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덩어리 Wind Mass

김세일展 / KIMSEIL / 金世鎰 / sculpture   2014_0905 ▶ 2014_0916

김세일_바람덩이1410_석분점토_135×30×30cm×2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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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905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공휴일_10:00am~06:00pm

혜화아트센터 HYEHW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56(혜화동 90-7번지) Tel. +82.2.747.6943 www.hyehwaart.com

바람을 만지다. ● 보는 것과 아는 것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양자의 관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비평가 존 버거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보는 것(시각)과 아는 것(지식)은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구 지성사와 예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각과 시각성의 영역에서 지식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각과 지식이 각각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존 버거가 시사하고 있듯이, 시각에 따른 경험과 지식을 통한 경험은 일치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과 비가 내리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아는 것은 서로 다른 경험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시각이 지나치게 지식에 의해 통제되거나 지배되는 경우, 시각 본래의 고유한 감각이 상실되고 관념화된 지식으로 환원될 수가 있다. 조각가 김세일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즉 추상화되고 관념적으로 환원된 시각성이 본래 지녔던 감각을 조형적으로 회복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 조각가가 어떻게 시각성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조형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해서 김세일이 주목한 것은 바로 조각의 촉각적 요소이다. 촉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감각이다. 저명한 예술비평가인 허버트 리드는 "조각은 촉각의 예술이다. 작품을 만지고 조작함으로써 만족을 느끼게 하는 예술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세일의 작업에 나타난 촉각은 이러한 조각의 특징적인 촉각성과 밀접히 연관되면서도 동시에 나아가 시각과 시각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그의 작업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시각적 촉각성"에 상응한다. 이러한 시각적 촉각성을 작품 전체에서도 읽어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 즉 석분점토로 만든 작품들에서 뚜렷하게 감지된다.

김세일_바람덩이149_솜, 석고_190×60×50cm_2014

김세일은 떠오르는 이미지나 생각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형상화하는데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조각가이다. 이는 미묘한 감성을 자아내는, 거칠면서도 섬세한 촉감으로 이루어진 석분점토 조각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자연적이며 유기적인 형태를 지닌 작품들은 마치 밀가루로 수제비를 뜰 때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표면과 같은 조형적 면을 가진 단편들이 결합되고 형성된 것이다. 작가의 손길과 촉각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작품들은 껍질의 형태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부정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얼굴 그리고 여기에 이어진 몸통의 형태로 벽에 걸려있는 인체조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껍질의 형태를 갖고 있긴 하지만, 단순히 껍질 그 자체의 조형성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 여기서 껍질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촉각이 만들어내고 있는 조형적 매스와 구조이며, 이에 따른 시각성이다. 김세일의 조각에서 촉각은 단지 오브제에서 감지되는 물리적인 촉각을 넘어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촉각이다. 실상 껍질처럼 부서지기 쉬운 형태이기에 그의 조각을 만지거나 더듬어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촉각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나아가 촉각을 통해 환기되는 조형성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 "시각적 촉각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촉각적 시각성"을 구현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시각적 촉각성은 이미지에서 촉각적 요소를 그리고 촉각적 시각성은 촉각에서 이미지 요소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김세일의 작업은 촉각적 시각성을 통해 시각과 시각성에 내재한 관념성을 비판적으로 반성해보려는 한 시도인 것이다.

김세일_바람덩이142,144_솜, 석고_187×100×40cm_2014

김세일의 조각에 나타난 촉각적 시각성은 매스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다. 촉각과 매스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김세일의 촉각이 허버트 리드가 "조각은 촉각의 예술이다"라고 할 때의 촉각과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듯이, 여기서 매스 또한 단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조형적 요소로서의 덩어리에 상응하는 매스가 아니다. 이전의 작업에서도 촉각과 관계하는 매스의 문제가 탐구되고 있지만, 이는 특히 이번 전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매스는 라틴어 마사(massa)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사는 찰흙이나 반죽을 촉각적으로 치대어 함께 붙어있도록 한 덩어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어원적으로도 촉각과 매스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스는 인간의 욕망, 특히 소유 욕망과 관련된 개념이다. 흙이나 밀가루를 나의 손 안에 넣기 위해서는 그것을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란 쇼펜하우어가 "익시온의 회전하는 수레바퀴 위에 실려 있는 것과 같으며, 다나이스 자매가 밑 빠진 독에 끝없이 물을 퍼붓는 것과 같으며, 영원히 애태우는 탄탈로스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매스를 향한 욕망은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이다. 작가가 이러한 생각에서 이번 전시를 "바람 덩어리"라고 불렀을까? 그의 조각에서 매스는 욕망에 대한 조형적 메타포이다. 그리고 매스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기에 그의 조각이 인체로 귀결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세일_바람덩이1414_솜, 석고_200×50×45cm_2014

바닥에 놓여진 3미터에 이르는 한 쌍의 인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체, 거꾸로 매달린 한 쌍의 인체, 벽에 걸린 인체조각 등은 알루미늄 선에 석고물을 묻힌 솜을 감아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이전의「불가촉」연작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 즉 마치 남자와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한 쌍의 인체조각은 김세일 조각의 촉각과 매스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사람의 욕망은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표현된다. 이는 인체조각에서 매스란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무게를 지닌 덩어리이면서도 동시에 바람처럼 자유롭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여기서 김세일의 매스는 자코메티의 매스와 맞닿아 있다. 자코메티는 미술비평가인 앤서니 데이비드와 나눈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오후에 대영박물관에서 그리스 인체조각들을 보았지만, 거대한 돌 그러니까 죽은 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이 어떠한 두께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의 투명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은 매우 가볍다. 당신은 매스의 무게가 거짓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록 매우 뚱뚱하다할지라도, 그 자신을 매우 가볍게 유지한다."

김세일_가오싱젠, 뒤샹, 자코메티, 라엘_석분점토_135×300×20cm_2014

김세일의 인체조각에 나타난 촉각적 시각성과 매스의 미학은 단지 조형적 측면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인간의 촉각 그리고 매스는 결국 존재론적 함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은 세련된 감각이나 형식적인 논리적 조형성이 아니라 오히려 미완성의 조형성을 향해 있다. 달리 말해, 인위적 형태, 작위적 관념, 형식적 논리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결핍된 상태를 수긍하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적 규정에 따른 결론이 아니라 과정의 조형성을 모색한다. 김세일은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무모할 정도로 치열하고 지속적으로 던지면서 과정의 미학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조각가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한 작품, 즉 알루미늄 망에 석고물을 덧입히고 삼각형의 면으로 형상화된 인체조각의 예를 보더라도 초기의 목조 인체작업에서 유리 테이프 인체작업을 거쳐 이루어진 과정의 한 조형적 매듭일 뿐 최종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그의 인체조각에 나타난 촉각과 매스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김세일_자코메티_석분점토_130×17×15cm_2014_부분

인체는 가장 오래된 조각의 소재이자 주제이며 영감의 원천이다. 인체는 무엇보다 조각을 통해 경험된다. 그러기에 인체를 조각하는 작업은 몸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김세일의 조각은 이렇듯 단순히 인체를 조형적 기법으로 재구성하고 표현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인체조각의 촉각과 매스를 통해 감각 본래의 생명감을 돌아보는 한 조형적 시도이다. 물론 이를 두고 그의 조각이 철학적이거나 개념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단지 조형적 감각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성급하게 단정하거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촉각을 통해 시각의 관념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매스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인 상황을 드러낼 수 있는 조형적 가능성을 과정의 미학으로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세일의 조각은 역설적으로 개념적이고 철학적이다. ■ 임성훈

Vol.20140907f | 김세일展 / KIMSEIL / 金世鎰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