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에 대한 A의 차집합 The Relative Complement of A in U

조재영展 / CHOJAIYOUNG / 曺宰榮 / installation.sculpture   2014_0517 ▶ 2014_0529 / 월요일 휴관

조재영_Monster_판지, 접착지, 목재, 바퀴_160×55×52cm_2014 조재영_Monster_판지, 접착지, 목재_130×61×75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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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영 홈페이지_www.jaiyoungcho.com

초대일시 / 2014_0517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알맹이 없는 더 충만한 세상 ● 'U에 대한 A의 차집합(The Relative Complement of A in U)'라는 부제로 열린 조재영 전은 전체(U)에서 무엇인가 빠진(-A) 나머지를 주제로 한다. 작가에 의하면 A는 '세계 안에서의 지극한 순조로움', '견고한 틀과 당연함'을 말한다. 정상과 상식의 몫에 세상이 부여하는 중요함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뺀 나머지들은 비정상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작가는 한정된 전체(U)라는 무한의 차집합에서 또 다른 무한을 본다.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을 주인공으로 전면화한다. 핵심은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유령 같은 것이 되며 주변적인 것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형태화된다. 동일성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타자의 위치에 처한 예술이 사회가 코드화할 수 없는 나머지들과 공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의 예술 또한 지배적 가치의 규범에 따라 표준적 과정에 속하려 하며, 그에 상응하는 관념적 태도로 스스로의 모순을 합리화 한다. 이러한 합리화를 통해 그렇고 그런 수준의 무난한 작품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생산된 무난한 '작품'들이 무난한 상품만큼의 가치라도 있는지는 의문이다. ● 그러나 예술에 의해 다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타자적 이질성을 조형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가장 흔한 방식은 마냥 늘어지고 어질러 놓는 스타일이다. 거기에는 기괴함이니 비천함이니 하는 다시금 코드화 된 언어가 따라 붙곤 한다. 그러한 흐느적거림은 쉽게 영토화 되고 만다. 그것은 자신이 거부한다고 믿는 코드의 일정 영역에 속해있다. 우리는 추상적 반대가 얼마나 체제 영합적인지 알고 있다. '차집합'으로 지시되는 타자적 이질성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하는 조재영의 방식은 사뭇 엄밀하다. 이전작품에서도 발견되는 편집증적 엄밀함이 이번 전시에서도 발현된다. 세상 살기는 좀 힘들겠지만, 작업의 세계에서는 불리할 것도 없는 성격이다. 전시장에는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기하학적 형상들이 우연히 던져진 듯 놓여있다. 전시 작품들은 느슨한 연결망을 가진다. 어떤 도면으로부터 시작되었을 조재영의 기하학은 이상적인 광학적 질서가 투사되는 반듯한 기하학이 아니다.

조재영_Through another way_판지, 목재_230×60×310cm_2014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하고 비가시적인 맹목(盲目)적 기하학이며, 추상적이 아니라 촉각적인 기하학이다. 또는 더 낮은 차원(2,3차원)에 투영된 고차원(3,4차원)의 단면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작가가 사용한 자가 어떤 것일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이진법에 의해 모든 것이 플로차트로 그려지는 시대에, 작가는 1과 2사이에 있는 무수한 소수점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하나의 물병도 수학적으로 따지면 인식의 스펙트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남다른 인식의 스펙트럼은 전통적 조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덩어리보다 그것을 싸는 표면, 또는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정교해졌다. 덩어리는 하나지만 껍데기는 많을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다양성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폄하되었지만, 바야흐로 하나의 본질이란 것이 의심에 붙여지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그것이 껍데기인한 알맹이와의 관계는 남아있다. 차집합이라는 수학적 개념은 어느 한쪽의 소멸이 아니라 안팎의 경계라는 긴장감을 유지한다.

조재영_A set_판지, 나무,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14

전시장 곳곳에 놓인 3차원적 다면체(polyhedra)들은 꽤나 까다로워 보이지만, 확실한 무엇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거기에는 표상으로부터 탈주, 그리고 중심 있는 구조를 해체하는 차이적 관계의 놀이가 있다. 이 사물들은 정확히 이름 붙여지고 기술되는 대상처럼 언어를 따라 차별적으로 질서화 되지 않는다. 조재영은 언어에 전제된 위계적 질서를 거부한다. 이항대립에 의해 조직화된 언어의 통일성은 존재의 표면으로 분산된다. 그것이 '재현이 아닌 사건'(들뢰즈)으로서의 예술이다. 사건은 언어적 표상처럼 투명하지 않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한 단상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언어의 상징적인 질서가 상징화할 수 없는 불투명하고 통제 불가능한 순간에 대해 매혹된다. 이름붙이기 힘든 이 모호한 사물들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 기원은 이상적인 플라톤적 기하학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일상에 속하는 물건들이다. 자세히 보면 계단이나 기둥, 벽지나 축구공 같은 구체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물의 질서는 살짝 비틀려 있다.

조재영_Moved wal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3×123cm_2014

무거운 것은 가벼워지고, 안쪽은 바깥으로 까발려지고, 부정은 긍정이 된다. 거기에는 기준 자체를 다르게 적용시켜 배치된 또 다른 질서, 현실의 어떤 공간과 닮았는데 어슷하게 다른, 상황 논리에 따라 가변적인 기하학이 있다. 조재영의 작품에서 어떤 기능이나 구조를 향해 배열되어있는지 불확실한 섬세한 각들을 형성하는 것은 종이나 판자이며, 그 내부는 텅 비워져 있어서 보기보다 가볍다. 재료의 눈속임과 표면에의 강조, 관객의 운동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전개되는 지각적 체험 등이 두드러진다. 작업실 계단이나 기둥으로부터 시작된 작품 「Through another way」은 무엇인가 쑥 빠져나간 나머지 공간(negative space)이 기념비적으로 자리하면서 색다른 공간체험을 야기한다. 원래 사람이 통과하던 빈 공간은 판지와 나무로 형태화 되었고, 발을 디디며 올라가던 계단은 허공이 되어 관객이 통과할 수 있게 했다. 갑갑했던 기둥 또한 활짝 열어놓았다. 화석처럼 굳은 일상적 환경은 가변적인 무엇으로 변화한다.

조재영_완전한 구를 향하여_오브제, 천, 실_가변크기_2014

캔버스에 벽지 문양을 그려 파티션처럼 공간에 세워 놓은 작품 「Folding walls」는 미술관 벽에 걸리는 캔버스가 작업실 같은 상황에서는 다른 사물로 바뀔 수 있음을 표현한다. 캔버스는 그림이자 가변적 공간이 된다. 그림이라는 환영을 담아왔던 오랜 관념적 틀은 사물이 된다. 이 전시에서 원래의 자기동일성이 변질되는 예는 많다. 작업실에서 막 사용되는 도구들 위에 이런저런 형태로 얹혀있는 축구공 모양의 작품 「완전한 구(球)를 향하여」는 6각형 20개와 5각형 12개로 이루어진 축구공의 전개도를 따라 만든 것이지만, 재료를 달리하여 그 모습이 낯설다. 축구공으로서의 구조적 조건은 갖추었지만,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높은 천정으로부터 내려온 붉은 덩어리는 아래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덩어리와 균형을 맞춘다. 원이나 구가 인류의 무의식이나 상상력에 나타난 바와 같은 완벽함을 갖추려면,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그것은 내재적 결정 요인만을 고려하는 닫힌 형식을 거부한다. ● 가변적 상황이 강조되는 작품에서, 형태를 바꾸는 이질적 요소는 안이 아닌 바깥에 있다. 차집합은 바깥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 형식 내부를 교란하고 변화시키는 바깥의 요소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이나 철학에서도 강조된다. 마이클 라이언이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말하듯이, 과학 역시 세계에 대한 절대적이고 확고한 진리를 설명하는 형식적 공리의 집합이 아니라, 현재의 공리가 완결된 것이기를 그치고 보충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한계 상황, 즉 미 결정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가 예시하듯이, 체계의 완결성을 자신하는 형식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체계 내부에 있지 않다. 바깥 같은 다른 차원을 고려할 때,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 2층에 놓인 작품 「공기의 무게」는 무게에 따라 각이 결정되는 추이다. 가장 부피가 적어서 공기를 가장 많이 포함하는 것이 가장 무거운 추처럼 연출된 이 작품은, 부피가 아니라 공기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예기치 못한 서열을 보여준다. 모순적인 무게 설정은 부피가 아닌 공기를 기준으로 하면 논리적인 것이 된다.

조재영_Folding Wall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3×100×50cm_201

모체와 분체가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작품 「A set」는 속이 빈 기하학적 구조를 뒤집어서 만들어진 형태와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빈 공간을 구조화하여 좌대 위에 올려놓은 형태가 세트를 이룬다. 닫힘과 열림, 또는 덩어리와 빈 공간이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작품 [Monster]에서 변이는 예측 불가능한 괴물의 노선을 따른다, 다른 전시에서 사용된 것의 일부를 잘라내고 덧붙이는 과정을 통과한 그것은 다음 전시에서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예측불가이다. 그것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다시 엮어 쓰고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 같은 방식이다. 작품의 소비에서 발생하는 수동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늘 상 새롭게 짜여 지는 '텍스트의 쾌락'(롤랑 바르트)을 야기하는 과정은 작가 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해당된다. 상황과 상태, 과정과 흐름을 가시화 하는 이 작품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 그자체가 본질을 이룬다. 무에서 유의 창조나 영원성 같이, 아직도 예술에 남아있는 신학적(그리고 그것의 변형인 관념론) 잔재를 거부한다. ● 종이로 만들었지만 견고해 보이는 「Monster」는 신인동형론에 기반 하여 대지 위에 곧게 서있는 조각의 기본질서를 흉내만 낸다. 서 있기는 하지만 바퀴가 달려있어 고정되어 있지 않은 「Monster」에는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 위치가 없다. 그것은 시공간의 축을 따라 변화하며, 눈을 속이는 재료사용은 안과 밖 사이의 연속적 관계도 단절시킨다. 연속성에 바탕 하는 상식적 질서 곳곳에 단층을 형성하는 작품에서 어떤 정합적인 이야기(내용)를 읽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이 서사라면 산문이 아니라, 시여야 할 것이다. 조재영의 작품은 물질이나 개념에 있어서 논리적 투명성을 전제하는 근대적 '이성의 조각이 상황의 조각으로 바뀌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에 속한다. 근대 조각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한 고전적 조각은 유기체와도 같은 자기충족성과 자율성을 가지며, 한계의 개념에 충실하다. 그것은 명석한 사고를 중시한 근대철학자 데카르트의 규칙이었던 '명증성, 분석, 종합, 통제. 이성의 보편성' 등과 같은 원리에 충실하다.

조재영_Through another way_판지, 목재_가변크기_2014

일상적 세계의 좌표축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수직/수평에 근거하는 데카르트적 공간체계이다. 이러한 중심 집중적 체계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조재영은 차집합을 통해 안정감을 주는 그 무엇을 빼내려 한다. 핵심이 빠진 그것들은 해체와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안정적 질서야말로 죽음과 가까울 수 있다. 가령 질서가 경직되면 유기체는 죽어버리고 만다. 살아있는 세포막은 열림과 닫힘에 있어 융통성이 있다. 차집합의 개념을 통해 방점이 찍힌 것은 닫힌 한계가 아니라 열린 경계이다. 고전주의는 한계에 낭만주의는 무한에 충실하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조재영의 작품은 고전주의처럼 자를 사용하면서도 무한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수직/수평이 만나는 중심에 기반 하는 근대적 합리주의는 지양되지만,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정교하게 짜 맞추는 방식은 기하학적 질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뒤집혀진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제작과정 역시 빈틈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느슨함이라고는 없다. 그렇지만 고정된 관념적 질서는 실재적 과정에 자리를 내주었다.

조재영_공기의 무게_종이, 목재, 실_가변크기_2014

그것은 정점이 아니라, 시간의 추이에 따른 움직임을 강조함으로 가능했다. 시간성은 하나의 중심을 향한 전진보다는 유쾌한 혼돈 같은 모호한 체험을 야기하곤 한다.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의 흐름」에서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현대조각이 비합리적인 입체, 즉 구조적 핵심의 논리가 배제된 주변적 요소들의 배열로서 취급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조각은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공리적 좌표 속에 위치한 존재, 즉 고정되고 불변하는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체 또한 사라진다. 관념적 주체가 사라지는 대신에, 미지의 사물과 마주하는 살아있는 몸이 탄생한다. 주체 바깥에 작품을 놓으려는 태도, 관념이 아니라 지각이나 경험 같은 실재적 과정을 중시하는 점은 조재영의 조각이 가지는 현대성이다. 이러한 현대성은 무기력한 흩어짐이 아니라 다중심성을, 느슨한 해체가 아니라 재구축을, 무정부주의가 아닌 또 다른 질서를, 허무주의가 아닌 열린 인식체계를 지향한다. ■ 이선영

Vol.20140517d | 조재영展 / CHOJAIYOUNG / 曺宰榮 / installation.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