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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로고스전원갤러리 기획초대展
기획 / 최정미
관람시간 / 11:00am~05:00pm
로고스전원갤러리 LOGOS PASTORAL GALLERY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664-1번지 Tel. +82.31.458.3300 blog.naver.com/lospsg2013
오늘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이탈리아 고대 폼페이 벽화에 관한 사진 이미지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벽화 그림들이 무엇을 묘사하건 혹은 실재 사물과 얼마나 닮았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 그 긴 세월 동안 옛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에 있다.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다음엔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당대의 풍속과 당대인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또 한 번 감탄사를 뱉게 된다. 마지막엔 이미지들 속에 스며든 세월의 잔흔을 발견하고, 숙연함과 함께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이런 숙명적인 자연의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숭고미를 떠올리게 된다. 흔히 신화나 고대문학에서 만나게 되는 숭고미는 자아와 현실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이상적인 기대감을 자연의 세계 속에서 융합할 수 있었다. 필자의 지식으로 동양의 자연론이나 화론(畵論)을 들먹일 수는 없지만, 허미자의 작업들에서 지난 10여 년간 보여준 변화의 궤적들은, 서구의 회화관(繪畫觀)에서 점차 한국 혹은 동양의 자연과 그 성질로 전환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떤 뚜렷한 전환 의식을 지니고 시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작품들을 시간의 배열에 따라 차례대로 나열해 본다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색상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작품들의 시간상의 변화는, 처음과 끝은 확연히 달라 보이지만, 중간 중간 옆의 그림들은 별반 차이가 없다. 대체로 많은 작가들의 그림들은 어떤 변화의 순간을 맞아 새로운 질적 단계로 접어든다. 이에 반해 허미자는 그림의 변화에 대하여 의식적이지 않다. 지난해(2011년) 개인전 브로셔에 수록된 작가의 짧은 말은 이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화적으로 표현된 자연은 도달해야 할 그곳에 대한 암시이며, 사물의 완성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위에 연장되는 형상의 흐릿한 경계들이다. (중략)" 필자는 작가의 의식 흐름을 짐작하건데, 작가의 발언을 빌은 그의 회화론에서 그는 '흐름의 연장'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그의 작품들에서 느닷없는 변화 없이, 하지만 10년 전의 작품과는 전혀 별개로 보이는 새로운 회화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일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은 "하루의 새벽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연속으로서 시간의 모습은, 작가의 그림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그 끝과 처음이 연이어 있음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다. 허미자의 작업은 그래서 간결한 수필이나 단편소설보다는 대하소설(大河小說)이라 말하고 싶다. 소설에서 각 장마다로서도 완결된 이야기 구조가 가능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지은이의 의도는 전체 이야기를 통해야만 각 장의 구조가 이해된다는 점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묘사 대상의 기질이나 성격이 화면에 생생하게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기운생동에서 생기(生氣)란 용어는 그 생동성이 자연 속에 있는 어떠한 대상을 실물과 똑같게 재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사실주의에 엄밀히 다가간다 해도 그것 자체가 작품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극사실주의 작품들이 사진보다 사실적이라고까지 말은 하지만, 실재만큼 생동감이 있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어떤 그림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진보다도 더 꼼꼼하게 그린 것이 즉물적으로 느껴져, 작품의 생동감을 죽이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서구의 분석적 사고나 사실적 표현으로만 다가설 것이 아니라, 동양의 기운생동의 원천을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에서부터 19, 20세기의 리얼리즘(현실주의)에 이르는, 평면에서의 사실적 구성과 현실의 전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방법론이 현실 혹은 사실적 재현에 보다 다가갈수록 동양의 기운생동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그동안 서구의 재현은 사실의 묘사에 다가서는 '표준형식'을 통해, 한국 혹은 동양 회화에서 강조하는 '기운생동'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잊어버렸음을 의미한다. 흔히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데 분위기(雰圍氣)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팩트(Fact)는 실제 사실 즉 실상을 입증하지만, 분위기는 실제 없는 맥락(Context)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분위기는 사실(팩트)보다 더 상황을 기운생동하게 전해 주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알 수 있다. '애쓰지 않고도 자연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형호(荊浩)의 회화론은 달리 말하자면 '분위기'를 통해 '회화의 실체'에 다가서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현의 입체성은 수묵으로 그려진 회화에서는 죽음의 키스'라고까지 말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흔히 전통을 이야기할 때는 '본질주의'로 돌아가기 쉽다. 정체성 논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이는 전통이 그것 자체로 온전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것 자체가 선택적으로 구성되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이라도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시점에서 의미와 가치를 선택하고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 오늘에 남아있는 전통들도 선별되고 선택의 과정을 통해 재창조된 것이다. 말하자면 전통은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영원불변한 지대에 객관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종 해석적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통은 '역사적 맥락의 산물'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허미자의 그림들은 우리 전통에서 나온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오래전 그의 그림들은 마치 고대 벽화에서나 봄직한 균열이나 무거운 기분의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때로는 색면회화나 표현적 양식을 차용한 듯도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회화적 탐색에서 나온 '흘리기와 칠하기'의 실험으로 보인다. 또한 1970년대 선배세대들의 세례를 받은 듯도 하지만, 연이어지는 변화의 양상들은 그의 작업이 그것과는 사뭇 다름을 알게 한다. 회화적 표현이라는 말이 무의미해 보이는 요즈음에, 그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필자의 눈에 뛴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작가의 화력(畵歷)은 그만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형성해 온 것이다. 허미자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검은 먹의 필선은 완연히 전통의 미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은 마치 수묵화의 한 부분을 잘라서 사각 틀을 지은 것 같다. 배경이 백색이던, 균열이 잔상을 이루던, 나무 가지는 무심히도 화면을 가로 세로로 뻗어있다. 화면에서 여백이 중요시되는 전통그림(수묵사군자 같은)들은 그것으로 공간감을 표현해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이에 반해 그는 여백 없는 그림을 그린다. 입체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림자 같은 실루엣으로 화면은 꽉 차게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전통의 방법과 서구적 방법이 묘하게도 혼용되어 있다. 마치 작가의 작품들이 변하는 줄도 모르게 변해있듯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자연스럽다. 오동 열매들에서 붓으로 닦은 듯 남은 흔적의 잔상은 오히려 공간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정적에 휩싸일 뻔 했던 화면에서 소리(Sound)를 느끼게 하고, 소리가 울리는 공간을 보이게 한다. 이와 다른 그림들에서는 배경의 작은 균열이 평면의 감각을 사라지게 한다. 이 두 종류의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가장 전통적인 기법에서 새로운 표현을 얻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하나하나의 그림들에서 적지 않은 노고의 실험들을 해내고 있다. 회화의 분위기라는 기운은 이렇게 전통을 원천에 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들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아마 작가는 이즈음에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전승보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이란 글귀가 있다. 곧'오동나무는 천 년이 되어도 항상 거문고 가락을 간직한다.'는 의미다. 21세기를 훌쩍 뛰어 넘어 천 년의 세월로 이 땅의 미술 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소망을 담아내기에 오동나무만큼 적절한 소재가 또 있을까? 거대한 화폭을 가로 지르며 뻗어 있는 깊은 색채의 검정색 줄기와, 그 사이로 난 섬세한 잔가지들은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과 그 안의 크고 작은 희로애락 같다. 가지 위로 흩어져 있거나 혹은 모여 있는 잎들은 외벽 안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시작을 전한다. 안료가 화면의 결을 따라 번지면서 가지와 잎의 경계를 가볍게 흐트러뜨리는데, 평론가 심상용은 이를'세계의 응고, 사물의 어혈을 풀어내는 회화의 처방'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치유의 과정을 거쳐, 보다 건강하고 뜻 깊은 장소로 거듭날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 ■ 허미자
로고스전원갤러리의 아홉 번째 초대작가는 허미자 이다. 작가는 서울 출생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작가 허미자에게 '회화'를 한다 함은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자체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를 회화에 담아내기보다 자연의 시작이자 끝인 지점에 대한 '회화'로서의 확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허미자의 작업에서 회화적으로 표현된 자연은 도달해야 할 그곳에 대한 암시이며 사물의 완성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위에 연장되는 형상의 흐릿한 경계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어진 선들은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붓질은 세계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대상과의 변증적 양가성을 내포하며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 드 서울(2012), 그림손 갤러리(2009), 국립 고양스튜디오갤러리(2006), 금산갤러리(2004), 장흥 토탈미술관(1996), 관훈미술관(1984) 등에서 11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아트경주'(경주 예술의 전당, 2012), '10인의 물질적 공간전'(공평아트센터, 2011),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상하이 아트페어, 동덕아트센터, 2010), '서울의 새 아침 전'(서울아트센터, 2009), 대구아츠페어, SOAF, KIAF(2007), '낭만주의의 두개골을 만지다'(장흥토탈미술관, 2001)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기획 및 단체전에 참여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로고스전원갤러리
Vol.20150423e | 허미자展 / HEOHMIJA / 許美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