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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1_수요일_05:00pm
선 아트센터ㆍ선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Tel. 02_734_5839
시간과 공간의 그물 짜기, 열려진 관계의 의미체계로... : 김세일의 철선작업에 대하여 ● 1. 조각에서 재료를 다루는 일은 공간을 다루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무를 가지고 작업할 때, 작업의 결과는 단지 입체적 형상만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나무라는 재료를 매개로 공간적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형상이 없는 돌을 가지고 쪼며 깎고 다듬는 작업을 해 갈 때도, 결국 작가는 돌이라는 재료를 통해 공간적 관계를 읽고 해석해 가는 과정을 겪게될 것이다. 물론 조각작업은 곧 입체적 형상을 전망하는 일이지만, 입체적 형상 자체도 공간적 관계의 결과이니 모두가 공간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남을 것이다. 김세일의 최근 철선을 이용한 작업은 조각에서의 공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지점이 있다. 이전의 나무나 무쇠작업의 경우 재료를 통해 형상을 보듬는 방식이었다면, 철선 작업은 형상을 풀어 헤쳐 가는 방식이라고 할까. 그래서 재료 바깥에서 안으로 형상을 지향하는 관계가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열리는 관계로 전환하는 그런 지점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재료를 통해 공간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공간에서 공간이 소멸하는 지점으로, 혹은 공간이 띠를 두르며 성장하는 듯한 기운을 살리는 지점으로, 시간을 멈춰 세워 형상 속에 영원한 시간으로 잠재우는 방식에서 시간이 무한대로 흘러가는 순간을 선묘(線描)하는 방식으로 이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정지된 시간」에서 드러나는 철선 작업은 마치 추상표현주의의 난폭한 붓질처럼, 혹은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처럼 자유로운 어떤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꼬이고 꼬인 철선의 뒤틀림은 마치 시간과 공간을 순식간에 잡아내려는 듯한 과격한 채찍질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채찍질의 빠르고도 덧없는 시간이 아픈 생채기로 그 흔적을 남기듯이, 강한 선의 움직임은 이미 시간을 의미로 말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철선의 뒤틀림은 우리들 무의식 안으로 흐르는 복잡한 상념의 덩어리일 수도 있으리라. 삶을 가르는 온갖 상념들, 무의식의 뇌관을 건드려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우리의 욕망, 혹은 땅 아래로 강건하게 내려진 나무뿌리의 생명력과 같은 기운들이 흐르는 실타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김세일은 철선으로 그물을 꿰듯, 마치 어부의 손놀림과 마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엮어낸다. 「바다」에서 정지된 시간은 허공에 드리운 그물로 드러난다. 이번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선으로 가느다랗게 마치 실핏줄과도 같은 선 모양으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고, 그물 안으로 물고기 형상의 오브제가 걸려있다. 허공에 드리운 바다 속으로 물고기가 공간의 틈새로 움직인다. 하나의 시간이 미완의 그물구조로 짜여져, 정지되었으되 마감되지 않은, 잠시 멈춰있으되 굳어버리지 않은, 다시 말하면 정지된 상태에서도 흘러가는 그런 '정지된 시간의 바다'가 된다.
3. 마감처리를 하지 않는 철선작업은 김세일 작업의 한 유형이 된다. 그리고 마감을 열어놓는 개방성은 다시 투명성의 원리로 맞닿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김세일의 철선작업은 공간을 투명하게 하는 작업이다. 나무나 무쇠재료가 공간을 불투명한 조건으로 다룬다면, 철선은 공간을 향한 드로잉처럼 공간의 비어있음과 틈새로 향한 획 긋는 작업과도 같기 때문이다. 마치 공간의 호흡을 보여주듯 철선 사이로 난 구멍으로 우리는 공간의 숨결을 본다. 그에 비하면 시간은 선(線)으로 드러난다. 씨줄과 날줄로 그어내는 시간의 길이와 넓이는 공간의 깊이만큼 무한한 느낌으로, 그러나 결코 장대한 스케일로서가 아니라 한 땀 한 땀으로 삶의 의미를 떠내는 작은 손길로 그려져 있다. 재료의 투명성을 통해 새롭게 공간과의 관계를 바라본다는 점은 김세일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미 그는 스카치 테입을 가지고 형상을 만들어내면서 투명한 조각작업을 한 바 있다. 인체의 형상을 한 스카치 테입의 반투명성은, 마치 곤충의 투명한 허물처럼 껍데기로 남아있는 공간을 비추어내는 효과로 작용했다. 그에게 조각에서의 매스(mass)는 물질적인 조건만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어서, 투명성의 비물질적 조건으로도 접근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스는 닫혀진 물질이 아니라, 열려진 개념으로 와 닿는다.
4. 금색으로 된 짧은 철선으로 빚어낸 「빛」은 허공에서 빛나는 빛 덩어리 그 자체이다. 빛이라는 비물질의 요소가 철선의 구조물을 빌어 의미를 찾는다. 빛은 황금 색 구름의 형태로, 바다 위로 반짝이는 금물결의 형태로 비친다. 빛은 환희와 긍정의 의미로, 우주적 신비와 절대 진리의 의미로 그 외양을 비쳐준다. 빛은 둥글게 포옹하고, 직선으로 달려가며, 사선으로 비켜가며, 지그재그로 꿈틀거리면서 궁극에는 카오스(chaos, 혼돈)의 논리로 새로운 질서를 잡아간다. 빛의 움직임이 시간과 공간을 혼돈의 존재로 다시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니 그림자가 있다. 빛 덩어리는 공중에 철사줄 더미로 떠 있어, 위로부터 떨어지는 조명으로 인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김세일의 조각은 공간을 빛으로 비추어내고, 또 공간을 그림자로 남게 한다. 그림자는 일종의 원형에 대한 분신처럼, 공간의 공간, 투명함의 투명함, 시간의 시간으로 남는 것이다. 허공을 꿰는 바느질 작업과도 같은 그림자가 공간의 존재를 반사시켜주는 것이다. 빛이 그림자를 낳고, 다시 바람이 불어 빛을 흔들어놓는다. 작은 말을 묶기 시작하면서 이어진 철사 작업 「바람」은 그림자가 어떻게 시간의 기억으로 남는지, 어떻게 공간의 분신으로 남는지를 노래한다.
5. 김세일의 철선작업에서 또 다른 유형이 되는 것은 오브제를 놓고 그물을 짜 가는 방식이다. 수저가 철사망으로 둘러싸여 공중에 붕 떠있기도 하고, 신체 형상을 한 그물조직 안에 들꽃 같은 꽃들이 놓여있으며, 물고기와 말이 철사줄 안으로 자리를 잡는 방식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조각이 사물에 대해 갖는 또 다른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각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놓고 개념적인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 만들어진 무엇을 선택하여 그것이 위치하는 맥락을 달리하여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그런 개념적인 작업 말이다. 수저가 밥상을 떠나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수저가 아니라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형태로 바뀌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레디메이드는 개념적 형태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김세일의 철사작업 역시 어떤 유일한 조형적 의미를 집중하는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철사작업은 조각의 매스에 대한 질문일 수도,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고민하는 계기일 수도, 현상학적인 실재와 허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수도, 시간에 대한 반어법적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형적 충격이 우리에게 늘 생각의 지점을 바꿔보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개념적 작업이 조형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의 수저는 우리에게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할 「이야기 꽃」을 퍼 올리는 또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리라. 가볍지만 지독하게 오랜 공정을 치러야 할 철사작업이 그래서 의미의 무게를 만들고, 그 무게가 삶을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게 하는 그런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박신의
Vol.20040829b | 김세일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