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517h | 장준석展으로 갑니다.
장준석 블로그_blog.naver.com/viewinus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주)에이컴퍼니 www.acompany.asia
관람시간 / 주말_01:00pm~06:00pm * 평일은 사전예약시 관람가능
미나리 하우스 MINARI HOUSE 서울 종로구 낙산 3길 27-1 Tel. 070.8727.3303 www.minarihouse.com
한낱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을 이르는 말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꽃이 의미하는 바는 그 이상이다. 우선 그 화려한 각양각생의 형상에서 기인한 아름다움과 관련된 미학적 의미들도 수다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존재론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대한 유비들도 이에 못지않으니 말이다. 그 만개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꽃인 것이고, 그 개화된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하는 것이 아니기에 삶의 어떤 응축되고 아련한 순간들로 꽃은 우리에게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향한 것들도 그렇지만 이내 지고 말 꽃의 존재는 늘 어떤 희구와 기다림으로 의미부여를 지속시킨다. 꽃은 이처럼 현실의 존재를 넘는 특정한 가치지향과 의미들로 우리를 향해 오래도록 피어왔다. 아마도 특정한 문화적, 관습적 세례를 흠뻑 받고 있는 이러한 맥락들이 그 이유들일 것이다. 그렇게 꽃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번영하는 일들을 비유적으로 이르고, 중요하고 소중하며 핵심적인 것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꽃이야말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있다는 면에서 그 반대의 의미들 또한 담고 있다. 죽음을 향한 생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꽃은 피고, 또 지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의 의미가 상충하는 어떤 경계면에 꽃의 존재론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그 형상도 의미심장하기만 한데 화사한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생각 이상으로 기이하기만 한 자태들에 종종 놀라곤 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생의 가장 야릇한 욕망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동시에 이르는 타나토스(Thanatos) 개념 같은 것들조차 일상에 산개한 꽃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꽃은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잉태하는 삶의 깊은 존재론, 죽음에 이르는 생의 철학마저 담고 있기에 삶의 모호한 경계에서 많은 이들의 욕망을 잡아끈다. 꽃에 대한 무수한 호명도 대게는 이런 단순하지 않은 이유들을 담고 있기에 자못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장준석 작가가 선택한 예의 그 '꽃'을 둘러싼 이질적인 맥락들이다. 작가 역시 얼마간 이를 감지하고 있는 눈치인데 작업의 속성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만들어낸 꽃은 우선 기계적으로 계산되고 가공된 인공의 꽃들이고 공장에서 인위적으로 조립되어 계열적으로 복수화 될 수 있는 생산물이다. 자연적인 꽃이 아닐뿐더러 꽃이라는 생의 존재가 갖고 있는 시간적인 의미, 삶의 존재론적 유비를 무색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가장 꽃답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만든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 그런 '이상한' 꽃들이며 동시에, 실재 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단지 기호론적으로 부여받은 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오직 특정한 경계 위에서만 피는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부여한 호명도 이런 꽃이라는 일반화된 명칭대신 'FANTASILESS'인 점이 눈길을 잡아끈다. 판타지가 아닌, 그러한 욕망이 아닌 그 '없음' 혹은 '부재함'을 부각하는 것이다. 꽃이 갖고 있는 부재함의 역설, 혹은 부재의 미학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사뭇 진지하기만 하다. 아름다움의 대명사격인 꽃조차 결국은 무수하기만 한 욕망의 산물로 자리하는 것들이라면 이에 대한 부정은 차라리 비장함마저 전해준다. 인공시대, 모든 것이 인위적인 가공품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비장한 메시지마저 던지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함께 영속적 소유에 대한 갈망이 사회적 통념으로 부정되고 있는(작가의 말)'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그런데, 작가에게 세상은 수학적 연산과 이상적 판단으로 직조된 관습과 제도의 총체이며, 꽃은 그러한 사회가 잉태한 아름다움의 대명사이자 판타지의 상징체, 인간이 갈망하는 이상적 자유와 욕망의 관습적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 작가의 해법은 그렇게 인위적으로 잘 직조된 사회에 대한 일정한 거부의 논리, 부정의 미학으로 향한다. 작가의 꽃은 형상으로 재현될 수 없는, 기호적 의미로 작동하는 꽃일뿐더러 인공성으로 인해 그 불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상한 사물이니 말이다. 닿을 수 없는 어떤 욕망을 못내 담지하고 마는, 혹은 그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실재의 꽃과는 다른 것이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꽃들은 이러한 모순적인 속성, 실재와는 다른 부정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영원불멸의 인공적인 속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 자체도 모순처럼 다가오지만 단순하지만 밀도 있는 '꽃'의 문자적인 형상과 그 기계적인 반복으로 인한 질서정연함의 배열들이, 이 시대에 제법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질서와 배열, 이상적인 구성과 배치, 잘 마무리된 마감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시적인 실재의 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꽃이 의미하는 개념적이고 이상적인 면모들이 보존되며, 꽃에 드리워진 문화적인 맥락들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기호론적인 꽃의 의미를 쉽게 포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자리하는 불멸의 꽃에 대한 이미지들, 결코 시들지 않은 이상적인 꽃에 대한 형상들 말이다. 여기에 도처에 만개한 꽃들이라는 세태에 대한 느낌을 인공적으로 반복, 배열된 형태들로 확인까지 할 수 있으니 이쯤이면 그 형상적인 효과는 제법 성공적이란 생각이 든다. 차이가 반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숱한 반복으로 어떤 차이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동력의 중심에 부재의 논리, 모순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저 꽃이라는 기호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꽃이 모순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부재의 속성을 형상화시키고 있기에 그 의미가 각별한 것이다. 이 없음(less)이 꽃이 담고 있는 숱한 의미들, 곧 불안하고 모순적인 의미를 애써 형용하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이러한 부정을 향한 시도는 여러 갈래의 시도로 이어진다. 반복 패턴화 된 평면작업에서 확장하여 꽃 조각으로 불안한 꽃의 존재를 크거나 작게 형상화시키기도 하고 바닥 가득 고무 패턴으로 설치한 꽃밭을 관람객들에 밟게 하거나 인공적인 꽃에 물을 주는 넌센스 퍼포먼스를 통해 꽃이 가진 다중적인 의미를 확장시킨다. 꽃이 가진 사회적 통념을 전후로 하여 다시 이를 흔들어놓는 식이다. 때로는 실재의 꽃처럼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모순적인 속성을 비틀기도 하면서, 우리가 부여해왔던 꽃에 대한 통념들을 교란케 하면서 말이다. 그의 꽃은 이처럼 인공적으로 존재하다가도 다시 생명으로 거듭나야할 대상으로 치환되면서, 그 불안한 존재론적 지위를 유동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가진 기존의 의미들이 쉽게 탈각되지 않는 것처럼, 그 특정한 형상은 모습을 달리하면서 일정하게 보존된다. 조형적으로 소통되는 작업의 특성도 그렇지만 아마도 꽃이라는 언어적인 의미 작동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차이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차이일 수밖에 없다. 매번 다른 손길로 매만져진 작가의 꽃들처럼, 우리 역시 조금은 다른 특정한 의미들과 느낌들을 작가의 작업에게 부여할 테니 말이다. ● 작가의 꽃은 이처럼 지금 시대에 자리하고 있는 관념적인 불멸의 미에 대한 모순적인 의미를 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태생적인 속성상 담지 할 수밖에 없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의 덧없음과 영속성을 동시에 전한다. 조형적인 반복과 패턴으로 자리한 배치들 또한 이러한 시대적인 의미를 덧붙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한다. 부정한다 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인공시대의 또 다른 현실들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멸의 존재들과 미학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욕망의 판타지들일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공미학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의 시도 속에서 또 다른 차이화를 향해 나아갈 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두꺼워지고 복수화 되는 것이다. 부정성(less)조차 명사화되는 그런 시대적인 맥락들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복수화의 세태를 어떤 식으로라도 즐겨야 하지 않을까. 물론 단순한 양적인 확장의 즐거움으로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작가처럼 부단한 실험을 통한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 반복으로만 그치지 않는 작가의 끊임없는 (조형적인) 차이에 대한 시도들이 주목을 요한다.
이를테면, 꽃이라는 단어 자체에 생명을 주는 퍼포먼스가 그럴 것이다. 이는 부단한 실험으로 조형상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작가 특유의 작업인 동시에 그간의 작업 자체에 대한 교란이자 새로운 지반을 획득하게 한다는 면에서 관심을 요한다. 부정으로서의 꽃의 의미를 다시 부정하는 작업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어떤 특화된 조형성 스타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시도를 통해 조형적인 확장은 물론 그 의미까지 다시 뒤흔들어 놓는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것은 작가적인 미덕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시도들은 애초에 꽃이라는 관습적으로 굳어진 상징과 의미체계를 문제시하고, 이를 작업으로 끌어들여 다른 의미로 되살아나게 한 전작들의 시도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이처럼 부단한 부정성의 실험을 통해 조형적인 확장은 물론 다층적인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이미 언어적인 꽃의 기호성을 주된 작업으로 삼아야 하는 작가적인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기호조차 언어적인 동시에 조형적인 기능성으로 자리하는 시대적인 상황과도 연동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미지조차 또 다른 형식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작가의 꽃을 둘러싼 집요한 글쓰기는 꽃이 함축하는 사회문화적인 의미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아울러 조형적인 형상실험을 통해 그 너른 복수의 의미로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 한순간의 아름다움을 향해 숱한 산고의 과정을 밟아 피어나는 꽃처럼, 작업으로 개화되는 매순간을 향한 다양한 실험과 노력으로 지속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 민병직
Vol.20140629a | 장준석展 / JANGJUNSEOK / 張峻奭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