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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범 홈페이지_www.myeongbeomkim.com
초대일시 / 2014_0529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73(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대화를 유도하는 시각의 변증법 ● 갤러리 인의 메인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나무 시소는 그 육중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 타봤던 그 놀이기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잠재적인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seesaw'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공간의 움직임에는 시간적 변화 또한 포함된다. 작품 「시소」에서 놀이 기구와 자연의 통합은 자유로웠던 유년기를 연상시키는 낭만적 작품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겨울 놀이터 같은 을씨년스러움이 스며있다. 쓰러진 나목, 실제 기능이 정지된 은유적 형태는 긴장감을 야기한다. 김명범의 『시소(seesaw) 』(전시부제)전에는 나무에서 출발한, 때로는 나무 그자체가 몸통을 이루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나무는 지하-지상-천상을 잇는 공간적 형식으로부터 현재(see)와 과거(saw)라는 시간적 차이를 통합한다. 시소는 시계추나 그네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공간으로, 공간을 시간으로 전환한다. 김명범이 애호하는 소재인 나무의 계통 수 같은 형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 천상을 향해 가지를 뻗는 만큼이나 지하에 뿌리를 뻗는 나무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하나이자 다수인 변형태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여러 정체성이 뒤섞이며 정체성들 간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동일성은 타자되기를 향한 흐름에 속해있다. 그 변화는 몸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한 변형(transformation)이 아닌 변신(metamorphosis)이다. 변신은 성장과 죽음을 동시에 향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포함하여, 변신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에서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신화학자나 식물학자는 나무가 '끊임없는 변화와 재생을 상징'(진 쿠퍼)하며, '형상적 변이를 실현한다'(로베르 뒤마)고 말한다. 종교학자에게 식물은 '살아있는 현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엘리아데)으로 간주된다. 시소로 변신한 나무에서, 공간적, 시간적 차이는 현실/비현실의 관계를 포함하여, 대극을 이루는 것들 사이의 끝없는 동요를 불러오지만, 양자는 지속적 운동을 통해 균형을 잡는다.
긴장 속의 균형은 이 전시 뿐 아니라, 작가가 작업을 지속해오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개념이다. 대가 없는 사랑과 끝없는 헌신을 요구하는 작업은 작가들로 하여금 매 순간을 실존적 질문 앞에 대면시킨다. 예술가들이 몰입하고 있는 작업은 가히 수수께끼의 대상이다. 예술은 삶의 정점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삶과 대극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도 시도되는 대화라는 변증법적 과정은 예술의 신비와 잔혹함에 얽힌 수수께끼 풀이 법의 하나이다. 이 대화에는 삶에 가장 이질적인 것, 즉 죽음 또한 포함한다. 자연 또는 삶 보다는 예술의 편에 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던 작가들은 '영원한 먹이사슬 속에서 한 존재의 죽음을 통해 다른 존재의 생이 지속되는 곳이 자연' (공쿠르 형제)임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김명범은 이 어둠을 예술의 변방에 두지 않고, 한 가운데로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시소처럼, 자체 안에 반대의 힘을 포함한다. 이러한 내재적 관계는 상징적 도상 간의 시각적 변증법으로 가시화된다. ● 나무와 의자, 나무와 사다리를 한 몸통에 공존시킨 이전 작품처럼, 과거와 현재, 원인과 결과는 시소처럼 공존한다. 공존에는 분열과 종합, 갈등과 화해가 모두 포함된다. 이번 전시에서 사슴 머리뼈에 나뭇가지로 된 뿔이 붙은 작품은 우선 사슴뿔과 나뭇가지의 형태적 유사를 떠올린다. 사슴의 의태 과정은 생명력의 고양임과 동시에 죽음의 흉내이다. 의태적 과정은 환경과 구별되지 않음, 즉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형태의 유사를 통해 우주 전체를 유비의 그물망으로 짜는 방식은 고풍스럽다. 그의 작품에서 존재의 사다리는 사방팔방으로 향해있다. 개체와 환경은 촘촘하면서도 거대한 생태계의 그물망의 일부가 된다. 그 섬세한 그물망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사슬의 일부임을 예시한다. 머리에서 솟아나온 가지들은 마치 지식의 나무처럼 끝없이 분지해가면서 일련의 계통수를 이룬다. 반복과 차이 속에서 점진적인 변화는 개체 뿐 아니라 계통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로베르 뒤마의 「나무의 철학」에 의하면, '분기의 연속을 취하는 수목의 구조' (에른스트 헤켈)에 의해, 나무는 새로운 지식을 촉발하고 차후로는 살아있는 개체들을 상호의존적인 요소들이 복합된 전체로서 간주하며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한다. 연속과 팽창을 통해 진행되는 계통화는 나무의 형상을 보여준다. 나무와 정신은 무한정 자라나는 것이다. 김명범의 작품에서 소의 뿔(horn)과 달리 사슴뿔(antler)은 교접기가 지나면 탈락되며, 다른 개체들에게는 칼슘 섭취를 가능하게 한다. 꽃의 만개와 시듦이 열매를 위한 신호이듯, 사슴뿔은 삶과 죽음 사이의 역동적 순환에 근거한 풍요의 상징이다. 나무 지팡이의 말단이 노동의 도구인 망치, 곡괭이, 삽으로 변하는 작품은 예술과 노동, 성년과 노년의 관계를 일깨운다. 나무의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그리고 일시성이, 금속의 인공성과 강인함 그리고 영원함이 대조를 이루지만, 양 범주들은 스리슬쩍 그 경계를 넘어간다. ●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밧줄로 변형되는 지팡이 사탕 형태의 작품은 축제적 달콤함과 음울한 노화를 병치시킨다. 꼬임에서 풀림으로, 위에서 아래로, 색깔에서 무색으로라는 형식의 차이는 소재의 상징성을 증폭시킨다. 김명범의 작품은 은유를 공간적 형식과 절묘하게 융합하면서 서로를 고양한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사유와 노동이 함께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사탕에서 지팡이로, 그리고 그 모두를 이루는 근본적인 물질로 서서히 변신 중인 마술적 과정인지도 모른다. 풍선이 등장하는 작품은 풍선에 내재된 반(反) 중력의 방향성 때문에 그와 연결된 것들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육중한 덫에 연결된 풍선, 풍선에 낚여 수면 위에 드러난 물고기, 풍선에 매달린 사랑니는 은유적이다. 그것은 삶(예술)에 저당 잡힌 예술(삶), 경이와 위험을 동시에 야기하는 경계지대, 사랑과도 닮은 예술의 면모를 말한다.
작가는 상징적 사물을 동원하고(또는 만들고) 그 병치를 통해 이야기한다. 병치된 것들 간의 차이만큼이나 메시지의 진폭은 크다. 오래된 덫과 사슬로 매달린 스테인리스스틸 풍선은 부풀어 오르며 주변을 비추고,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물고기를 수면으로 끌어내며, 몸의 일부를 날려버린다. 이 상반되는 움직임은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포함한다. 풍선은 지상의 무게를 경감시키면서도 중력의 지배를 확인한다. 여기와 저기의 연결은 이 전시에서도 작가가 애용하는 나무라는 존재 태에 선명하다. 이 전시의 대표작인 나무 시소를 비롯하여, 뼈에서 돋아나는 나무, 노동 용구로 변모하는 나무지팡이 등은 변모라는 공통적 과정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 변모는 가역적이고 순환적이다. 한곳에 뿌리박는 나무는 동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지만, 부활과 재생이라는 좀 더 긴 주기의 움직임과 생명력을 보유한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도 이듬해 다시 싹이 나고, 고목에서 새순이 돋는 나무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모든 것의 상징이 되어 종교와 예술에 그 흔적을 선명하게 남겨왔다.
사슴 머리뼈는 이전에 박제된 사슴을 활용한 것과 비교하면, 삶과 죽음의 진폭을 더 크게 벌린 셈이다. 뼈든 박제이든 사슴의 일부는 나무로 자라난다. 일상어에서 '식물인간'이란 병적 표현이 있지만, 식물은 동물처럼 이동만 안할 뿐 동물에 비해 더 오래살고, 더 견고하고, 더 크며, 더 자족적이다. 식물은 최소한의 에너지 경제로 살아가기에 죽은 듯이 보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관계를 한 몸에 체현하며, 영원히 회귀하는 나무의 생태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서 경제를 유지 확대해야 하는 현대와 대조된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이야기처럼, 김명범의 작품 속에서 근접한 삶과 죽음의 관계는 비극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한 개체가 죽어야 다음 개체의 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달한다. 이전 전시에서 짐승 뼈가 등장하는 작품은 작가가 직접 요리하고 먹고 난 부산물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무처럼 번성했다가 탈각되는 사슴뿔처럼 생명력의 정점에 죽음이 있다. ● 반대로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가능케 한다. 나무와 노동 용구와 결합시킨 작품은 노동의 정점에 예술이 있음을 암시한다. 시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간의 도구와 작품에 활용되는 나무는 이 전시에서 노동의 용구와 결합하면서, 나이 먹어가는 '철없는' 놀이꾼인 예술가라는 실존적 상징 외에, 사회적 의미로 확장된다. 전시장에 서있는 나무막대는 겨울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것을 찬미하는 축제인 오월제(May day)를 떠올린다. 오월제에 사용하는 기둥(Maypole)은 공동체라는 '집단적 행복추구의 신화' (엘리아데)를 예시한다. 인간에게 풍요란 자연의 선물 뿐 아니라, 자연에 노동을 더함으로서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과 생산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비극이다. 실제 용구와 다르게 스테인리스스틸로 영구화시킨 기념비적 작품에서 노동은 유희적 예술로 변모한다. 주변을 비추는 금속 표면은 세상을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세상을 포함하는 노동과 예술의 면모이다.
작가는 노동 없는 예술, 예술 없는 노동이 불완전함을 확신한다. 양자는 내용과 형식만큼이나 한 몸의 두면이다. 구별되는 것 사이의 마술적 전이는 애니미즘과 토템의 시대를 호출한다. 이러한 원시적 세계관 역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뼈에서 자라는 나무나 지팡이에서 생겨난 노동도구 등에서 발견되는 변모는 정신적 차원을 포함한다. 식물은 인류사의 초창기부터 향신료나 환각 초, 발효 등을 통해 그러한 변화를 야기했으며, 이 변화는 서로 구분된 세계들 간의 대화를 야기한다. 가령 환각 초를 복용한 샤먼은 나무처럼 여러 세계를 섭렵할 수 있는 예지를 갖추게 된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꿈의 시대에 조상 령들은 거대한 나무를 통해 구름 위의 세계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이런 의식 때 샤먼들은 꿈나무를 기어 올라가 사라졌다가 돌아와 위쪽 세계에서 목격한 경이로운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 신화와 동화에 산재한 나무를 통한 연결망은 많은 이야기를 파생시켜왔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나무들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자,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로 여겨졌다. 나무는 신과 인간을 잇는 가장 친밀한 살아있는 고리가 되었다. 김명범의 이전작품에서 나무와 사다리를 일체화시킨 한 작품은 나무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를 잇는 계단이나 사다리로 여겨졌던 인류학적 상상력을 체현한 것이다. 또한 나무가 밧줄로(이번전시에서는 지팡이가 밧줄로) 변모하는 작품은 수직으로 까마득히 올라가는 나무의 생태가 야기할 수 있는 상상력이다. 지상에서 몇 십 미터까지도 자랄 수 있는 기념비적 스케일의 나무는 그 자체가 상승하는 움직임을 가진다. 김명범의 이전 작품에는 「창세기」의 야곱의 환상에 나오는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형태도 발견 된다. 이러한 상상에 대해, 조르주 나타프는 「상징, 기호, 표지」에서 인간의 비상하고자 하는 꿈에 연결되는 전형적인 수직성의 상징을 본다.
저자에 의하면 수직성의 이미지는 인간의 올라서기, 즉 초월의 꿈에 직접 연관되며, 더 나아가서는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영적 비상으로 연장된다. 니이체는 삶이 너무 무거워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가벼운 존재, 즉 예술이라는 선물이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은 이러한 상승이라는 기획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승은 또한 하락이기도 하다. 수직으로 묶인 줄은 교수형을 떠올린다. 이번 전시에서 풍선과 결합된 시리즈가 알려주듯, 위로의 움직임에는 그것에 반작용하는 아래로의 움직임을 내포한다. 이계 저계를 넘나드는 샤먼 또한 죽어야 사는 존재이다. 샤먼은 죽음 극복의 체험을 통해서 공동체의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김명범은 이러한 역설적 방식에 예술가 또한 포함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희생제의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류학과 종교학은 천상과 연결된 세계수 아래서 벌어졌던 희생제의나 나무 아래서 죽은 채 산 동양 현자의 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이 전시에서 나무의 또 다른 변형태인 지팡이는 마술적 변화를 체현한다. 세계수를 모방한 장대(막대, 지팡이)는 살아있는 영혼과 죽은 영혼을 잇는 계단 역할을 했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숨겨진 우물과 샘물을 찾는데 사용된 수맥 탐사용 지팡이나 광부들과 보물사냥꾼들이 사용했던 막대기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필요했던 모세의 지팡이까지, 나무 지팡이에 기적 같은 힘을 부여했던 사례들을 열거한 바 있다. 그것은 토템 막대기가 세계수의 축소판임을 염두에 둔다면, 엉뚱한 도약도 아니다. 그러한 예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뱀이 휘감겨 있는 '생명의 지팡이'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인류의 문화사에서 악역을 맡는 뱀은 그리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생명의 지팡이'에서 죽음과 타락이 아닌, 생명과 지혜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변신의 상상력은 상처와 치유,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것이다. 김명범은 역설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나무의 어법을 활용하여 대화한다. 이 예술적 대화에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이고도 오래된 상상력과의 교감이 포함된다. ■ 이선영
Vol.20140527h | 김명범展 / KIMMYEONGBEOM / 金明範 / sculpture.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