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다,깨우다 shake,wake

이수연展 / LEESUYOUN / 李守連 / painting.drawing   2014_0712 ▶ 2014_0803 / 월요일 휴관

이수연_흔들리는 나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9.4×145.5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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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712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팩토리 헤이리 ART FACTORY Heyri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63-15(법흥리 1652-134번지) Tel. +82.31.957.1054 www.artfactory4u.com www.heyri.net

바람처럼, 나무생기(生氣)에 대한 이수연의 내밀한 탐구보고서 이수연의 그림은 최소한의 나타남으로 광대한 바깥을 품는다. 날아갈 듯 격하게 흔들리는 나무는 그릴수록 지워져가며 자신의 머리채에, 세포에 온통 대기를 품고 바람이 된다. ● 수행자와도 같은 엄격한 자기통제로 꾸밈과 넘침을 경계하며 걸러내고 덜어내는 그의 단출한 그림에서 헛헛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과잉이다.

이수연_회오리 바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12.1cm_2014

그를 끈질기게 사로잡는 것은 부재(不在)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때론 그려진 대상을 둘러싸며 그것과 긴장관계에 있는 '비어있음'으로, 때론 그 형상 위에 붓질로 불러들이는 부재의 흔적으로 기입된다. '만공(滿空), 텅 빈 충만'처럼, 우리의 전통적 인식에서 부재, 즉 없음은 서양의 경우와 달리 있음, 그러니까 존재의 대척점에 있는 무의미한 공허가 아니다. 인간(人間)에서 보듯 사람을 뜻하는 글자에 이미 '사이'를 봉합해 놓고 있지 않은가! 직전의 전시를 '부재를 그리다'로 명명한 작가 자신에게, 또한 그의 그림에서 '있음-형상'은 얼마든지 서로 자리를 바꿔 상호 배경이 될 수 있는 무한한 '없음-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만 온전할 뿐이다. 지하의 뿌리가 나무를 지탱하듯이, 죽음이 삶을 세우듯이.

이수연_바람 흩날리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91cm_2014
이수연_Les Branches vinat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8.6×28.9cm_2014
이수연_Les Branches vinat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8.5×40.5cm_2014

따지고 보면, 이미지 image의 어원인 이마고 imago란 '죽은 자의 초상'이 아닌가? 적어도 서양 언어-개념 속에서도 그림은 태생부터 부재의 그림자다. '그림-존재-여기 있음'이 '죽음-부재-여기 없음'의 표상인 셈. 범속한 소재와 간결한 외양의 이수연의 그림에는 그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예술의 본원적 관심, 죽음-결과적으로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풀어내려는 초지일관한 의지가 있다. ● 디테일을 걷어내고 일체의 작위적 구도를 배제하는 그의 '최소주의'가 빚어내는 그림들은, 선승(禪僧)들이나 철학자들이 자연을 형이상학으로 환원한 농축 알약으로 제시하는 것 같은, 미니멀리즘 류 작품들의 계시적이고 현학적인 수사가 개입할 자리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차라리 길을 가다 문득 눈에 들어온 저녁놀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내뱉는 '아!......'처럼 짧은, 그러나 긴 여운을 머금은 탄성을 닮았다. 낮과 밤의 교차, 빛과 어둠의 혼재,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서로 스며들어 이것이 저것이기도 한 모호한 시공(時空)의 틈. 사위어가는 나뭇가지에서 한 때 반짝였던 생명의 비약을 감지한 경탄. 그는 그것을 그리고 'les branches vivantes 살아있는 나뭇가지들' 이라고 명명한다.

이수연_Tornado_투명 인화지에 아크릴채색_42×29.8cm_2014
이수연_Tornado_캔버스에 콘테, 아크릴채색_130.3×97cm_2014

바람? 늘 어디선가 오고 지나므로 비롯한 곳을 알 수 없고 형체도 없는 그것은 정작 자신이 만나는 말 없는 사물들에 목소리를 달아주고 부동의 형상들을 흔들어 깨운다. 처마의 풍경(風磬)이 흔들리는 그때마다 우리는 쇳덩이, 돌, 나무 같은 과묵한 존재들이 본래 동물처럼 살아있음을, 생물(生物)임을 비로소 각성한다. 숨,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 혹은 뉴마 pneuma · πνεῦμα는 바로 바람이다. 보이지 않는 공기, 그 흐름, 기(氣)는 생명력, 존재의 원리로 받아들여진다. 바람은 온화한가하면 광포하여 파괴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힘의 상징. 범속한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 현현(顯現)manifestation, epiphany! 바로 존재함의 핵심에, 텅 빈 심장에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적절하고 훌륭한 수레가 있을까?

이수연_Les Branches vinates_캔버스에 콘테, 아크릴채색_72.7×60.6cm_2014

그림 속에서 나무가 바람을 부드러이 맞이한다. 주객이 서로 초대하고 만나고 전도된다. 감응과 떨림의 심미성이다. 한편,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버티는 또 다른 나무의 처절한 고투를 보라! 나무와 바람이 겨루다 서로의 경계를 넘어 제 삼의 영역에서 잎사귀와 대기가 섞인 한 몸으로 흔들리고 깨어나니, 그의 그림은 그렇게 하나의 춤이 된다. ● 시류를 좆는 미술 각축장을 멀찌감치 벗어나 홀홀 묵묵히 자기 걸음으로 가는 드문 한 사람, 자기 앞의 사물과 생을 조용히 응시하고 이해력과 지혜를 온축하여 힘을 뺀 붓질로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 적으려는 작가 이수연의 존재와 분투는 참으로 귀하다. to be continued. ■ 전상용

Vol.20140712a | 이수연展 / LEESUYOUN / 李守連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