의 문신(들)으로 불러도 좋다면, 김준은 자신에게만 빛나던 청춘과 그 보다 더 어두운 현실을 애가 닳도록 쓰리고 아픈 마음의 눈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팔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웃음으로 돌려 세워질 때, 아마도 예술가는 웃으면서 그 웃음과 함께 울었을 것이다. 사실,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몸(들)은 언제나 이처럼 끔찍한 쌍의 관계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래서 김준의 작품에는 늘 몸이 살과 피가 속아내고 떼어내진 것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 대한 그의 정조(情操, sentiment)는 몸에 대해서 처연하게 노래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지경에 몰려 세워져 있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아직 김준의 노래 전체를 다 들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블루진 블루스」(Blue-Jin-Blues)는 세 가지 형식적 테마(주제적 요소)가 혼용되어 있다. 그 작품(들)의 경향은 세 가지 테마를 통해 하나의 구조를 구축한다. 세 가지 테마 중 하나는 김준의 청춘이자 기억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이 탈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블루진"이고 껍데기로 남겨진 채 작품에 등장한다. 두 번째 요소는 영화와 음악이다. 사실은 영화로 회상되고 있는 자신의 기억의 오늘-곧 탈은폐된 현재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모두 제 각각의 테마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삶의 현장, 즉 먹고 살아야 하는 '나'와 그런 '나'를 껴안고 있는 삶이다. 이 생활의 건강함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로, 그릇으로 그리고 '그 밥그릇'의 질감표현만으로 온전하게 삶을 간직하면서 섞여있다. 작가는 삶을 자신의 기억 안에서 끄집어내어 회상의 형식 안에 넣어 보여준다. 김준이 보여주는 예술가(자신)의 현실은 "그 삶"에서 간격을 키워 가까움을 은폐당하고 있다. 삶의 가까움이란 살아가면서 맞부딪히는 모든 것을 부단히 제거해내는 고단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예술가(들)는 이 고단함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있다. 자기 자신이 부재하는 "자신의 삶"에는 그러나 행복한 "나의 가족"이 그 멀리 떨어져 있는 간격을 두고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위태함에서 "나"를 만나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블루스"의 애잔한 노래 소리로 삶을 위무한다. 보이는 데로 보는 것이 옳다면, 시각예술은 애초에 그 시작이 없었을 것이다. 시각예술가는 자신의 눈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항상 의구(疑懼,apprehension)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데로 보는 것을 한 번이라도 의심하며 두려워했다면, 보이는 것의 '그 가까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단박에 알아 차렸을 것이다. 김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보여주는 것이 "보이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앞 선 작품들에서, 온 몸은 유명상표로 문신처럼, 얼룩처럼 살과 피가 속아져 버린 공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상표도 몸뚱아리도 "가까움"을 치장하지만 가장 멀리 있는 '나'를 가까이 불러내는 것뿐이었다.「블루진 블루스」에서는 아예 "가까움"이 작가의 기억-탈은폐된 곳으로 숨겨짐으로, 보이는 모든 대상들은 김준에게 가장 멀리 있었던 그의 세계에서 온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가까움"이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거리를 없애면서 다가온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흔히 우리가 항상 "무엇"이리고 이름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서 사실 우리는 그 이름 뒤에 숨겨져 있는 '그것들의 참 모습'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애초에 내 주위 세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그의 작품에서 불현 듯 만나고,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각 자가 간직한 그 간격'을 함께 회상하자고 한다. 그것을 두고 블루스로 작가는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 내 준다. 본다는 것은 보임 안에 담긴 의미를 앞으로 던지고 물러서서 받아내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보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과 몸(또는 영(靈)과 몸(몸의 감각)에서 동시에 종합하는 일이다. 보는 감각은 앞에 던져진 것을 던진 채 받아들이고, 마음(또는 靈)은 물러서 받아냄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하나로 만들어 간직한다. 그것을 두고 김준은 세계에 "눈뜸"으로 이야기 하려 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내 삶의 주위", 즉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그가 탈은폐시키고 있는 "나의 주위"에 대한 깊이는 각 자가 스스로 '자신-안에-들어가'서야 비로소 무엇이 자신의 주위에 그렇게 있는지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방향 잡혀 있다. 그 곳은 바로 감추어져 있지만 항상 열려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블루진 블루스」에서는 그 곳이 바로 기억으로 감추어져 있었던 "가까움"에서 멀리 와 있는 "나"이다. 동시에 그것을 회상함으로 돌아가려는 지금, "멀리 와 있는 나"를 불현 듯 알아보는 "나"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청바지에 붙어 있는 브랜드가 바로 그런 "나"를 동시에 불러낸다. 작품 속 블루진의 브랜드는 작가의 딸아이 이름 "Pabi"다. "Pabi"는 "곳"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방향(vector)을 지시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고 바라 본 것은, "Pabi"가 자신의 세계에 오기 전이면서 동시에 "Pabi"가 있어 이제사 온전하게 그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눈뜸"을 통해 그는 감추어져 있었던 것을 개방된 지금의 자기 현실로 불러 올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블루스(Blues)는 또 다른 깊이를 간직한다. 이 번 작품들은 여러 개의 파편화된 의식의 대상들이 모여들고 흩어지면서 '하나'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작품 그 자체이면서 곧 작가의 회상과 기억 그 자체로 돌입함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로서 열려진 것은 지금 새롭게 얻어지는 개방된 세계다. 그가 구사하는 작업방식은 마치 재즈의 비밥(Bebop)처럼, 곡의 테마를 한 연주가가 연주하고 각 섹션(section)의 연주자들이 차례대로 독립된 변주를 하면서 느슨한 약속지점에서 합주(Jam-section)를 통해 곡을 완성해내는 것과 유사하다. 음악에 조예가 있는 작가로서 이런 발상은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일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김준은 자신의 작품이 비록 제작되어져 내보이는 것이지만, 작품이 마주하고 서 있을 지점에서, 즉 현실의 한 현장에서 이미지가 단순히 표상된 것으로서만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이미지를 비록 보이지만 그것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대상들(눈에 보이는 것들) 안으로 밀고 들어갈 때, 혼자만 그것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삶의 지혜를 작품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굳이 Blues를 통해 깊이를 더 한다. 그의 작품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동시에「블루진 블루스」에서, 더 나아가 "전체 작업"에서 Jam-Section으로 완성(깊이)을 향하고 있다. 작가의 눈뜸은 우리 주위 세계에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으로 창을 낸다.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그 열려짐으로 초대된다. 그렇게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도 넓고 깊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계-안에-있으면서" 그 세계의 개방성에 감사를 모르고 살아버린다. 김준은 매일 그 창을 열지만, 아니 좀 더 확실하게 말해두자면, 그는 우리를 매번 초대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눈뜸"으로 바라본 세계 안에서 거주할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렇게 감추어진 세계"는 그러나 그에게 절대로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상징이나 은유의 방식을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우리는 그의 작품 안으로 곧 장 뛰어 들어가 눈을 크게 뜨는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기막힌 순간을 우리가 만일에「블루진 블루스」에서 찾아낸다면, 또 아는 가, 김준에게만 빛나던 그 청춘이 바로 나의 청춘이었던 것을 알아 차려버릴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이섭
Vol.20120607e | 김준展 / KIMJOON / 金俊 / 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