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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00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5:00pm / 주말 휴관
더 미디엄 THE MEDIUM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27번지 3층 Tel. 070.4084.8965 www.themedium.co.kr www.aliceon.net
전지윤론, 흔적과 기억, 망각의 서사들-흔적과 서사의 기억들 ● 전지윤의 작업은 늘 흔적에 관한 이야기이며,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그 자체로 흔적이고자 한다. 전지윤의 작업에서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작가가 말하려는 그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지윤의 흔적이 그저 덧없는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지윤의 작업에서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작가가 말하려는 그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지윤의 흔적이 그저 덧없는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흔적은 누군가를 유혹해 끌어들이려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시각의 형태를 갖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사-이야기의 공간이자 기억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전지윤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흔적의 공간에 채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관객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 기억은 망각되어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자신을 구성하는 서사-이야기이다. 미디어와 기억의 관계망 ● 오늘날 많은 경우 미디어아트가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조잡하고 화려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오히려 미디어의 미디어다움에 천착하는 전지윤의 작업은 꽤나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때 흥미로운 점은 전지윤이 미디어의 의미에 충실할수록 가시적인 화려함을 희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제 아무리 화려한 스펙타클의 외양을 갖는다 하더라도 유사-회화, 유사-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지윤이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흔적'으로 남겨두려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공유하면서도 일상의 익숙함 속에 묻어둔 순간의 기억을 호명하는 강렬한 장치로 삼기 때문이다. 그 장치 에 의해 호출된 기억들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그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한 잔의 커피, 치즈 샌드위치(「sugar shock」), 남성의 성기(open your mouth)는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근접한 경험 속에서 구성된 서사의 작은 교차점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일상 속에서 경험되었을 또 다른 이야기들을 위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전지윤은 때로 이 사소한 오브제들을 하나의 집적된 형태로 제시하기도 한다 (「rake out」). 탈주 ● 2000년 중반 이후 전지윤의 작업의 변화라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기반한 증강현실(augmented realtity)을 사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한편으로 전지윤의 작업을 소박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은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변화가 그의 작업이 놓일 장소를 확대시켜 왔다는 점이다. 이점 역시 미디어의 의미를 전제할 때 전지윤의 작업에 내재된 중요한 가능성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이란 망각의 공간이다. 그것은 기억을 표백한다. 일상의 기억을 말소하고서야 예술의 순수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표백하는 순수의 공간에서 전지윤의 작업이 놓이는 것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번 개인전 『Data Fantasy』가 더 미디움이라는 사무실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을 일종의 data라 한다면, 그러한 data들의 자유로운 변주로서의 fantasy에 가장 적합한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전지윤의 소품들은 더 자연스럽게 일상의 공간에 녹아들고 있다. 자유, 기억, 존재 ● 미디어아티스트로서 전지윤이 구사하는 테크놀로지의 수준이 더욱 복잡해지겠지만 그 복잡함은 오히려 더 단순하게 체감될 것이다. 전지윤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며,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고 또 한편으로 그것을 망각하게 된다. 그 경험과 기억, 그리고 망각은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고 또한 소멸시키게 된다. 전지윤의 작업은 그러한 존재의 구성과 소멸에 천착한다. 또한 그 가운데서 전지윤은 한계와 자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이 인간 존재의 한계에 대한 저항인지 체념인지 평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전지윤이라는 작가가 보여줄 미학적 여정에 있어서 당분간 중요한 화두가 되리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 김동일
이미지의 우주와 자동기술법 ●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보자면 참으로 작고 생존의 한계가 분명한 인간은 늘 현실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는 통로 혹은 수단으로서 상상의 공간/세계를 갈구해 왔다.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의 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세계, 환영이거나 귀신이거나 혹은 종교적 내세관이거나... ... 그 중에서도 프레임너머에 객관적이고 명증된 가상공간을 실현했던 원근법은 근대적 지성의 출발점이라고까지 말해진다.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가상공간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가상공간을 생성하는 보편적 룰을 확립한 셈인데, 예를 들어 동양의 산수화에 활용되었던 삼원법은 개인의 경험이나 정신성에 의해 그 결과가 달리 나올 수 있지만 원근법에 적용되는 단안(單眼: 하나의 눈)에서 시작되는 시각적 피라밋의 유클리트 기하학은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보편타당하고 표준화된 모듈이므로 대량생산도 가능하다. 그리고, 가상공간에 대한 인간의 탐닉은 산업혁명 이후에 폭발했다. 현실과 가상공간을 구분했던 프레임은 입체사진에 의해 무너지고, 파노라마에서는 사라졌고, 최근에는 그 공간을 통한 현실적 체험을 제공하는 가상현실의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인 흐름은 여기서 한번 방향을 바꾼 듯하다. 대체현실을 추구하던 욕망은 증강현실이라는 기술을 동원하여 가상성을 현실과 연결지어 그 속에 숨겨진 리얼리티를 찾거나 복원하며 새로운 리얼리티는 생성해 간다. 로이 애스콧은 그것을 구축현실(constructed reality)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구성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엮어서 풍부한 문맥을 만들 수 있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상상을 덧씌울 수 있으며, 물론 전혀 다른 문맥이 있는 장소로 재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조만간에 지구 대기권과 같은 범위안에 기술권(technoshpere)이 형성될 것이다. 모든 정보는 이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생태계의 일부가 되고, 헤아릴 수 없는 사물과 장소, 생명과 기억, 사실과 환영이 서로 연결되어 우주적 네트워크로의 확장되며, 세계는 다시 서술되기 시작했다. 마릴린 몬로가 즐겨 읽었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시(詩)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으로 유명하다. 자동기술법은 자동연상법이기도 하다. 그처럼 하나의 단상, 감각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연상(聯想)을 이어가듯이, 기술권이라는 우주에서는 모든 정보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롭게 통합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AR에서라면 숨겨진 정보/기억을 불러내는 스위치=마커가 그 연상의 통로를 열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인터넷을 통해 모든 종류의 기억이 소환되고 다시 쓰고 또 기록하는 인터랙션이 무한반복되는 중이다. 과연 이 세계는 어디까지 설명되고 그려질 수 있을까? 25개 문자와 코드에 의해 기록되는 모든 책의 매트릭스인 「바벨의 도서관」도 그러한 전망을 피력하고 있지만 지구상의 생명계는 네 종류의 핵산으로 코딩된 (유전자) 정보의 우주이다. 유전자가 이중나선이듯이 AR이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이중으로 엮어내며 생성되는 리얼리티의 만다라가 얼마나 확장될 것인지 또 그것을 예술 혹은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정신활동의 무대로 삼을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전지윤은 스마트 기기를 인터랙션 도구로 사용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를 표방하는 작가로서 스마트 기기와 복합 센서 기반의 상호작용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작업에서 그는 관객의 액션과 작품의 리액션, 그리고 인터액션으로 이어지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기본틀을 통한 환타지의 체험하도록 하는 장치를 비롯하여, 미디어의 매개에 의한 가상과 실재의 위상변화, 그리고 자동연상법과 같은 수법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흐름이나 감정의 흔들림과 말초적인 감각을 표상하는 등, 초현실적인 의식의 흐름을 상호작용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의, 사물과 이미지와 의식의 연결은 제임스 조이스의 시절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였으나, 지금이라면 바벨의 도서관(보르헤스), 이미지내리엄(야마구치 카츠히로) 등 정보와 이미지의 우주에 대한 전망은 구체화되고 있으며, 그것이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과 융합된 형태로 구현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사용하는 '스위치'이다. 그가 사용하는 '마커'는 흔히 사용되는 것처럼 디지털 방식으로 코딩된 것이 아니라, 비록 프레임 속에 수납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아날로그적인 형상이고, 또 조명과 촬영상태에 따라 다르게 읽혀질(decoding) 수 있다. 이 때문에 의식의 흐름은 임의적 상태에 놓이게 되고, 자동연상법이 그러하듯 어떤 정해진 방향성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AR기술을 개발하는 공학자들이라면 이런 불확실성의 반칙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기성의 미디어를 매뉴얼대로 답습하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통로를 열 수 없다는 점에서 필자는 전지윤의 방식에서 가능성을 본다. 존 케이지가 피아노의 내부를 해킹하고, 백남준이 다이오드를 반대방향으로 연결하거나 TV를 고장내면서 전위음악과 비디오아트의 새로운 문맥이 열릴 수 있었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모바일기기의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세계적인 산업전선의 격전지가 된 작금의 스마트폰 기술은 철저하게 블랙박스화되어 예술가들에게 닫혀진 영역이 되었다. '전위예술'은 매우 오래되고 진부한 냄새가 나는 말이기는 해도, 이 닫힌 기술에 예술가들을 위한 새로운 전선이 열리고 확대되기 위해서는 이런 유형의 아방가르드적 해커의 등장이 절실한 시점이다. ■ 이원곤
Vol.20141130d | 전지윤展 / CHUNJIYOON / 全志胤 / media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