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trix

전지윤展 / CHUNJIYOON / 全志胤 / media art   2011_1123 ▶ 2011_1209 / 일요일 휴관

전지윤_A Couple of Men Series,Interactive Work(Mobile AR) w iPhone_18×26.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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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123_수요일_05:00pm

주최 /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VIP Lab_한독미디어대학원 UBIA Lab 주관 / 교육과학기술부_한국과학창의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대안공간 충정각 ALTERNATIVE SPACE CHUNGJEONGGAK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60-22번지 Tel. +82.2.363.2093 www.chungjeonggak.com

관계로서의 미디어, 혹은 전지윤의 『The Matrix』 ● 1. 전지윤은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사실 이 명제는 이제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미디어아트가 지난 1995년 광주비엔날레 이후 한국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이미지 조직방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윤의 이번 개인전 『The Matrix』에 관한 기록을 이런 평범한 명제로 시작하는 이유는, 의외로 미디어아트의 이름에 값하는 작업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상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면에서 살펴야하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미 미디어 자체가 예술적 실천의 목적이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어원상 '미디어media' 는 일종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매체란 말 그대로 어떤 것들 사이를 '연결'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사실 모더니즘 이전에 모든 예술은 미디어아트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술은 무엇에 관한 의미를 안간 사이에서 담아내고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교과서에서 예술의 기원으로 삼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는 당대 인간 집단 속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공동체의 의미를 담는 매개체였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미디어아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이후 모더니즘 예술이 예술계의 지배적인 미학으로 자리 잡고 난 뒤 상황은 복잡해진다. 매체는 더 이상 의미의 담지체이자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작품은 표현의 목적이 되고, 매체는 그 목적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관한 객관적인 물적 증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과는 분리된 채, 광기 혹은 지고의 예술혼을 간직한 자율적이고 독백적인 주체로 남게된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매체는 매개체가 아니라 자율적인 본질이 된다. 본질은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 오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평자가 미디어작가로서 전지윤의 작업을 평하면서 매체의 의미와 모더니즘 미술을 논하는 이유는, 전지윤의 작업이 매체미술이 놓인 현재의 맥락에서 분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란 바로 매체미술이 모더니즘 미술의 맥락에서 실천되고 있는 모순이다. 매체미술에서 매체가 그야말로 매체로 존재하지 않고, 모더니즘 미술의 연장선상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매체미술의 이름으로 말레비치의 하얀바탕 위에 하얀 사각형, 혹은 잭슨 폴록의 드리핑의 또 다른 형태들이 재생산되어진다. 물론, 이러한 저간의 사정들은 동시대 미술의 발전 속에서 미디어아트가 실제적으로 모더니즘 미술의 틀 내에서 혹은 모더니즘 미술관의 관련 속에서 발전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흔히 매체미술에서 사용되는 매체는 또 다른 오일 온 캔버스이거나 그 변종일 때가 많다. 물론, 현재의 미디어아트가 추상어법 중심의 과거 오일 온 캔버스와 구별되는 점은 명확하다. 무엇보다 과거의 모더니즘이 붓과 캔버스를 개인예술가의 손끝에 체화된 스타일과 그것의 구체적인 반영으로서 스트로크에 의해 물감의 흔적으로 남는다. 반면, 발달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어법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점멸하는 빛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아트가 본질적으로 표현적인 관점에서 반 고흐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적 신비한 예술가 모델이 상정하는 비타협적이고 고립된 표현주체의 독백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모니터 스크린 위에서, 혹은 흰 벽면에서 빔 프로젝터로부터 발사된 광선을 통해 화려하게 점멸하는 디지털-빛의 흔적들은 의외로 이우환과 김환기의 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아무리 관객의 이성과 감각을 환기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자극과 환기는 매체가 위치해야 할 '소통'의 맥락과는 분리된다. 그것은 공동체의 맥락이 아니라 고립된 독백적 주체로서 개인 예술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관객들에게 강요된다. 관객들은 수동적으로 빛과 자극에 반응한다. 이처럼 강요되고 불완전한 소통 속에서 동시대 매체미술의 발전 방향은 과장된 테크닉의 과시, 무의미한 이미지들의 무한반복으로 점철되어 왔다.

전지윤_Action_Interactive Work w iPhone 4G, Monitor_2011
전지윤_away from you_Interactive Work w iPhone, Monitor_2011
전지윤_,How Do You Do_Interactive Work(Mobile AR) w iPhone_2011
전지윤_How Do You Do_Interactive Work(Mobile AR) w iPhone_2011

2. 여기서 다시 '전지윤은 미디어아티스트이다'라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가 보자. 이 명제는 여전히 너무 진부하고 평범하지만, 역설적으로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역설적인 새로움은 전지윤이라는 개별예술가의 구체적인 실천을 다른 미디어아티스트들과 비교할 때 더욱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전지윤의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매개체'이며, 이 매개체는 매체 자체의 무소불위의 자율성이 아닌, '관계'들 속에, 그 '사이'에 놓여진다. 전지윤은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를 통해 결국 매체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려하고 있다. 물론, 전지윤이 테크놀로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지윤은 현재 미디어트의 발전 과정 속에서 가장 첨예한 공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지윤은 그러한 발전된 기술들 그 자체를 과장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기술들은 감추어진다. 기술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되고, 반면 도드라지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며,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이다. 작가는 그러한 관계들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성을 시각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지윤이 구사하는 기술을 '인간화된 테크놀로지'로 부르고자 한다. 예술이 곧 인간의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의 소산이라면, 전지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디어아트라는 수단을 통해 예술이 갖는 궁극적인 이념을 수행하고 있다. 인간의 솔직한 감성과 경험에 다가서는 기술이야말로 동시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이 역할을 조용하게, 과장되지 않은 방식으로 수행하는 전지윤은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한국적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실, 평자가 전지윤의 작업에서 관심을 갖는 점 역시 기술 보다는 그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인간화를 수행하는 방식,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디어를 통해 인간관계를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가설적인 형태로 표현한다면, 전지윤은 자신과 타자 사이의 내밀한 경험을 일종의 시각적 알레고리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알레고리가 '우화'처럼 다른 수많은 현상과 현실을 설명하는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표본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전지윤도 그녀와 그녀의 삶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밀치고 당겼던 구체적인 타자와의 관계와 , 그 관계 속에서 남겨지고 축적되어진 감성의 흔적들을 복원하고 있다. 결국 전지윤에게 매체와 테크놀로지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각인된 매일한 경험을 보다 역동적으로 현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전지윤의 미디어 작업에서 나타나는 미학을 '알레고리'로 지적할 때 흥미로운 것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미디어를 통해 확장함에 있어서 구사하는 미묘한 드러남과 감추어짐의 조절이다. 전지윤이 구사하는 경험들은 분명 자신만의 것이지만, 그 경험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아가 이 거리를 통해 그 이미지들을 접하는 관객들의 경험을 수용할 여유를 확보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자신만의 것으로 사유화하지 앟고 동시에 모든 이의 것으로 일반화하지도 않는 그 미묘한 거리두기는 매우 역설적으로 또한 매우 절묘하게 전지윤 자신과 일반화된 타자들의 삶의 경험을 담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또 다시 '매체'의 의미로 돌아가 보자. 매체가 무엇인가의 '사이'에 위치한 의미의 객관적 담지체를 의미한다면, 전지윤이 수행하는 이미지 조직방식은 전지윤 자신, 그리고 자신과 구체적으로 얽힌 타자 사이에서 형성된 관계와 경험을 담지하며, 나아가 이 경험을 이 작업을 관찰하는 타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확장하려 한다.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기능을 수행하는 매체로서 적정화, 최적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첫 문장을 '전지윤은 미디어아티스트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한다면, 그 명제의 진리가는 미디어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판단되어져야 한다. 전지윤의 미디어는 생각보다 철저하게 작가의 내면에 다가서 있으며, 나아가 작가의 내면에 다가서는 바로 그만큼 타자의 경험에 맞닿는다. 만약 전지윤의 미디어아트의 특징을 보다 '인간화된 테크놀로지'로 기술할 수 있다면, 이는 그저 한 개인 예술가의 미학적 실천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당대 미디어 아트의 한국적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전지윤_The Free Color Packed Motion_Interactive Work w iPhone, Projector_2010
전지윤_Spit in a Smiling Face_Interactive Work w iPhone 4G, iPad 3G_2011

3. 전지윤의 미디어 작업에서 사용되는 테크놀로지는 인간적인 측면과 관계적인 요소를 충분히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점은 이번 개인전에서 중요한 비평적 관건으로 보인다. 미디어아트가 사진과 단조로운 싱글채널 비디오와 등가되던 시절부터 전지윤은 비교적 복잡하고, 정밀하게 가공된 공학기술에 기반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외면적으로 이번 전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스마트폰과 이른바 '증강현실'이라는 공학적 프로세스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스마트폰이 가장 발전된 IT 기술일 뿐 아니라 가장 창조적인 상상력을 우리의 손바닥 위에서 현실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나아가 스마트폰이 일상 속에서 삶의 한계를 뛰어넘고 인간관계를 가장 미시적인 수준에서 재조직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 역시 새삼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스마트폰의 첨단적인 기능과 특성들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특히 작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드러내고, 이를 일반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스마트폰은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감성을 반영하고 나아가 그것에 개입한다. 인간화된 테크놀로지를 지향하는 전지윤이 스마트폰이 갖는 이러한 가능성을 그냥 넘길리 없으리란 예상은 힘들지 않다. 전지윤은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과 타자의 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서술하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가 폰카를 찍고 사물을 검색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그것을 관람하고 즐기도록 유도한다. 작가는 여기에 이른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포개어 놓는다. 증강현실이란 현실과 가상을 중첩시킴으로써 사실의 사실성을 강화하거나 사실과 가상 사이의 경계를 소멸시키는 공학적 공정인 동시에 철학적 관점을 말한다. 전지윤은 스마트폰의 뷰파인더를 통해 눈 앞에 놓인 현실과 사물을 포착하게 하고, 여기에 자신이 가공한 가상의 이미지를 구동시킨다. 전시장에 선 관객의 손 안에서 현실과 가상의 이미지들이 서로 엉키면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매체미술의 관점에서 증강현실의 도입이 갖는 의미는 주목할만한 것이지만, 평자가 좀더 높이 평가하는 점은 이러한 기술적 측면들이 결국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와 현실에 내포된 이야기들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고 보다 역동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Free Color Packed Motion」, 「Action」, 「Away from You」, 「Move Over There」 등이 아이폰의 조작을 통해 이미지의 변화를 유발시켜, 관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함수화한다면, 「Spit in a Smiling Face」는 이러한 함수를 보다 역동적으로 변환시킨다. 앞의 작업들이 관객의 아이폰 조작을 독립변수로 삼고 화면의 이미지 변화를 종속변수로 한다면, 「Spit in a Smiling Face」는 스마트폰의 조작이 벽면에 투사된 스크린 이미지 뿐 아니라 아이폰 화면의 변화를 수반한다. 즉 아이폰에 비추어진 내모습이 어느새 스크린 위에 투사되고 스크린의 이미지가 내 아이폰에 옮겨진다. 공학도들에게는 간단해 보이는 조작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작업의 예술적 함의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문제삼고, 나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는 것이다. 스마트 폰이란 소통의 도구이지만, 직접적인 대면은 오히려 줄어들고, 타자의 부재는 더욱 커진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수록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결핍은 오히려 더 커지는 경험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A Couple of Man」은 증강현실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킨다. 이이폰의 뷰파인더가 벽에 걸린 사진 속 인물을 포착하면 화면 내에서 또 다른 가상의 동영상 이미지가 구동된다. 벽에 걸린 사진 속 사내가 거의 무표정에 가깝다면, 아이폰 속에서 구동되는 동영상 속 사내의 표정은 그야말로 파괴적이다. 결국 표정 없는 사내의 내면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존재가 외양과 내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외양과 내면의 상이한 두 모습 모두 '두 남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내면의 파괴성이 두 사람 사이의 부정합한 관계의 산물이라면, 외양의 무표정함 역시 그러한 내면을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오히려 더욱 드러내고자 하기 위한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내면과 외양,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단순히 외양에 초점을 두는 리얼리즘이나 내면에 집착하는 감성적 추상은 모두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화된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은 보다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전지윤은 이를 아이폰과 증강현실이라는 공학적 공정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A Couple of Man」이 '두 남자'로 표시되는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Don't Sqeeze」는 증강현실을 좀더 사회적인 지평 위에서 구현시킨다. 쥐어짜내어져(sqeezed) 쪼그라든 가슴은 분명 여성성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전지윤의 전작들을 고려할 때, 이 여성성은 작가와의 관계 맺는 중요한 타자일 것이다. 이 타자는 자신의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일 수도 있다. 전지윤이 설정하는 자신만의 내밀한 경험과 그것의 일반화의 스펙트럼 어딘가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포함하는 한국사회의 보편적 여성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증강현실은 이 결핍된 가슴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 벽에 걸린 가슴은 보잘 것 없는 외양을 갖지만, 아이폰에 캡쳐된 가슴 위에는 화려한 꽃들이 피어난다. 이미지를 통한 모성적인 가치에 대한 회복, 테크놀로지를 통한 사회적 결핍에 대한 상상적 위로와 보상이랄까? 이번 전시에서 평자가 가장 흥미롭게 지켜본 작업은 「How do you do?」였다. 사실 다른 작업들에 비해 이 작업이 그리 두드러진 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저 충정각의 한 테이블을 아이폰으로 비추면 증강현실을 통해 화면 속에서 낯선 사내가 테이블 앞에 와 앉는다. 이내 이 사내는 떠나고, 비슷한 매무새를 한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난다. 실상 이 사내들은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복장으로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하나의 장소에 축적된 개인의 기억을 꺼내고자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그저 물리적인 좌표 위의 한 점이 아니라 나와 또 다른 타자의 만남의 경험으로 인지되고 기억된다. 또한 이러한 기억들의 축적이 곧 '나'를 이룬다. 화면 속에서 등장하는 사내는 물론 전지윤의 내밀한 경험 속에 기억된 특별한 누군가에 분명하겠지만, 그러한 구체적 특수성은 감추어지고, 익명적인 타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익명적 타자화는 개인적 경험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험이 전지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사내는 실상 우리의 경험과 그 경험 속에 흔적을 남긴 타자들을 호명하는 알레고리일 수 있다. ■ 김동일

Vol.20111123m | 전지윤展 / CHUNJIYOON / 全志胤 / media art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