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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5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램프랩 LAMPLAB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20길 47(한남동 31-13번지) B1 Tel. +82.2.6278.7178 blog.naver.com/lamplab www.facebook.com/lamplab.co.kr
비늘, 기와, 그리고 벽돌 - 작가 추영호의 신작「鱗 린」의 형식과 그 의미 ● 추영호 작가가 새로 발표하는 연작 鱗 (린, 2015) 은 과거 환기미술관 등에서의 전시회를 통하여 소개하였던 그의 전작 시리즈와 비교해서 우선 그 형식에서 큰 변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지금까지는 주제물인 가옥을 촬영하여 사진을 캔버스에 접착한 후, 유화로 배경 등을 더하여 마무리함으로써 사진과 그림의 접목에서 그의 작가적 형식의 확립을 찾고자 하였다면, 이번 신작을 통해서는 캔버스 평면, 그리고 사진 프레임 자체로부터의 일탈처럼 보이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무언가 작고 얇은 조각들이 캔버스 위에 수없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마치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이 비늘들이 무리를 지어 마치 부조 (浮彫) 처럼 캔버스 평면 위로 부상하고 돌출하여 자신들의 미미한 개체성을 극복하고 그 존재의 영역을 공간 속으로 확장시키려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들을 관찰하면, 그 비늘들은 다름아닌 바로 추영호의 일관성 있는 주제물인 다양한 집들의 이미지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더욱 다층적으로 발전된 형식 속에 담긴 의도와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아주 간단한 분석을 해보더라도 -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 경향 (Art Now, Volume 4, 2013, Taschen) - 화가, 조각가, 행위 또는 설치예술가 등의 사진매체 활용이 사진가들의 그 역방향 일탈보다 훨씬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각 미술분야의 주된 표현매체 (Expression Medium, Search for the Real, 1967, Hans Hofmann, MIT) 가 지닌 존재론적 속성을 작가들이 고수하거나, 반대로 여기에 의문을 던지며 이종매체와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다소 복잡하고 분주한 시도의 시기로 기술되어지는 우리 시대 미술계의 실천행위에서, 유독 사진가들은 아직도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진가들이 다른 미술가들에 비하여 유연성이나 창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디지털 기술이 사진에 가져온 현재진행형 결과를 보자면, 사진적 표현매체의 다양성은 오히려 크게 퇴조하여 작가가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당연히 손수하던 작업의식은 주문제작 방식의 적극적 수용으로 대체되고 있다. 한편, 잉크젯으로 대표되는 프린트는 불과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종이의 질감이나 두께, 대형출력 등으로 사진의 매체적 표현영역을 마치 유행처럼 한정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오히려 프로세스 기술의 보편화 덕택에 사진가들은 이제 이미지 조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의견들도 있지만 왠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의문은 여전하기만 하다. 사진의 진입장벽조차 점차 퇴색해가면서 이미지의 생산과 경쟁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에서의 표출만으로 완결되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와 같이 다양했던 사진매체들의 집단적 죽음과 이미지 조형의 극단적 경쟁이 예술분야에서 사진의 입지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은 전적으로 사진가들에게 주어진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타 미술 분야의 왕성하고 창의적인 식욕에 협조하는 친절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사진적 표현의 식탁에 그들의 가능성을 초대할 수도 있는데, 예술행위에서의 이런 모호한 경계와 그 정의는 작가들의 자세와 실천으로 명확해 질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추영호의 시도는 그 의미를 찾게 된다.
예술행위에서 이종매체간 융합을 기존 본성의 일부를 포기하고 - 또는 내놓고 - 상대의 새로운 본성을 수용하여 공유결합하는 것으로 정의해 본다면, 추영호의 시도는 그 형식에 있어서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되어진다. 즉, 낱개의 비늘을 만들기 위한 사진의 재프레임 (reframing) 과정과 그 비늘들의 무리를 만들기 위해 무수히 반복, 설치하는 과정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점차 확고한 위치를 잡아가고 있는 '집' 이라는 이미지 기호를 통한 의미작용은 이러한 두 가지 표현형식들과 상승곱의 관계에 있다고 보여진다. 소위 '전통적 사진 프레임의 해체와 재구성' 이라는 표현은 진부하리 만큼 그동안 사진가들에 의해 이미 시도되어 왔다. 단, 추영호의 비늘은 집 모양의 작은 사진 이미지 그 자체로서, 프레임의 해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배경의 해체 또는 배제, 그리고 이런 형식을 통한 주제물과 프레임의 일체 등으로서,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공작가위로 신문이나 잡지의 사진을 오려붙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의 재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업과정에서 다양한 사진적 본성은 퇴조하고 오직 그의 카메라 앞에 실재로 현존했던 존재 즉, 한 채의 집으로서 피사체의 사실적 이미지가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의 노스탤지어 (nostalgia, 향수) 가 가옥이라는 이름의 사물을 통해 표현하려는 주제와 그 주요 동기 중의 하나인 점, 그리고 어느 철학자가 인간들이 흔적의 장소로 만드는 행위로서 건축을 사유했듯이 (Arcade Project, 1927~1940, Walter Benjamin) 추영호는 이 연작을 통해 흔적을 찾고, 다시 흔적을 쌓아올리는 과정을 체험하려 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 그 비늘은 바로 한 장의 기와나 벽돌과도 같고, 거기에는 그가 그리워하고, 짓고 싶고, 살고 싶은 공간의 이미지가 알알이 담겨있다. 그것은 실제 집일 수도 있지만, 그의 삶 자체 일수도 있으며, 그가 희구하는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수없이 비늘을 덮고,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어가는 반복적인 행위 속에 그의 염원은 차라리 인내가 되고, 성찰이 되며, 기도가 된다. 그리고 그 절실함은 캔버스 평면을 벗어나 3차원의 공간 속으로 떠오른다. 추영호의 귀향을 계속 지켜본다. ■ 신성균
상업사진을 하던 시절, 어느 유명한 한류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국내 여행기의 출판에 필요한 사진 촬영을 위해 반년 가까이 그와 스태프들과 함께, 때로는 혼자서 전국 곳곳을 며칠씩 숙박하며 여러 차례 돌아다닌 적이 있다. 어느 날 해질녘 우연히 들르게 된 고향 마을은 넓어진 도로와 새로운 건물들이 기억 속에 아련한 어릴 적의 정경을 애써 대신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해진 집들과 지붕들, 집집마다 여전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니, 잊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삶을 통한 경험과 사유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집들은, 그날 이후 단순한 주거나 활동공간 이상의 더욱 친숙한 소재와 의미로 다가왔으며, 그 지극히 개인적 단상을 사진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본 작품, 鱗 린(비늘, Scales) 의 동기가 이러하다 보니, 선택된 하나의 프레임으로 완성되는 사실적인 기록으로서의 사진보다는, 마치 비늘조각을 한 개, 한 개 이어 맞추는 듯한 방법으로 그 형식을 구상하게 되었다. 가능한 여러 종류의 가옥이나 건물을 찾아 다니며 촬영을 하였고, 이것들을 아주 작은 크기로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씩 프린트한 다음, 집의 생긴 모양대로 하나씩 오려 내었다. 이렇게 준비된 수많은 이미지의 파편들을 다시 캔버스 위에 이어 붙혀가는, 반복적이고 고된 장기간의 수작업을 지난 수년간 계속해왔다. 마치 형상과 기억의 무수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본 작업을 통해 재구성하며 성찰하는 동안, 삶을 단순한 생성과 소멸이 아닌, 존재의 변화와 반복으로 이해하고 싶게 되었다. ■ 추영호
Vol.20150513i | 추영호展 / CHUUYOUNGHO / 秋永浩 / photography.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