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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展 / JOSOOKYUNG / 趙水京 / photography   2014_0604 ▶ 2014_0609

조수경_await#0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5×7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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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홈페이지_www.photondoll.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자아의 실존적 성찰과 間텍스트성 ● 조수경의 작업은 독특한 다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21세기형 복합적 미술양식의 한 전형성까지 담보하고 있는 양상이다. 조각 텍스트와 사진 텍스트가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다중 번역'의 구조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장미의 이름'을 자신의 창작임에도 불구하고 서문에서 세 차례나 번역된 결과물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맥락에서다. 에코에게 '번역'이라는 개념은 '창작'의 脫모던적 개념이다. 조수경의 작업 역시 에코가 말하는 3중번역의 양상을 띠고 있다. 사람(작가 자신) -> 인형Ⅰ -> 인형Ⅱ(조각 혹은 유사오브제) -> 인형Ⅲ(사진 이미지)로 순환되는 구조다. ● 사람에 대한 번역(해석)물로서의 인형이「인형Ⅰ」이다. 이 대목에서 인형은 사람에 대한 미메시스이다. 물론 작가 자신에 대한 미메시스일 수도 있다. 특히 작가가 참조하고 있는 이미지는 현대인들의 외모지향적 욕망을 담은 물신화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는 바비인형(Barbie doll)이다. 신화 속의 아프로디테를 보다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이상화시키고 세속적으로 육화(肉化)한 물신으로서의 상품이지만, 후속의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현실 의식들은 희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수경_await#0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5×70cm_2014

그러한 물신화 대상이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인형Ⅱ」이다. 즉 조수경이 제작한 유사오브제(pseudo objet)로서의 조각작품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가가 재현하고 있는 인형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신화된 대상으로서의 바비인형과 같은 통속적 오브제를 대상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는 앤디 워홀이 자신의 화면에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등장시킬 때 먼로를 직접 모델로 삼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워홀은 매스미디어 속에서 무한 생산되고 소비되는 먼로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를 재현 혹은 해석한 것일 뿐이다. 먼로의 실재성과는 무관하다. ● 이렇게 재현되고 해석된 조각, 즉 인형Ⅱ에 대해 작가는 한 번 더 번역을 가한다. 그것이 바로 최종적 텍스트로서의「인형Ⅲ」, 즉 사진작품이다. 작가의 조각작품으로서의 인형 모습을 렌즈에 담은 번역 텍스트이다. 여기서 번역의 대상인 원전 텍스트와 번역 텍스트는 동일한 텍스트일 수도 있고, 또 전혀 다른 텍스트일 수도 있다. 이들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관계이기보다는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의존적 관계에 있다. 작가의 이러한 간(間) 텍스트성(intertextuality) 혹은 멀티 텍스트성은 전시 공간 자체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직화시키게 된다.

조수경_await#0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5×70cm_2014

조수경의 바비인형(Barbie doll)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세상을 향해 아무런 고뇌도 근심도 없는 상수시(sans souci)의 표정, 행복만이 허락된 표정이 바비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비의 얼굴에서 불안과 공포, 허무와 반항, 냉소의 표정들만이 읽히고 있다. 그러다가 근작에서는 무표정, 아니 영면에 들어간 모습들로 바뀌어 있다. 이렇듯 작가는 언제나 무거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지만, 할 수만 있으면 우회하고 싶고 꺼려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그가 공공연히 꺼내들고 있는 것이다. 낯설고 부담스러우며, 불편해지기까지 하는 문제를 왜 작가는 이토록 진지하고 일관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 지금 우리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고로 말미암아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3백이 넘는 무고하고도 순수한 생명이 희생당한 어이없는 사고에 온 나라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조수경의 이미지들이 오버랩되고 있다. 세월호는 우발적인 현실이 아니고 필연적 현실이며, 우리의 미래가 더 큰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기억하는 사람이 연애시를 쓸 수 있겠냐는 아도르노의 탄식처럼, 지금 우리 모두가 이 어이없는 죽음들 앞에서 실존적 메시지 말고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앙포르멜 화가 장 포트리에의 '인질'보다 더 노골적인 실존주의적 메시지였던 것이다. 불편하기만 했던 바로 그 이미지들이야말로 지워지지 않을 우리 모두의 심연의 상채기, 트라우마의 전조였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극복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조수경_await#0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0cm_2014
조수경_await#0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0cm_2014

이렇듯 3중 번역의 구조를 가지는 작가의 간(間)텍스트성이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 자신을 지시하거나 혹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문맥을 지니고 있다. 인형Ⅰ의 과정이 우회되어 바로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 혹은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형 속에 투영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사진으로 전이시키고 다시 그것을 나와 대면시키는 작업뿐이다."(작가노트)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실존주의적이면서도 표현주의적인 데가 있다. 현실의 외관에서 오는 감정보다는, 자아의 불안과 고독을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비장하고 통렬하게 느끼고 있는 바를 전달하고자 하는 점이 역력하다. 그가 던진 메시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것이면서도, 또한 '존재'가 안고 있는 근원적 불안에 대한 엄숙한 외침이기도 하다. 자기 내면의 사역에 따라 포즈를 취하고 얼굴에 분장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내면에 대한 표현의 한 편린에 다름 아니다. ● 사실 작가의 인형은 엄밀히 마네킹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필요에 따라 다양한 두발과 의상이 입혀진다거나, 혹은 얼굴에 분장의 채색이 가해진다거나 하여 사람을 대신하는 다양한 연출의 대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둘의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기능의 차이도 있지만 크기가 다른 대상이다. 거의 등신상 크기를 보이는 작가의 조각적 오브제의 크기로 볼 때도 마네킹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 마네킹들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작가가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계시의 충실한 메신자이자 간절함을 받들어 전파할 사도(使徒)들이다.

조수경_await#0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14
조수경_await#07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0cm_2014

이러한 작가의 작업 전체를 보면 컬트(cult)적인 데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작업은 철학적이다 못해 종교적이다. 최종적인 번역본이라 할 수 있는 사진에 이르러서는 진혼곡과도 같은 숙연하고도 비장한 선율이 흐르고 있다. 대다수가 외면하고자 하는 무거운 주제를 문제의식으로 들추어낸다거나, 다수의 관객보다는 소수의 공감자나 추종자와만 소통하려는 듯한 점에서 그렇다. 실존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성향 자체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죽음 그 자체를 미화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그림자를 밟고 있는 우리의 실존적 상황을 환기시키고 성찰케 하는 메시지이다. 작가 자신이 죽음 앞에서 담담하고 의연해지고자 하는 태도는 헌화(獻花)와도 같은 일종의 제의적(祭儀的) 제스추어로서, 큰 슬픔을 경험한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하겠다. 잠시라도 세상의 온갖 욕망을 내려놓고, 우리의 실존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곧 인간적인 겸허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서 인생의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 자의식의 동요와 내면의 불안들을 뒤로 하고, 한 송이 꽃이면 위로 받기에 충분한 우리의 영혼들 아닌가. 한 줄기 빛으로 산화한 넋들에 대한 애도와 헌화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들에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콧등이 시큰해진다. 훨씬 은유적으로 보정된 사진 이미지나 화면 분위기가 그러한 숙연함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형적으로만 봐도 이전의 것들보다 훨씬 정제되어 감정 이입이 쉬워지고 있지 않은가. 진지한 성찰에 의해 예술적으로도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 이재언

Vol.20140604a | 조수경展 / JOSOOKYUNG / 趙水京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