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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요일_10:00am~05: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세솜 GALLERY SESOM 경남 창원시 의창구 용지로 239번길 38 Tel. +82.55.263.1902 www.gallerysesom.com
Inside Painting_오래된 사진에서 시작된 '존재'의 그림 ● 그렇다면 최요셉이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존재관'은 어떠한가? 그리고 2011년 이후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변화는 이 흐름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 우선 최요셉의 작품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림의 양식이나 소재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 즉 '존재'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작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 존재에 관심이 생겼다. 당시는 이 실존의 묵직한 무게를 표현주의적 붓 터치로 담아냈었다. 아마도 안정적인 취업 대신 예술의 길을 택한 그에게 녹록치 않은 일상이 무게를 더해주었는지 모른다. 2005년, 최요셉은 '포토 페인팅(photo painting)'을 시작하게 된다.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포토 페인팅처럼 윤곽이 흐릿한 그의 작품들은 리히터가 또렷하게 그려 놓은 아웃라인을 일부러 흐트러뜨림으로 '모든 규정에 대한 거부'를 밝힌 것과 달리, '내면의 존재에 대한 접근'을 보여줌으로써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점은 최요셉이 포토 페인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서도 잘 나타 나 있다. 어느 날 파리 한 벼룩시장, 상인이 버린-상품 가치가 없어서- 낡은 봉투 안에서 그는 한 여인의 오래된 사진들을 발견했다. 이름 모를 한 여인의 일대기-유년기, 결혼, 노년의 모습이 오롯이 기록된 사진들을 보면서 작가는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이 가치 없게 여긴 낡은 사진에서 그가 영감을 받았던 이유는 분명 이전부터 실존의 무게에 집중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지게 된 작가는 이를 점차 넓혀가기 시작했다.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보편성을 담아낼 수 있는 포즈와 표정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강렬한 환희나, 짜릿한 희열, 또는 무너지는 슬픔이나 처절한 고통도 나타나지 않는다. 무심한 듯 보이는 표정 그러나 예리한 관찰과 보편적인 언어로 인간 존재를 그리는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그래서 때로는 드가(Edgar de Gas)나 모네(Claude Monet)처럼 인상주의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지각에 입각하였던 인상주의와 달리, 그의 '일상'은 '보편'과 '내면'을 드러내어준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진실성, 영성, 잊혀진 세계로의 연결 ● "우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늘 그 존재의 진실성은 감쳐줘 왔기 때문"에 인물의 정확한 묘사를 피했던 최요셉에게 진실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2012년 최요셉의 작가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 그런 이유에서 그가 그리는 영적 세계는 허구가 아닌 전적으로 체화된 경험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을 시각적으로 전달해 주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을 작품에 남겼다. 곳곳에 등장하는 몇몇 흰색 물체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들에 그려진 하얀색의 기둥과 거울이 그것이다. 영적 존재감이 깃든 물건이나 인물과 달리, 이 기둥과 거울은 존재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하얗게 지워져 있다. 작가는 이 기둥과 거울이 하얀 물감으로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배경색을 칠한 다음, 하얀 물감으로 '지운 것'이라 한다. 초기 인물화에서의 얼굴과 마찬가지이다. 존재를 내포하고 있는 여러 일상적 오브제들은 기둥, 거울 같이 불현듯 등장한 영적인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공간 개념(Spatial Concept)」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바닷가의 남자(L'homme du large)」에서 화면상의 공간이 베이거나 찢어짐으로 드러나게 되는 또 다른 차원/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작가가 말하는 '존재의 진실성' 그 자체일 것이다. 때문에 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최요셉의 「시인(Poet)」은 실존적 인간과 영적 세계와의 공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만남은 낯설다. 마치 라디오가 수많은 신호 중 어느 한 주파수를 잡아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주파수를 동시에 수신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최요셉의 작품에 기둥과 거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존하는 존재는 영적 파장을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만남에 대해 작가의 시각은 흥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렵거나, 허망한 어조가 아닌 관심과 유쾌함에 가깝다. 그래서 최요셉의 작품들,「기둥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무제」에서의 손만 나온 채 큰 거울을 들고 있는 사람과 같은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의도된 경쾌한 질문을 통해 우리에게 저 너머에 연결된 또 다른 세계, 잊혀진 그 세계를 상기시켜주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그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감각해지지는 않았는지, 그림은 묻고 있다. ■ 이상윤
Vol.20150313c | 최요셉展 / Joseph Choi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