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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126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시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벌거벗은 생명의 대하드라마 ● 진민욱의 전시에는 가로가 5미터에서 8미터에 이르는 대작들이 나오지만, 그보다 작은 작품들도 그 경계 너머로 확장가능성이 있다. 대작은 각자 단독으로도 서있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작품들이 분석적이라면 큰 작품은 종합적이다. 특히 대하드라마처럼 흘러가는 대작은 많음과 하나를 자연스럽게 일치시킨다. 부분들은 현실에서 길어온 요소들이지만, 그것이 조합된 결과는 환상적이다. 작가는 작업의 원칙으로, '최소한 한번 이상은 스쳐지나간 일상적 소재'를 다루며, 그것이 갖는 '첫 인상과 기억에 집중한다'고 밝힌다. 뱀의 자연색이라 할 수 없는 한 가지 색조로 조율된 화면은 그것이 지각된 현실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기억된 것이다. 지각이라는 공간적/현재적 범주는 기억이라는 시간적/지속적 범주로 전이된다. '기억의 풍경'이라는 부제의 전시는, '기억'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이질적인 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넉넉한 자리가 되었다. ● 어떤 특정한 기억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이루는 요소들이 마치 입자처럼 이합집산하면서 지나간, 또는 지나가고 있는 현재를 풍경화 한다. 이번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가로가 5미터가 넘는 대작 「꿈과 현실의 경계」는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뱀들이 구물거린다. 엉켜 꿈틀대는 흐름 속에 서사의 흐름 또한 내재되어 있다. 뱀 자체가 하나의 흐름이라면 뱀의 무리들 역시 흐름을 보여주는 면모가 마치 유기체로 가시화된 프랙털 도형을 보는 듯하다. 화면 왼쪽부터 뱀들은 여러 형태들로 구비치고 있으며, 끝부분으로 갈수록 서서히 사그라지는 형세다. 화면 아래는 상대적으로 비어있어 위에 밀집된 뱀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올 것 같은 잠재적 동세가 있다. 크고 작은 뱀. 무엇보다도 많은 뱀들은 그 자체로 정지된 화면에 동감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차이를 가지는 반복은 변형 또는 지속의 느낌을 준다. ● 비슷한 형태의 반복을 통해 동감을 주는 방식은 애완동물 놀이용 공으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를 화면 가득히 그린 작품 「滿開」에서도 발견된다. 공은 다른 작품에서 동물무리와 어우러지면서 추상적 움직임을 나타낸다. 뱀의 생태와 상태를 맥락화 하는 다른 동물과 식물이 함께 하면서, 이 비현실적 광경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다. 죽은 사슴, 뱀을 위협하는 딱따구리, 사마귀, 쥐 등, 뱀과 상호작용하는 조연들은 떼거리들이 연출하는 생/사의 대하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무려 5개의 패널을 연결시킨 스펙터클한 작품 「작은 소동」은 개들로 이루어진 산수풍경이라 할만하다. 개는 뱀보다는 더 친숙한 동물이지만, 무리지어 형성된 풍경은 낯설다. 진민욱의 작품은 약간 이상할 뿐 굉장히 특이한 사실을 강조하거나 폭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정상과 이상(異狀)을 가르는 가는 경계선을 위반하는 작은 흐름들이 있을 뿐이다.
개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원은 놀이용 작은 공으로, 어디선가 흩뿌려진 공을 향해 이런저런 동작을 취하는 개처럼 연출돼있다. 더 강하고 크고 건강한 개와 그렇지 못한 개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은 소동」은 다양한 개들의 다양한 동세를 자연스럽게 조합하는 방식이며, 이 또한 뱀 그림처럼 어떤 흐름이 있다. 오른쪽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개의 무리들은 말 그대로 풍경의 입자가 된다. 카메라는 줌 아웃 되고,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놓인 봉긋한 더미들은 해체와 배발생(embryogenesis)이 동시에 연상되는 잠재적 상태로 회귀한다. 그 옆에는 개의 무리들을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이 걸려 있어, 작품 속에 있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작품 간에도 반복된다. 정사각형의 패널 두 개를 위아래로 붙인 「작은 소동」은 3주 정도 된 눈도 안 뜬 강아지들로만 채워졌다. 대여섯 종 정도 되는 강아지들은 멀리서보면 얼룩덜룩한 무늬 같다. ● 시선이 관통할 수 있는 거리를 상실한 표면들은 촉각적이며, 위 화면의 밀도가 높아서 뱀 그림처럼 쏟아져 내릴 듯하다. 시각보다는 촉각과 후각으로 정보를 감지하여 치대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강아지들은 비슷한 크기와 형태가 하나의 단위, 요컨대 분열중인 세포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개체 이전의 단계이자 개체 이후의 단계이다. 거기에는 힘찬 생명력보다는 대량사육, 때때로 벌어지는 대량 살 처분되는 벌거벗은 생명들의 취약함이 두드러진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들이다. 크고 당당한 어미 등에 업혀 잠든 강아지가 있는 작품 「경계」는 그 완전한 조합이 야기하는 든든함이 있다. 개들이 도시에 배치된 작품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개개의 도상은 현실에서 왔지만, 머릿속에서 조합된 풍경이라는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화면 구성 요소들 간의 스케일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이때 개들은 도시라는 또 하나의 생태계 속에 잠재적으로 구물거리는 무의식적 흐름을 예시한다. 둘 이상의 패널이 모인 큰 작품들에는 시선을 모아주는 장치들이 있지만, 단독으로 걸린 작은 작품들의 경우에 조합의 이질성은 강하다. 도시 같은 인공생태계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비둘기, 참새 같은 친숙한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건물이나 여러 소품들 간의 스케일의 차이가 현격하다. 왜 그것들이 한 화면에 있는지 모호한 수수께끼 같은 풍경이다. 큰 작품과 달리 하나의 화면에 응축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균열은 크다.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비약과 도약은 '기억의 풍경'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작품 「기억의 풍경」을 보면 건물과 참새 뿐 아니라, 모여 있는 건물들 간의 비례와 원근이 맞지 않는다. 또 다른 「기억의 풍경」에서 난데없이 등장하는 사다리들은 작품의 공간이 실내인지 실외인지도 모호하게 한다. 눈 또는 카메라로 수집된 기억의 저장고 안에 차곡차곡 쟁여진 자료들은 화면 안에서 생경하게 만난다. 마치 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비단에 석채로 그려진 그림들의 바탕 면은 마치 깨끗하지 않은 걸레로 닦은 유리창처럼 흔적을 남긴다. 진민욱의 작품은 비단에 분말 안료(석채, 분채)를 주재료로 삼는데, 이 작업의 특징은 비단의 반투명한 성질을 이용하여 비단 화면의 뒷면에 색을 수차례 쌓아올려 물감 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의 과정처럼 켜켜이 쌓이지만, 배접으로 종이에 압착시킨 후 정면에서 보는 화면은 그 모든 과정들이 한데 뭉뚱그려진 것이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미묘한 부피감과 견고함'을 만들지만, 층층이 쌓여있는 시공간들은 언제고 풀려나올 기회를 노린다. 10번 이상 시행하는 바탕 작업처럼, 이미지를 올리는 작업도 중층적이며 층과 층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흐릿해진 기억을 선명하게 하려는 듯 닦아 보지만, 기억은 투명하지 않으며, 애초의 지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각은 기억에 물들어있고 기억이 촉발되는 계기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부조리나 무의미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 가령 동물과 건물의 조합은 현대가 직면한 생태계를 암시하며, 이 생태계가 자연스러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겉보기의 질서 아래 꿈틀거리는 도시의 욕망은 통상적인 의미의 인간적 기준을 초과하거나 그것에 못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작가는 '작업은 구상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이 아닌 현상의 외피에 가려진 추상적인 흐름, 어떤 에너지에 가깝다'고 말한다. 동물은 이러한 흐름을 표현하기에 적절해 보인다. 동물은 통상적으로 개체가 아닌 무리로 보여 지며, 그들의 행동은 의식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인간보다는 거시적인 범주이며, 개체이면서도 입자처럼 보이는 진민욱의 생명체들은 생물적 욕구, 심리적 요구, 사회적 욕망 등을 아우르는 미세한 범주이기도 하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뱀, 개, 새 등은 매우 희귀하거나 특이한 동물은 아니며 인간과 매우 친숙하다. 그렇지만 자연으로부터 나름의 자율성을 간취한 인간은 동물과 거리를 두었고, 동물은 무의식의 층위로 숨어들었다. 동● 물의 떼는 이러한 무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낯설고 이질적인 무의식은 익숙하고 일상적인 의식의 이면이며, 그것은 전체가 하나가 되어 연동되면서 뫼비우스 띠처럼 출렁인다. 진민욱의 동물-풍경은 인간에게 분명히 내재해 있지만 낯선 충동을 바깥으로 끌어낸다. 거기에는 순화된 것으로 여겨진 거칠고 난폭하고 잔인한 면모가 과장 없이 드러난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도 아니고, 다만 잊혀져 있던 야생적 본능의 발굴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단지 그러함이다. 무리를 짓는 인간 가령 현대의 대중이 개체이전의 단계로 퇴행하는 모습, 또는 개체의 한계를 넘는 집단지능을 보여줌을 생각할 때, 진민욱의 비유적 그림은 머나먼, 또는 깊숙한 원초적 단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동물은 인간이 아니라는 식의 반(反)모델이 아니라, 양자가 공통적으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그 둘은 모두 어떤 힘(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벌거벗은 생명들인 것이다.
동물성과 분리 불가능한 인간성은 동시에, 동질성을 이루는 이질성을 말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전의 작품, 가령 머리가 여럿 달린 개 등의 이미지에서 확연하다. 다양한 종이 한 몸뚱이에 있는, 경계가 소멸된 존재인 괴물은 이 전시에서 여러 종이 아니라, 시간차를 두는 한 종의 다양한 면모를 한 화면에 뭉뚱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간적 지속성 가운데서 포획된 진민욱의 그림 속 생명체들은 공간적 혼종인 괴물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혼동 역시 괴물스러운 면이 있다. 괴물은 오래된 것이며 시대에 맞게 변모되며 출현한다. 괴물, 또는 괴물적인 것은 육체 뿐 아니라 정신도 포함한다. 가령 고대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괴물의 탄생은 사랑과 증오라는 근본적인 두 힘의 교대와 순환이다. 세계 탄생 이전은 증오의 상태인데, 증오심에 불타는 몸체 없는 사지들이 분리된 채 결합되기를 바라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우연히 만나는 대로 사지들이 조립되며 불확실한 형태들이 생겨나곤 했다.'고 묘사한 바 있다. ● 현대의 화가 또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켜 사물을 그 겉모습에서 떼어내고, 그 해체 속에서 새로운 겉모습을 구성하는 일이다'(프란시스 베이컨)고 말한다. 진민욱의 작품에서 이것과 저것이 섞여 있는 원초적 혼돈으로서의 괴물은 이 시기와 저 시기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으로 변화했다. 이전의 괴물처럼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상한 면은 남아있다. 가령 뱀은 변태하는 종으로 그자체가 괴물적인 면이 있다. 괴물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존재나 상태를 말한다. 진민욱의 작품에서 그것은 군체로 나타나며, 군체의 잠재적, 현실적 움직임은 그자체가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과 겹쳐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구조에서 형상으로, 형상에서 구조로의 변모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때로 죽음과도 구별될 수 없는 변모는 단순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숙명적으로 고정된 존재와 상태를 초월하고 탈주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 진민욱의 작품에서 변모를 통한 탈주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다. 무리의 방식을 취하는 그것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것처럼, 전염에 의해 형성괴고 발전하며 변형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치들은 기억에 대립되는 망각, 역사에 대립되는 지리, 사본에 대립되는 지도, 나무에 대립되는 리좀을 형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경은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중국의 문인화처럼 모방적이지도 않고 구조적이지도 않으며 우주적이다. 이러한 그림은 세계를 재현하는 업무에서 빠져나와 돌연변이 같은 추상적 선을 만들고, 기원적 모델의 모방을 모델 없는 최초의 미메시스로 대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민욱의 '기억의 풍경'은 동시에 반(反)기억의 풍경이다. 망각이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재발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것'(들뢰즈와 가타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크고 작은 작품에서 의외의 마주침을 작가가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 이선영
현실의 관계망 속에서 본인의 경험과 기억의 일부를 추려내어 자연물 특히 동물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의 일부를 보여주고자 함인데 작업은 구상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이 아닌 현상의 외피에 가려진 추상적인 흐름, 어떤 에너지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 추상적인 대상을 특정 이론의 지식을 빌려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일상 속 체험을 통해 존재를 마주하고 있어 아직도 이 존재의 성격은 나에게도 상당히 모호하다. 일상에서 이것은 항상 변화하며 이 가치를 조우하는 순간에는 규칙이 없다. 본래 형체가 없는 이것은 일상에서 대상과 다른 대상이, 상황과 다른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난다. 실제 외피의 성격을 입고 있는 그것은 본성은 무에 가깝다. 굳이 빗대어 말하자면 『노자』에서 말하는 실재, 소리, 형체가 없고 명사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에 깃들여 있는 도(道)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리 모호한 존재일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특별한 가치는 분명히 존재하며 때때로 마주치는 경험은 특별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삶의 문제를 반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때 특별한 가치가 생기는 이치를 나에게 환기시킨 것은 조그만 조각상이었다. 이 조각상은 높이 8c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상아조각상으로 어머니가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나이일 때 어느 시장에서 산 장식품이다.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찬장의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하다가 내 작업실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문득 이 작은 조각상의 정체가 궁금하여 책을 뒤져보다 작은 조각상이 감춘 의미를 마주했을 때의 특별함이라니! 놀이터를 장악하고 있는 공들은 원래 100개가 들어있는 한 통에 오천원에 하는 싸구려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탄력성를 갖는 이유만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동물들의 눈, 삼만원에 구입한 해골모형은 의대생들에게는 두개골의 정보를 제공하지만 나에겐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자고 끝없이 일깨운다. 이와 같이 일상 속 물(物) 외피에 숨겨져 있는 가치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화면에서 내가 묘사한 풍경은 이 같은 가치의 집적이다. 나는 삶 속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방법과 같은 원리로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의식의 잣대를 대기 전 무작위로 사진을 찍고, 관심가는 사물을 두고 두고두고 의미를 고민한다. 그렇게 수집한 대상물과 막 촬영한 사진 속 풍경을 구성하는 나무, 산, 건물 등을 하나의 단위로 쪼개어 화면을 언젠가의 기억과 느낌에 집중하며 재구성한다. 건물 뒤에 숨겨진 단풍나무도, 이상하게 서로에게 입을 벌리며 서로에게 덤벼드는 강아지들도. 평소에 일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한 이 대상들을 나는 다시 시점과 원근과 비례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가치척도에 따라 재분류시켜 때론 과장하거 나 생략, 제거하면서 재배열한다. 에스키스→스케치→초뜨기(선뜨기)→채색→배접 후 수정의 작업과정에서 처음의 에스키스의 이미지가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재구성한 풍경은 현실 어딘가의 풍경이지만 결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 고유 세계의 일부이다.
나는 이 고유세계 속에서 때때로 발생하는 기억의 왜곡, 때때로 발생하는 현실과 상상 속의 혼돈과 그 미묘한 즐거움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내 작업을 마주한 당신과 소리없는 수수께끼놀이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 진민욱
Vol.20141126j | 진민욱展 / JINMINWOOK / 晉民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