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먹빛에 취하다

오송규展 / OHSONGGYU / 吳松圭 / painting   2014_0513 ▶ 2014_0518 / 월요일 휴관

오송규_소요유-날다Ⅰ_화선지에 수묵_80×116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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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514_수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숲속갤러리 SUPSOK GALLERY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 122번길 67 Tel. +82.43.223.4100 cbcc.or.kr

오송규의 먹빛 포스트모던 이래로 다시 재료와 주제(테마)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과 함께 이른바 '소재주의'라는 시선으로 무시당하던 재료와 주제의식이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여 회화의 세계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때의 세계는 과거의 소재주의적인 재료와 테마에 대한 편향된 집착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료나 테마의 원천과 본질을 작가의 의도 및 방법론과 더불어 공존시키고 조화 시키려는 보다 복합적인 시각 속에 등장하는 것이며 그러한 만큼 필연적인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 작가 오송규의 회화는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작업 속에 잘 담고 있다. 바로 '먹'이라는 재료의 물질적 존재성을 '먹빛'이라는 주제 속에 실존시킨 채, 한국화의 현실적인 생존율을 그 속에서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형태의 단순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먹의 농축된 표정, 그리고 그것을 화선지라는 또 다른 물성 위에 융합시키는 일련의 조형적 실험은 이른바 수묵산수의 전통적 관념성을 '양식(Style)'이라는 현실적 형식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송규_한일(閑日)Ⅰ_화선지에 수묵_66×91cm_2014
오송규_강물 흐르다Ⅰ_화선지에 수묵_81×116cm_2014
오송규_대숲에 부는 바람_화선지에 수묵_70×91cm_2014

사실 우리 고유의 수묵화가 열려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치를 제대로 인식시키지 못했던 것은 '수묵'이라는 장르의 과묵한 표정에 매달려 이른바 양식의 부패현상을 일으킨 결과라 볼 수도 있다. 수묵이 원천적으로 갖는 심미적 가치에만 안일하게 의탁하여 그 형식상의 실험을 거부하고 전통이라는 껍데기에 내내 안주한 채, 역설적으로는 그 심미성마저 모호한 것으로 만든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며 수묵의 필연적 상징성(단색으로서의 먹색)에 매달려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은 결과, 전통마저 훼손시켰다는 이야기다. 근대정신과 미학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임마누엘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고 그의 비판 철학의 구조적 종합성을 대변한 적이 있다. 이것은 특히 '전통'과 그 '계승'이라는 우리의 전통예술이 갖는 이항대립의 구조적 과제를 변증적 사고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 작가 오송규는 수묵이 갖는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잇기 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시대와 그 정신에 걸맞게 종합, 혁신해 나가는데 의의를 둔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화면에 나타나는 조형적 단순화 및 빗살의 양식적 전개는 이것이 결코 단순한 전통이나 아니면 그것을 직설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와는 맥락이 다른, 직관적인 동시에 개념적인 시각상(특히 양식적인 개념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여기에서부터 오송규 특유의 조형적 실험성이 뚜렷하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면(field)으로 단순화 된 먹색의 물질적 집합을 물붓으로 자연스럽게 나눈 채, 마치 빛살과 같은 선조(線條)로 '자연'의 내면에 존재하는 비물질적 표정, 곧 맑고 투명한 동시에 무한한 시공간적 표정을 밀도 있게 표현하는 과정은 과거의 전통적 수묵화의 선적 전개와도, 그리고 급격한 필묵의 탈전통적 시도와도 완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의 물붓의 오묘한 스밈과 번짐의 물성적 전개는 단순히 면을 선으로 바꾸는 기술적이고 물질적인 전환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화면 하반부의 과묵한 형상적 전개를 통합적으로 조화시키는 조형적 과정으로서, 화면 전체의 다양한 요소를 일정한 규칙아래(횡적인 확산의 구도에 대해 사선의 충돌과 갈등을 통해) 통일 시키는 미적 형식의 활성화 과정이고 전통산수 본연의 준법 관념을 새롭게 표상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시공간적 은유일 따름이다.

오송규_모악산-날다_화선지에 수묵_70×91cm_2014
오송규_비상(飛上)Ⅰ_화선지에 수묵_91×52cm_2014

결과적으로 오송규의 화면에서 느낄 수 있는 '먹의 물성적 실존성'과 '먹빛의 표상적인 은유성'이라는 함수관계는 물질과 정신의 복합적인 조율을 통해 '물질=정신'의 재결합을 지향하는 오늘날 시대정신의 한 상징으로서 주목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이 결합을 결코 거대한 이념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과 물질을 매개하는 일련의 기호체계, 예컨대 빗살 문양과 같은 가벼운 동시에 짙은 은유성, -그것은 어쩌면 '담백함/단아함'과 같은 사뭇 예민하고 밀도 높은 감성계를 시각적으로 소통시키는 언어이며 그 은유성의 문법을 빌어 새로운 조화를 조심스럽게 찾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시대정신의 긴장감을 잃은 전통의 맹목적인 계승, 그리고 전통에 대한 공허한 도전은 전통의 훼손일 따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오송규의 이 '먹빛'의 소박하고 구체적인 미적실험과 양식의 시도는 한국화의 또 다른 전개에 적지 않은 실마리를 던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윤우학

오송규_그리운 날에_화선지에 수묵_75×117cm_2014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화선지와 물과 먹과 시간은 내 작품을 이루는 근간이다. 작업을 하면서 먹과 물과 시간의 조화에 따라 변화하는 먹색은 나를 취하게 한다. 물의 양에 따라 먹의 농도에 따라 시간의 길이에 따라 번짐과 맺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들을 어렵게 어렵게 맞추어 가지만 이러한 과정들을 내가 해내는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면 내가 먹에 물에 종이에 시간에 조종당한 느낌이 든다. 내 의지인줄 알았는데 전적으로 내의지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조마조마한 순간도 만나고 행복한 순간도 만나게 된다. 무심한 듯 흐르는 물, 유유자적 나르는 하늘의 새. 거기에 서있는 나무, 변함이 없을 것만 같은 산, 이러한 것들이 나의 작품을 지탱하는 힘이다. 산처럼 변함없이 푸근하게 새처럼 자유롭게 물처럼 느리고 여유롭게 꾸밈없이 촌스럽게 무심하게 나답게...살고싶다. 진정한 소요유(逍遙遊)를 꿈꾼다. ■ 오송규

Vol.20140513e | 오송규展 / OHSONGGYU / 吳松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