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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04_화요일_06:00pm
대구MBC Gallery M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1번지 대구문화방송 1층 Tel. 053_745_4244 www.gallerym.co.kr
전지윤론, 혹은 존재의 살과 피에 관한 노골의 미학 ● 1. 논하기 전에 조금만 돌아가 보자. 전지윤. 어려보이지만 노련한. 또 어느새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지만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와 있는. 그리 오래 안 건 아니지만, 아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익숙치 않은 강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한참 일에 치인 노련한 디자이너였다. 청바지 차림에 헝클어진 매무새. 손톱 밑에 잉크 때가 가득한 채. 일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양새랄까. 피곤할 법했지만 수다는 대단했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 섹스. 육체. 몸. 처음 만난 사람들이 쉽게 나누지 못할 주제들에게 관해 거침없이 재잘댔다. 노트북으로 보여주었던 이미지들. 말해주었던 기억과 경험들. 이상한 건 그리 추해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아주 보수적인 필자에게조차 어색하지 않았단 말이다. 아주 쿨하고 담박하게 몸들을 보고, 체위에 관해 물었던. 처음 만난 남녀가 전혀 낯뜨겁지 않게 나눈 아주 이상한 대화들.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결코 없을지도 모를. 이런 기묘한 기억들에 관한 불완전한 명사와 관형절(冠形節)들로 가득차 있다. 내 머릿 속의 전지윤 항목 말이다. ● 2. 이 주관적인 기억들을 좀더 객관화해 보자. 그녀는 디자이너이자 작가이다. 상반되는 정체성이다. 이 상반성은 여러모로 작용한다. 상반성은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이것이 그녀의 작업을 관전하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점을 다르게 치환해 보자.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또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것들의 대립 속에서 차별성은 어떠할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디자인은 좀더 객관적일 수 있다. 객관이란 '밖에서' '본다'는 뜻. 디자인은 포괄적인 관계들 속에서 존재한다. 이 관계 속에 생산자와 판매자, 그리고 상품의 구매자가 포함된다. 이 포괄적인 관계 어딘가에서 디자인은 신비한 마술을 구동한다. 이 마술은 상품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관계의 아주 신비한 확장을 가능케 한다. 디자인은 물론, 이미지 생산과 소비에 관한 또 다른 이중적 관계 속에 있다. 이 관계 역시 객관적이다. 즉,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를 갖는다. 디자이너는 이미지 생산자에 해당한다. 클라이언트는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디자인은 이 두 객관적 시각의 요구들이 마찰하는 어딘가에 위치한다. 격렬하게 마주치는 거부와 수정, 관철의 지난한 과정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이다. 그 속에서 디자인의 디자인적인 시각이미지가 생산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예술은 주관적이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물론, 이 속에도 작가, 관객, 구매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디자인의 경우만큼 직접적이진 않다. 디자인의 객관성과 예술의 주관성. 이 외의 다른 차이를 모두 기술하는 따위는 좀 거추장스럽다. ● 3. 자 그렇다면, 이 상반성 속에서 전지윤의 위치는? 디자이너인 동시에 예술가인 그녀는 실천논리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양갈래 속에서 갈래 갈래 찢겨질 것인가? 좋은 디자이너이면서 좋은 예술가일 수 있는 가능성은 현실 속에서 그리 녹녹치 않다. 다소간 신파적인 스토리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전지윤에게 두 길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점이 전지윤의 덕목이라 할까? 하긴 그녀의 이력은 작가로서의 훈련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조소를 전공했고, 미국에서 사진과 미디어를 공부했다. 머랄까. 디자인은 그 경로상 이후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이 경로에서 디자인은 이전의 과정들의 연속으로 보인다. 조형의 감각과 논리를 상실하지 않은 디자인. 디자인의 객관성을 확보한 회화. 물론, 이 가능성은 그녀가 제기하는 작품 내에서 평가되고 확인되어야 할 것들이다. 아직은 가설임을 전제로, 그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즉, 객관의 요구를 담지하는 주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타자적인 공유영역을 확보한 주체의 경험. 글쎄. 이걸 어떻게 바꿔보랴. 전지윤의 주관과 객관의 공유영역은 아주 좁고 아주 분명하다.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추상적인. 아주 내밀하면서도 아주 일반적인. 그런 영역이다. 아주 조금 내 패를 엿보이면 이렇다. 전지윤 미학의 내용은 존재의 '살'과 '피', '노골'의 미학이다. 특수와 보편이 구별없이 혼재하는 감각(sense)의 제국. 그녀의 이미지는 감각을 먹고 산다. 아주 잘 기획된 감각. 이성적 감각. 전략적 감각. 객관화된 주관의 소름처럼 발기한 감각. ● 4. 좀더 돌아가자. 즉, 매체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 우회로는 아주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상당부분 전지윤 자신 역시 스스로를 상당부분 미디어 작가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매체란 무엇일까. 물론 이미지를 생산하는 모든 재료와 수단은 매체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매체적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매체는 본질이 되어 버린다. 매체는 더 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질이다. 회화의 나라에서 지존이 되어 버린 캔버스. 캔버스의 2차원적 평면성은 가히 회화의 패권을 장악했다. 신성화된 오브제가 되어버린 매체는 예술사에서 소위 모더니즘의 신화로 존재했다. 더 이상 매체의 덕목을 상실한 거룩한 성물. 물론, 매체의 덕목을 회복하기 위한 다른 방식들이 있었다. 그것이 소위 미디어 아트였다. 하지만 별거 아니었다.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것, TV였다. TV미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비디오아트였다. 백남준이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미의 제국. 다 집어 치우고 묻자. 매체미술은 매체의 신성화를 극복했을까? 글쎄. 그런 듯 보이지 않는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의 성전에서 「다다익선」이라는 성체를 조배할 때는 특히 더 그러하다. 여전히 본질이 되어 버린 매체. 모든 본질의 궁극은 신으로 귀결된다. 미술의 신이 되어 버린 매체. 이 신은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 서울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경주 문화 엑스포, KBS 홀과 같은 공간에서 현현하고 간증된다. 종교가 되어 버린 매체. 그것이 곧 매체미술이다. 그렇다면, 매체를 다루는 작가, 전지윤은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 5. 글쎄. 난 매체미술에 대해 부정적이다. 본질이 된 매체는 오브제가 된 캔버스와 다르지 않다. 전기로 구동된다고 달라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매체란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도구다. 도구는 기능을 수행한다. 물론 매체가 메시지라는 매루한의 말도 있다. 매체 자체가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역시 도구적 기능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도구에 내재된 의미의 지평을 강조하는 것. 결국 관건은 얼마나 매체 자체의 기능성을 활용하느냐에 있다. 난 소위 '싱글채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음을 가장한 없음. 있어 보이지만 까보면 아무 것도 없음. 싱글채널의 흔치않은 배신이다. 전지윤이 이 불신을 극복해 줄까? 물론, 결론은 유보적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가설은 가능하다. 적어도 그녀는 매체 자체를 물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 역시 디자이너의 덕목이 아닐까? 디자이너에게 매체란 수단일 뿐이다. 그런다고 전지윤이 매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매체의 물신화 없이도 속성을 부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부각된 기능.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 속에서 도드라지는 매체의 존재. 그것이 전지윤 작업의 매력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어떠한가? 전지윤이 매체를 도드라지게 부각하는 특성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딸깍거림이다. 딸깍거림. 무슨 의성어 같기도 하고. 그렇다. 마우스질이다. 마우스 버튼을 누를 때의 가촉적인 반응이다. 그녀의 매체는 컴퓨터다. 모든 컴퓨터에서 마우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일부러 키패드 노트북을 쓰거나 도스를 쓰는 경우는 물론 제외겠지만.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랴. 마우스는 컴퓨터의 귀요, 사용자의 입이다. 마우스를 통해 컴퓨터와 대화한다. 또 마우스와 컴퓨터를 통해 타자와 대화한다. 전지윤은 이 마우스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만든다. 매체가 만드는 이미지들이 마우스의 운동과 연동되기 때문이다. 마우스의 딸깍거림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들이 뜨고 변경된다. 이미지와 마우스질의 연동. 매체를 통한 작용과 반응. 그것을 '소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소박하지만 분명한 의미에서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를 마우스의 딸깍거림으로 변환한다는 건. 그것은 복잡한 프로그램에 의해 매개되는 과정이다. 당근, 전지윤은 매체와 매체의 구동에 정통하다는 말이다. 전지윤은 매체의 신비적 오브제화를 경계하면서, 매체의 작동과 시각적 의미화를 조율한다. ● 6.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전지윤이 매체와 이미지를 조율하는 방식들은 어떠한가? 거기서 파생되는 시각적 의미의 논리는 무엇일까? 부터 살펴보자. 최근작이다. 난 이 작품이 가장 끌린다. 뭐랄까. 이미지와 마우스의 매체의 기능을 이용한 이미지 함수랄까? 복잡한 작업과정을 기술하긴 어렵다. 다만 대략은 이렇다.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 이미지들이란, 할머니와 전지윤 자신이다. 이 두 이미지는 각각 전체지만 실상 분절된 이미지 셀들의 조합이다. 분절된 셀들이 하나의 조합으로서 할머니의 이미지를 이룬다. 전지윤의 것 역시 마찬가지. 할머니와 전지윤의 분절된 셀들은 화면의 같은 지점에서 교묘하게 중첩된다. 이 중첩된 부분 셀들은 마우스에 반응하며, 반대의 이미지로 뒤집힌다. 할머니의 것에서 전지윤의 것으로. 혹은 그 역으로. 모니터에서 마우스는 그야말로 쥐다. 쥐처럼 여기저기 뛰어 다닌다. 물론 이 쥐를 몰고 다니는 것은 화면 앞의 유저다. 쥐는 그것을 구동하는 관객의 행위를 대변한다. 이 쥐가 뛰고 날며 깔딱거릴 때마다 이미지 셀들은 뒤집힌다. 묘하게 섞이며 뒤집히는 이미지들. 물론, 전지윤은 젊고 할머니는 늙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젊고 늙음의 조합은 아니다. 할머니와 전지윤이라는 구체적인 두 극점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변이들. 그 다양함의 편차는 제한적이나마 정체성의 일반적 진폭을 만든다. 어쩌면 당신과 나의 정체성조차 가 만드는 이미지 조합의 가능성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전지윤이 세상 모든 정체성을 담고자 한 건 아니다. 두 극점 사이를 왕복하는 일반성 속에 전지윤의 타겟이 숨어있다. 즉, 두 개의 이미지 조합 어딘가에 감성적 평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평형이 호출하는 정체성은 누구일까? 여기서 전지윤의 이미지 함수는 이미지 방정식이 된다. 함수는 변수들 간의 일반적 관계다. 방정식이란 고정된 변수들의 관계이다. 즉, 전지윤의 이미지 함수는 특정인에겐 고정된 이미지의 解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미지 방정식의 解는 사람마다 가변적이다. 그래서 유희이다. 는 이미지의 유희다. 이미지 수수께끼이다. 그렇다면 전지윤의 이미지 방정식을 풀어보자. 그녀의 解는 무엇일까? 난 금새 풀었다. 바로 어머니. 할머니(1대)와 자신(3대)의 이미지 셀을 적절하게 조합함으로써 도출되는 2대, 곧 어머니이다. 사실 그리 어려운 풀이는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제공한 자료에 이미 이 작품명이 이라 적혀있었던 것이다. 해답을 노출시켜 버린 것. 그러나 이 노출이 단순히 멍청한 실수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이 이미지 방정식의 해답은 감성의 중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중점은 특히 전지윤에겐 자신(3대)와 할머니(1대), 그리고 그 가운데서 발견되는 2대(어머니) 사이에서 유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게 제공할 자료를 제작할 시점에서 만들어진 변수들의 조합에서 그녀는 '엄마'에 꽂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은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해답중 가장 어려운 풀이과정을 요하는 답이었던 셈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전지윤의 이미지 함수 가운데 나, 혹은 당신의 방정식을 풀어 보끄나. ● 7. 겉보기엔 ,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다르다면 얼굴 아닌 다른 부분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다른 부분들도 각각의 정체성을 갖는다. 얼굴 역시 그저 얼굴이 아니다. 얼굴은 나(혹은 너)다. 얼굴은 개별적인 구체적 인성이다. 좀더 들어가 보자. 얼굴 가운데서도 어디일까? 정체성의 근원 말이다. 눈이다. 내가 그녀의 이미지 방정식에서 어머니를 도출해 낸 것 역시 눈 때문이다. 어디선가 아주 얼핏 뵈었던 그녀의 어머니 눈을 호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 모티프는 전지윤이자, 할머니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또한 '눈'이다. 눈을 통한 이미지 정체성 찾기. 너무 우회했다. 그렇다면, 는? 물론, 여기에는 눈이 없다. 그래서 누군지도 모르겠다. 손만으로 누군지 모를 거란건 작가도 알았을 터. 자. 뭘 얘기하려는 걸까? 그저 중첩되는 이미지의 유희만을 얘기하자는 걸까? 그러기엔 전지윤이 너무 영리하다. 익명의 신체. 여기서 어떤 의미를 뽑아낼만큼 그녀를 파고드는데 실패했던 것도 한 이유다. 좀 피상적이나마 몇가지 가능성을 읽어보자. 첫째, 운동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이미지를 중첩하는 방식이다. 어차피 이미지의 조합은 하나의 집합만으로 통일될 수 없다. 이질적인 손들이 중첩되는 것. 이 이질적인 이미지의 중첩은 시각적 운동감을 표현할 수 있다. 단서는 제목 자체일 수 있다. 악수. 친애, 축하, 환영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손을 내밀어 서로 마주 잡음. 사전적 설명이다. 여기에 shake, 즉 '흔든다'는 동사적 의미가 중요하다. 신뢰의 정도를 물리적인 역동성으로 강화하려는 시도. 이 역동성을 표현하기에 이미지들의 중첩은 효과적인 표현방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편에선 이런 의심 역시 가능하다. 의미부여가 영 억지스럽다는 것이다. 그녀는 작가인 동시에 디자이너다. 디자이너의 눈은 있는 바 그대로의 상황의 본질을 꿰어 내는 쪽에 가깝다. 신파란 억지로 상황을 역행하려는 시도을 의미한다. 그런 신파의 표현문법은 대략 민중미술의 방식이었다. 민중미술은 이 신파의 방법을 저항, 혹은 전망의 전술로 사용했다. 전지윤의 전략은 민중미술과는 달라보인다. 그런 유비 차제가 신파스럽다. 두 번째 독해는 또 이렇다. 즉 어떤 본질적인 불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두 손의 이미지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있다. 하지만, 영원히 하나는 될 수 없다. 마우스질은 두 손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손과 손은 맞잡을 수 있는 걸까? 이건 곧 신뢰에 대한 의심일 수 있다. 과연 신뢰란 가능할까? 서구에서 악수의 기원은 결국 무기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렇다면, 악수란 신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심의 표현이다. 당신 혹 날 해치려는 것은 아냐? 아니라면 증명해 보라. 그런 의미인 것이다. 본질적인 불신이다. 이 불신이 단순히 손을 맞잡는다고 해소될까? 신뢰가 일치라면, 전지윤의 이미지 구동방식에서 이 일치는 영원히 성취되지 못한다. 동전처럼 붙어있으되 영원히 상반된 앞뒷면이기 때문이다. 셋째 독해는 다시 두 번째로 돌아간다. 즉, 신뢰의 부재는 곧 신뢰의 욕망일 수 있다. 부재는 곧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의 부재를 정확히 표현한다는 건, 바로 그만큼 그것을 절실히 욕망한다는 것이다. 글쎄. 이것 역시 신파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부재와 욕망의 상관성은 억지스런 역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의 두 손 역시 자신과 할머니의 것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전지윤은 할머니를 맞잡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럴수록 그러고 싶다. 말이 좀 되지 않는가? 이 작업을 처럼 이미지 방정식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 그렇다. 두 손을 포갰다고 어머니의 손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8. 일치의 부재와 일치의 욕망은 중요해 보인다. 는 와도 포개어지기 때문이다. hug.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즉, 꼭 껴안다. 그냥 껴안는 것이 아니다. "애정을 가지고" 껴안는 것이다. 껴안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악수가 불가능했다면, 껴안는 것 역시 그러하다. 두 개의 몸들이 전지윤과 할머니의 것이라면, 그녀는 할머니를 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는지 모른다. 두 육체의 포개짐. 포개어졌으나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그렇다면, 그 간극의 내용은 어떤 상황일까? 물론 이 간극은 전지윤의 감성적 층위에서만 확인되는 것들이다. 관계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분명 작업을 위해 할머니를 촬영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허그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 상황이 허락하는 가능성보다 훨씬 더 허그를 욕망하는 것이다. 물론, 감성적으로. 그것이 허그의 불능을 표현하는 방법론이 은유하는 바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의 육체로부터 미래의 자신, 자신의 몸을 본다는 말인데, 이건 좀 지나치게 자기애적인 발상일 수 있다. 물론, 현재 자신의 몸과 할머니의 몸의 분절된 이미지 셀 조합 어딘가에서 육체의 일반함수를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 9. 이미 누군가는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전지윤의 작업을 욕망의 코드로 읽어내려 한다는 걸 말이다. 이런 식이다. hug란 hug한다는 것도 아니고 hug 했다는 것도 아니다. hug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handshake 역시 마찬가지. 악수한다거나 했다거나가 아니라 하고 싶다는 것. 전지윤은 이미 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끌리는 자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원하는 게 많다는 것이다. 그 만큼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다. 그녀에게 예술 역시 그런 것이다. 즉 욕망은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는 본질 가운데 하나랄까?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 인간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행동한다. 끊임없는 결핍과 충족의 회로.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커다란 결핍과 거기에 상응하는 충족이 순환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욕망의 가장 욕망다운 형식은 무엇일까? 섹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전지윤 작업의 코드가 욕망이라 했는가? 그렇다면, 그녀가 이 문제를 우회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전지윤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불량아트전』(류병학기획, 듀플렉스, 2007)이었다. 젊은 작가의 당돌한 섹스표현. 너무나도 과감하게. 아주 노골적으로. 보수적인 나로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의문했다. 글쎄. 지금 이 순간에도 의문은 제거되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다음과 같은 가설만 가능하다. 즉 전지윤이 존재의 본질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새로울 것도 없지 않은가? 존재의 본질에 관한 수많은 관념적 논의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지윤이 좀 다르다면 존재의 문제를 좀더 노골적인 표현의 어법으로 묻고 있다는 점이랄까? 존재를 살과 피, 육체와 몸의 시각적 이미지로 묻고 있다는 것이다. 과 「터치-여」는 대표적인 예. 사실 난 이 작품들보다 좀더 야한 작품들이 더 좋다. 더 노골적이기 때문에. 좀더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이라면 남자의 자지 이미지와 마우스의 반응을 연동시킨 「터치-남」, 혹은 체위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들 수 있다. 욕망을 건드린다는 건 존재의 자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 10. 전지윤이 한 야시꾸리한 작품에 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뭘까? 제목만으로도, 전지윤의 일면이 드러난다. 용의주도하고, 함축적이다. 일종의 은유다. 그래서 시적이다. 거기 담긴 모든 것을 풀어낼 자신조차 없을 정도. 전지윤에 의하면, 'Kg'는 존재의 무게감을 의미한다. kg는 물리적 질량을 기술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이건 물론 은유적인 전략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지윤을 관통하는 존재의 감성적 무게감이다. '인터렉티브 게임'란 좀더 매체의 기능적 속성을 지칭한다. 다시 돌아가보자. 미디어. 매개체. 매개체는 그것이 매개할 대립항들 사이에 오는 어떤 것이다. 인터랙티브, 즉 상호작용적이란 매체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대립항들의 대화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액티비티(interactivity)를 강조한다는 건 미디어 작업으로서의 자기규정일 수 있다. 자기 작업을 누군가와 누군가들 사이에 놓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information의 전달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종의 유희(게임)의 형식으로 던지 놓겠다는 것이다. 전지윤이 설정한 게임은 어떤 것일까? 그건 '치매방지용'이란 문구에 함축되어 있다. 왜일까? 치매란 무엇일까? 그건 무서운 병이다. 일종의 망각이다. 존재에 대한 망각이다. 때로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의 망각이기도 하다. 치매는 자신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망각이기도 하다. 때로 자신이 낳은 혈육조차 못알아 볼 정도로. 치매는 삶의 흔적 자체를 말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삶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치매는 고립이며 고독이기도 하다. 거꾸로 고립되고 고독해서 걸리는 병이기도 하다. 고립과 고독은 아주 천천히 존재를 말살한다. 왜 일까? 전지윤이 그만큼 고독하다는 얘기? 아닌 듯 한데? 그녀가 벌써 존재의 삭제를 문제 삼을만큼 고립되고 고독했던 적이 있더란 말인가? 이런 의문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답이 있다 해도 프라이버시에 관한 영역이다. 본인이 답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이다. 중요한 건, 어떤 식의 상호작용, 즉 매체의 도구적 기능에 근거해 존재의 고립과 고독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탈출하거나 타인을 탈출시키거나.그래서 존재의 무게감 즉 감성적 질량 kg를 회복하거나 회복시키겠다는 것이다. 전지윤에게 미디어는 구원이다. 적어도 그녀에게 이 언명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언명에 선행한다. 머, 작업 내용은 그냥 그렇다. 눈 앞 한가득 여자의 몸이 주어진다. 이 몸엔 몇 개의 포인트가 주어진다. 그렇다. 성감대. 정확히 몇 개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낯뜨거워 몇 번 움직여 보지 못했다. 이 곳을 마우스로 자극하면, 화면 속의 여체는 깔삼한 신음소리를 낸다. '아오'. 화면 속 그녀와 섹스하고 싶은가? 그녀를 갖고 싶은가? 만지고 싶은가? 그럴 수 있다. 자. 마우스를 들기만 하면 된다. 욕망을 가져라. 그럼 된다. 그건 살아있음의 기표이자 기의이기도 하다. 「터치-여자」 역시 마찬가지. 흐드러지게 떠오른 여자의 육체. 이 작업 역시 분절된 셀들로 유포되어 있다. 이 셀들은 여체임이 분명하지만 뿌옇게 흐려있다. 그리고 이 쪽에 유저가 있다. 유저는 마우스를 움직인다. 딸깍거린다. 그 때마다 뿌연 육체는 보다 분명해 진다. 여체가 보고 싶은가? 그런 욕망이 있는가? 충족하고 싶은가? 그럼 살아있다는 것이다. 좀더 뜨겁게 살고 싶은가? 욕망을 확인하라. 그것을 충족하라. 노력하라. 당신의 삶을 살아있게 하라. 그것은 다음의 언명으로 변환된다. 마우스를 움직여라. 그것도 빨리. 머뭇거리지 마라. 존재를 망각할 시간여유를 주지마라. 그렇지 않으면, 여체는 또다시 뿌옇게 돌아갈 것이다. 여자를 벗겨라. 눈으로 그녀를 가져라. 다시 깨어나라. [혹은] 잠들지 말라. 11. 노골의 미학. 욕망의 미학. 존재의 시각적 확인. 재미있는 건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전지윤의 감성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 그녀의 눈을 통해 재해석된 세계가 펼쳐진다. 그녀의 작업은 세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세계의 외면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지윤의 내면이다. 외적 세계로부터 내면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러 좋은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해석된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석의 주체. 그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채식주의자. 그녀는 노골적인 채식주의자다. 물론, 이유가 있을 테지만, 역시 프라이버시일 뿐이다. 어쨋거나, 그녀는 고기를 먹지 못한다. 고기를 찍되, 이 고기로 전지윤이 말하려는 건 난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먹고 싶지 않음, 먹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정 대상으로 완전히 반대의 것을 성취하는 방식. 그리 새롭진 않지만, 너무나 노골적인 자신의 발언이다. 그 발언이 분명하게 살아있는 작업들. 고기. 온갖 구역과 질걱스러움과 악취와 징그러움의 기표로서의 고기. 전지윤이 보는 고기이다. 먹고 싶은가? 그렇다면 어지간히 비위가 좋은 것이다. ● 12. 전지윤의 미학을 현상태에서 요약하자면, 존재의 살과 피다. 등가의 단어들을 호출하자면, 육체, 몸, 욕망, 감각, 타자, 소통 등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보충할 수 있다. 이성, 정신, 절제, 계산, 자아, 고립 등이다. 그렇다. 상반되는 어휘 조합이다. 전자의 조합은 적극적인 이미지 생산의 원리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그것은 상반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미지 생산을 관리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바꿔보면 이렇다. 즉, 욕망의 이미지 생산은 역설적으로 가장 계산된 이성적 고려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욕망을 정확히 타겟팅(targeting)하기 위해 치밀하게 고려한다고 할까? 작가와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전자를 예술가 코드라 한다면, 후자를 디자이너 코드라 볼 수 있다. 전지윤의 덕목은 이 두 코드가 상극적 대립쌍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코드를 조율하고 평형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전지윤이 생산하는 이미지의 효과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어떤 것이다. ■ 김동일
핸폰, 미래의 미술관 ● 당 기자, 지난주 대구 MBC 방송국을 방문했다. 머시라? 어떤 방송에 출현했냐고요? 방송 출연때문이 아니라 방송국 내에 있는 대구MBC Gallery M에서 열리고 있는 전지윤 개인전을 방문하기 위해서 당 기자, MBC 방송국을 찾은 것이다. 뭬야? 실망했다고요? 어쩌면 대구 MBC 방송 중에 전지윤 개인전 풍경을 담은 뉴스에 기자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모라고요? 대구 MBC 방송국 기자랑 필자가 이너뷰를 했냐고요? 아니다. 혹 기자가 지나가는 관객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 말이다. ● 당 기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갤러리M 입구에 위치한 전시공간을 지나 사무실 공간으로 들어섰다. 갤러리M을 방문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갤러리M 사무실 옆에는 손님을 위해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다. 그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책 그리고 핸폰이 하나 놓여져 있다. 그건 여느 사무실 테이블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직업적 근성 때문인지 기자, 무엇보다 책에 시선을 던졌다. 오잉? 근데 책표지에 제목은 없고 연기가 나는 하늘 이미지만 인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한 나머지 페이쥐를 넘겨 보았다. 첫 페이쥐에 등장한 단어는 'FEAR'다. 공포(恐怖)? 흔히 공포는 괴로운 사태가 다가옴을 예기할 때나 혹은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때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반응을 뜻한다. 공포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 연기 나는 하늘 이미지와 'FEAR'라는 제목은 적어도 기자에게 몬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다가옴을 느끼게 만든다. 당 기자, 긴장된 맘으로 다음 페이쥐를 넘긴다. 마치 들어가는 말처럼 텍스트가 실려 있다.
근데 당신이 아무리 육백만불 싸나이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그 텍스트를 온전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읽히니? 거봐라. 읽기 졸라 힘들지? 그래서 당 기자, 열분들을 위해 그 텍스트를 친절하게 아래에 베껴 놓겠다. 고맙지? 데보라가 울면서 내게 말한다. 살기위해 빌딩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앞으로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저에게는 아직까지 그녀의 현실이 아닌 꿈이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후 오랫동안 나는 그들이 사라진 그곳에서 그들을 찾는 사람들만 남은 그 거리를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렇게 우리(School of Visual Arts : MFA Design)는 얼마간 허무감 속에 다음과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Confessions of Fear"나는 그 속에서 다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Fear"를 시작한다. 살기위해 빌딩에서 사람들이 데보라의 앞으로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혹 9.11 사태? 우리? 그럼 'FEAR' 책 작업은 전지윤의 개인 작업이 아니라 디자인과 학생들과의 공동작업이란 말인가? 궁금증이 또 다른 궁금증을 임신하게 되어 기자,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길거리 벽면에 사람을 찾는 벽보들이 붙여져 있고 화면 중앙쯤엔 영문 텍스트가 쓰여져 있다. 근데 그 영문 텍스트는 그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의 윤곽선을 따라 인쇄되어 있다. 머시라? 그 영문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고요? 혹 영어를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닌가? 조타! 친절한 기자, 열분들을 위해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 영문 텍스트를 번역해 보겠다. ● 2001년 9.11 이후 내가 늘 걸어 다니던 26가(east 26 street)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활력도 찾을 수 없으며 깊은 무게의 공기들로만 가득합니다. 빠르다고 하는 맨하탄의 리듬 또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걸음을 빨리 재촉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깊은 슬픔이 걸음을 잡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그들의 삶은 멈추어 버렸고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 안에 있습니다. 엄청난 파괴가 있은 후 맨하탄은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벽보가 되었습니다. 희생자를 찾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희망으로 온통 가득합니다. 저에게는 이 벽보들이 그저 벽보가 아닙니다. 희생자와 그들의 사람들과의 관계 그 사람들의 흔적들이 매순간 맘을 움직입니다. 2주가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벽보를 습관처럼 지나치고 있습니다. 벽보는 시간처럼 빗물에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사람들의 슬픔 또한 희석되고 희미해 질 것입니다. 그건 무엇인지 모를 남은 사람의 죄책감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 2001년 9.11 사태 당시 전지윤은 맨하탄 이스트26가에 살았던 것 같다. 위 텍스트는 당시 그녀가 26가 벽면에 붙어있는 벽보들을 보면서 9.11 테러에 관한 개인적 단상을 적은 것으로 읽힌다. 9.11 사태가 발생한 2주일 후 26가를 지나는 사람들은 습관처럼 벽보를 지나쳤던 것 같다. 따라서 전지윤은 시간이 지나 흩어지고 사라질 벽보들처럼 9.11 사태로 인해 실종된 사람들이 잊혀져갈 것을 생각하면서 남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마저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런 생각에서 'FEAR' 작업을 한 것이 아닐까? 근데 'FEAR' 프로젝트는 전지윤 개인이 아니라 '우리', 즉 공동작업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 전지윤 왈, "'FEAR' 작업은 'Confessions of Fear' 프로젝트에서 발췌한 저의 개인 작업이예요. 'Confessions of Fear' 프로젝트는 시각디자인(School of Visual Arts : MFA Design)대학원 학생들이 9.11의 두려움이라는 주제로 각자 페이지를 2페이지씩 만들었어요. 각자의 페이지에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를 담고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다른 학우가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해서 쓴 것이지요. 그러니까 당시 제가 작업한 내용들, 즉 제가 사진을 찍고 저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정리해서 쓴 글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저의 'FEAR' 작업입니다. 그리고 다른 학우처럼 저 또한 다른 사람의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이 데보라입니다." ● 데보라가 울면서 말했다. "살기위해 빌딩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앞으로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데보라의 진술은 당시 그녀가 9.11 사태를 직접 경험한 것으로 읽힌다. 당 기자, 이미 인터넷을 통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사진으로 본 것과 직접 경험한 것 사이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데보라에게 그 끔찍한 광경은 '공포' 자체였을 것이다.
다른 페이지에는 'CASEY CHO'라는 실종된 여자를 찾는 벽보 사진이 실려 있다. 그 벽보는 casey cho라는 여자의 키와 몸무게 그리고 그녀가 당시 94층 정도에 있는 것으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추정하는 정보와 연락처가 있으며,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We Love You)!!!'는 문구로 되어 있다. 근데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는 문구는 그녀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려준다. 혹 바로 그 점 때문에 전지윤은 그 벽보 이미지를 작업에 사용한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정작 중요한 전화번호 부분이 지워져 있는데, 그 역시 실종된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작가가 지운 것이 아닐까? 특히 작가가 의도적으로 개입시킨 붉은 톤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전지윤의 'FEAR' 어느 페이지 양면에는 마치 회화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길거리 풍경을 반사한 유리창에 붙여진 벽보들을 촬영한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언뜻 보면 그 양쪽 페이지에 실린 이미지들이 전혀 다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양쪽 이미지를 교차해서 본다면 그 둘의 이미지가 결코 다른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래픽으로 작업한 빨강과 노랑의 강렬한 왼쪽 이미지가 사실 오른쪽의 현실 이미지를 모델로 작업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전지윤은 시간이 지나 흩어지고 사라질 오른쪽 벽보들을 그래픽 작업을 통해 왼쪽 이미지로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 전지윤은 9.11 사태로 인해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아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당시 9.11 사태로 인해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포는 시간이 지나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그 공포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전지윤은 바로 그 공포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오류가 오류를 낳는다? ● 당 기자, 하마터면 공포에 휩싸일 뻔 했다. 전지윤의 일명 '아트북'을 덮고 갤러리M 사무실 테이블에 설치된 노트북에 눈길을 보냈다. 그 노트북 화면엔 'error'라는 단어가 떠있다. 궁금한 나머지 당 기자, 화면에 표시된 화살표를 꾸욱~ 헉! 이건 몬가? 경고창이 뜨는 것이 아닌가.
화면 전체에 뒤집힌 노랑 삼각형들이 등장하고, 그 역(逆)삼각형 안에 느낌표(!)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화면 중앙에 경고창이 뜬다. 괜히 기자가 컴을 잘못 만져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오해 살 것 같아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당 기자, 컴의 오류를 해결해 볼까 해서 시작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아닌지 소심하게도 두렵기까지 했다. 자, 침착하게 대책을 강구하자고 기자는 생각하면서 경고창의 내용을 읽어 본다. Do you want to force this to quit? 당신은 강제 종료하기를 원하십니까? 강제 종료? 종료면 종료지 무슨 '강제'종료까지 해야한단 말인가. 근데 별다른 대책을 마련할 방안이 없다면 그냥 강제 종료라도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오잉? 근데 이건 또 뭔가. You will lose any unsaved changes. 당신은 저장되지 않은 변화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기자가 강제 종료를 한다면, 어느 누가 작업한 것이 날라 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기자, 취소(Cancel)를 할 것인지 아니면 강제 종료(Force quit)를 할 것인지 일 분간 고민을 때렸다. 마우스를 강제 종료에 가져갔다가 곧 취소로 가져가 떨리는 검지로 살짝 클릭!
헉! 완존 난감!!! 에러 시그널과 함께 화면은 온통 붉은 바다가 되어 버렸다. 에러 소리가 복해서 나니 당황되기 시작했다. 경고창에는 열 받게 '원인불명 에러(Unknown error)'라고 알리면서 기자를 다시금 양자택일(Cancel/OK)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자가 버튼을 잘못 선택한다면, 그 누군가 작업했던 저장되지 않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 ● 당 기자, 그동안 인터넷을 나름대로 서핑했다고 자부하는데 경고창에 '원인불명 에러'라는 문구는 첨 본다. '원인불명 에러'라면 도대체 어케 하란 말인가? 흔히 윈도우 시작시 경고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뜬다. ● ...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름을 올바르게 입력했는지 확인하고 다시 시도하십시오. 파일을 검색하려면「시작」단추를 클릭한 다음「검색」을 클릭하십시오. -확인- ● 일단 위와 같은 경고창이 뜨면 기자, 무엇보다 바이러스 검사를 해본다. 근데 바이러스를 모조리 잡아도 경고창이 뜨는 경우도 있다. 당근 레지스트도 삭제한다. 혹 시작 프로그램 오류일까? 당 기자, '시작'을 누르고, '제어판'을 눌렀다. 제어판에서 Windows 방화벽을 더블클릭하고, 윈도우 방화벽 창이 열리면 창의 맨 위 부분 일반탭에서 아래 그림의 사용안함을 누르고, 창 아래 부분에 있는 확인을 눌렀다. 헉!!! 여전히 오류(error)가... ● 오류가 오류를 낳는다? 오잉? 그럼 오류가 오류가 아니란 말인가? 오류(誤謬)는 사고(思考)의 내용과 대상(對象)이 일치하지 않는 사유(思惟) 판단을 뜻한다. 그렇다면 전지윤의「오류(error)」는 에러가 아니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녀는 에러를 프로그램화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지윤은 관객이 경험할 오류를 제목(error)으로 미리 밝히고 있다. 그럼 필자가 전지윤의「오류」를 오류라고 생각한다면, 필자가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전지윤의「오류」는 애초에 오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럼 전지윤의「오류」는 진리(眞理)의 반대어(反對語)가 아닌 셈이다. 그쵸? 너도 눈이 있니? ● 당 기자,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m 갤러리 테이블 위에서 껌뻑이는 핸폰에 시선을 던졌다. 기자가 그 핸폰 액정을 보니, 사람의 눈이 깜빡이는 희미한 영상이 상영된다. 근데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영어 단어가 등장한다. 그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Do / U / Have / the / eye / ? 두 유 헤브 더 아이? 너 눈이 있니? 머시라? 필자가 넘 이해심이 많다고요? 글타! 핸폰 영상에 등장한 U를 필자는 you로 그리고 Have를 have로 머리 속에서 고쳐 읽었다. 따라서 핸폰 영상에 등장하는 문장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지윤이 잘못 표기한 것이란 말인가? ● 하지만 기자는 전지윤에게 '너도 눈이 있니?'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전지윤이 영어의 you를 U로 오자(誤字) 표기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녀가 의도적으로 오자 표기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혹 오자가 뻔한데 필자처럼 '친절하게도' 고쳐 읽기를 시도하는 관객에게 '너도 눈이 있니?'라고 빙정거리기 위해서...? ● 당 기자, 노트북의 '원인불명 에러'에서 기껏 한숨을 돌렸는가 했더니, 이번엔 '너도 눈이 있니?'라는 빙정거림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어디로 튈지 감이 잡히지 않는 전지윤은 관객에게 말걸기를 한다. 자칫 관객이 수동적으로 반응했다가는 전지윤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기자가 긴장을 놓을 수 있겠는가. ● 교묘하게도 전시윤은 전시장과 사무실 중간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 뻔뻔스럽게도 핸드폰과 책과 그리고 노트북을 전시(라기보다 연출)해 놓았다. 따라서 방심한 관객은 그것들을 전시된 작품이 아닌 일상 풍경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로 간주하고 지나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지윤은 관객에게 골탕 먹이기 위해 그와 같은 연출을 고려한 것일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생활 속에서 그녀의 작업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가? ● 글타! 전지윤의 작업은 바로 생활 안에서 시작한다. 미디어 아트의 진가는 일상 미디어 속에 스며들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일상 미디어 속에서 만난 전지윤의 작업은 '졸음'과 투쟁하는 필자에게 청량음료(淸凉飮料)다. ■ 류병학
'불량한 작가' 전지윤을 또 다른 시선에서 보기 ● 첫 만남 내가 작가 전지윤을 처음 만난 것은 '불량 아트전'에서이다. 나는 당시 '불량 아트전'을 보고 '숨은 불량 찾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도 불량스럽지 않은 전시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불량스럽지 않은 '불량 아트전'에서 내가 발견한 유일한 불량 작가는 전지윤이었다. 나는 지금도 듀플렉스의 층계에 작품이 아닌 듯 놓여진 모니터를 통해 본 그녀의 작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여러 조각의 픽셀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마우스로 터치해 볼 때 알 수 있는 신음소리 나는 엉덩이는 듀플렉스의 불량스럽지 않은 분위기와 잘 녹아들어가 숨겨진 불량 아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나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전지윤은 나에게 제대로 '불량 작가'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불량 작가로 부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이번 전시를 통해 불량이라는 어휘로 그녀를 잡아두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 전시되는 다양한 작품들은 '불량 작가' 전지윤을 또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전지윤에게 불량 작가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어휘들을 고민해 보게 되었다. ● 전체보기 현대 미술에서 소통을 다룬 작가들은 많이 존재한다. 이미 한국 미술계의 전설처럼 되어버린 백남준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들이 소통을 자기 작업 세계의 가장 중심적인 어휘로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많은 작품들 속에서 작품과의 소통을 통해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이야기하는 소통의 의미는 어느 정도 소극적인 측면에서 동의한다고 해도 소통의 결과물로서 작품 혹은 작가와 '대화'를 나눠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전지윤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소통을 넘어선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전지윤의 작품들 속에 소통은 하나의 어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지윤이 말하는 소통은 단순히 소극적인 참여의 맥락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녀가 다루는 미디어 아트의 형식적인 특성에 기인한다. 그녀의 미디어 아트는 다양한 픽셀 조각들을 통한 오버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우스를 통해 작품에 참여 했을 때 즉 관객의 마우스 클릭에 의해서만이 안의 내용을 알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런 면은 단순히 미디어를 통해 대상을 보여주는 형식의 미디어 아트들과는 큰 차이를 띠고 있다. 백남준의 '참여 tv'처럼 단순한 움직임이 고정된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의 작은 움직임이 화면에 보여지는 결과물에 큰 차이를 띠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차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전지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라는 기술적인 측면과 그녀가 주로 다루는 소재들이라는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안으로 들어가기 전지윤의 작품을 보았을 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 신음 소리 나는 엉덩이나「치매방지용」은「패턴 작품」과 같은 것을 보았을 때 쉽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단순히 성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은 그녀의 작품에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보다는 '몸'이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I'm Vegetarian'과 같은 작품에서 비록 부분적으로는 material을 성적인 메타포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기의 찟김을 통해 우리에게 성적인 느낌보다는 material의 육감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즉 묶여진 고기와 같은 material의 물성으로 우리는 육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육감적인 느낌은 하나의 몸에 담김 기억 다시 말해 육화된 기억으로 다가온다. 즉 누구나 몸을 통해 기억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성의 영역을 통해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성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기억이 시간성을 전제하는 판단과 선택의 측면이라면 육화된 기억은 본능과 시간성이 고려되지 않는 직접적인 반응의 영역에 해당한다. 성(性)은 이런 육화된 기억 중 하나이다. 따라서 고기를 통해 표현된 성적인 느낌들은 우리 몸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영역들 중 하나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grandma」와 「handshake」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많은 육화된 기억을 담고 있는 부분은 누가 뭐래도 얼굴일 것이다. 즉 얼굴을 제외한 부분은 일단 촉각적인 감각에 의존한다면 얼굴은 공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내 얼굴과 할머니의 얼굴을 오버랩하고 있는 grandma는 서로 간의 얼굴에 담긴 작가 기억의 교차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오버랩이 가져다주는 모습은 또 다른 내 안의 기억과 만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handshake」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손은 가장 많은 '만짐'의 행위를 수행하는 곳이기에 촉각적으로 육화된 기억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즉 외할머니와 나의 얼굴을 서로 겹쳐 놓은「gradnma」와 서로의 손을 겹쳐 놓은「handshake」는 이런 맥락에서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전지윤은 단순히 성을 다루는 '불량' 작가는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은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많은 행위 그리고 기억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비로소 그녀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앞서 계속 이야기한 육화된 기억과 경험이다. 즉 채식주의자로서 작가 본인의 경험이 몸에 체화된 기억으로, 그리고 어린 시절 가족들 간의 관계 안에서 외할머니와 나의 얼굴의 오버랩을 통해 표현하는 서로간의 닮음의 기억과 같은 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억, 특히 전지윤 작가의 몸에 베인 기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밖에서 살펴보기 - 미디어 아트 이런 육화된 기억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지윤은 미디어 아트를 선택했다. 특히 그녀의 미디어 아트는 앞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모니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통해 스크린을 터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관객들에게 육체적으로 단순히 관망하는 것을 넘어서 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고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 아트는 기본적으로 관객들의 수고에 의해 비로소 작품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장의 서로 다른 사진들을 픽셀 형식으로 나누어 겹쳐 놓고 터치에 의해 보여주는 기법은 관객들의 단순한 참여의 수고로움을 한 차원 올려놓는 역할을 한다. 즉 각각의 사진들은 서로 다른 기호로서 존재하고 이런 기호들의 의미는 마우스의 터치를 통해서 또 다른 기호로 재 기호화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각각의 사진들을 자동적으로 오버랩이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면 사진들 각각의 의미보다는 하나로 뭉쳐지는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전지윤의 작품은 자동적으로 오버랩 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마우스 터치에 의해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오버랩 되기 때문에 이전의 의미 역시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고 터치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 또 다른 기호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터치하는 순간이 바로 관객에게는 또 다른 기호를 창조하는 과정이고 이런 과정에서 단일하게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기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조합하는 과정'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서 참여는 단순히 '있다' 혹은 '참여 했다'를 넘어서 또 다른 기호를 '생산했다.'는 수준의 적극적인 의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지윤 작품의 완성본은 꾸준하게 기호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호의 의미화인 것이다. 이런 기법적인 맥락은 육화된 기억으로서 몸을 소재로 하는 전지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즉 그녀가 성(性)을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체를 통해 에로스로 만들어진 픽셀들의 그물망의 체계를 가지고 노는 것이지 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성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혹은 생산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바로 나와 대화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작가의 개인적인 몸에 베인 기억들이 과연 나와 얼마나 소통할 수 있을까? 혹은 나와 대화가 가능할까? 이런 반론의 맥락에서 그녀는 사회적인 사건을 다루는 방식 역시 사뭇 개인적인 방법을 활용한 듯 보인다. 즉 9.11의 아픔을 다룬 작품 역시 그녀가 그 현장에서 녹음한 기록들에 바탕한 것이고 자신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반론은 과연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이다. 비록 전지윤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6하 원칙에 의해 자세하고 정확하게 사회적 사건의 전모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 작가가 개인으로서 서 있는 위치에서만 들리고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청각을 택했다. 이는 마치 현장에 없던 우리에게 작가 자신의 귀를 빌려주어 대리적으로 사건을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미시적인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사건의 전모와 소통할 수는 없지만 사건이 위치한 특정한 지점과는 가식 없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이전에 다큐멘터리적인 역사 담론이 추구하던 거대 담론적인 소통보다 더욱 진실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새로운 어휘 찾기 그렇다면 나는 전지윤을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할까? 여전히 불량스럽지만 그래도 대화할 수 있는 작가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몸이라는 소재는 혹자에 의해서는 사뭇 불량스럽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불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전지윤과 작품을 통한 대화를 했기 때문이니까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아니라면? 이런 질문에 전지윤 작가와 나는 동일한 대답을 내릴 것이다. "뭐 그건 어쩔 수 없구요.^^" ● 전시장에서-「draw it」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이런 제목을 붙여 보았다. '마실' 예전 시골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웃 집에 놀러 다니는 것을 마실 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 어휘의 어감만큼이나 마실은 쉽고 편안하다. 전지윤의 이번 전시장의 앞에는 바로 이 작품이 서있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의 얼굴을 오버랩 해놓은 것이다. 즉 앞서 이야기 했듯이 얼굴은 우리 신체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담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얼굴을 보고, 또 마우스로 얼굴을 만지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서로 간의 벽을 낮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아주 친한 사이에서야만이 서로 얼굴을 만져주듯 작가와 내가 작품을 통해 그런 가상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시장의 입구에 놓인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작가의 집으로 마실을 오도록 초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의 얼굴은 다른 자화상을 전시하는 작가들과는 큰 차이를 띠고 있다. 즉 기존의 자화상들은 작가의 얼굴 혹은 그것을 대리할 수 있는 다른 얼굴을 전면에 내세워 소통보다는 보여주기 혹은 과시의 맥락이 강하다면 그래서 마실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면 픽셀들로 이루어지고 마우스 터치를 통해 과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자화상은 자신을 숨기면서도 또한 은밀하게 보여주기에 기존의 자화상과는 다른 맥락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draw it은 우리에게 전지윤의 집으로 놀러오라고 충분하게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 -「겨울동」,「speak out」,「Listen and repeat」 이 세 작품들은 사운드 작품이다. 과연 전지윤의 이전 작품들과 사운드 작품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바로 기억에서 찾았다. 우리 사회는 무문자 사회가 오랜 기간 지속되었기에 원래 기억은 글자보다 소리에 기인했다고 한다. 특히 다양한 기억들은 눈을 통해서 보다는 소리를 통해서 몸에 더욱 각인된다. 우리가 특정한 소리에 머리의 판단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소리 작품들은 작가의 다양한 관점을 소리를 통해 육화된 기억으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윤인선
Vol.20070915g | 전지윤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