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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윤 홈페이지_www.yoonbori.com
보리윤 이메일[email protected]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02:00pm~07:00pm
사이아트 스페이스 CYART SPACE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www.cyartgallery.com
의미의 일루전과 텍스트적 한계에 대하여 ● 마치 몰타르에 의해 벽돌이 한장 한장 켜켜이 쌓여 올려진 것처럼 보리윤 작가가 만들어낸 작업 결과물들은 어떤 면에서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잠자리, 비행기 그리고 식물이 무성한 정원에서부터 팝스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은 마치 하나의 아이콘처럼 명료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들, 문장들은 수술용 칼과 작두로 얇게 칼질되어 있고 종이 속의 텍스트들은 원래의 문맥과 의미를 상실하고 무질서한 순서로 뒤섞여 회화 작품의 재료가 된다. 이 텍스트들은 마침내 하나의 특정한 사물을 지시하는 이미지라는 질서 안으로 수렴되지만 본래의 용도와 의미가 해체된 그 지점에서 재구성된 결과물은 기존의 용도를 벗어나 회화 작품의 형식으로 재생되고 있기에 바뀐 문맥의 하부 구조이자 회화작품의 재료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그런데 보이윤 작가의 작업에서 그려진 혹은 만들어진 회화 작품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여전히 사용된 종이 즉 텍스트의 지지체인 문서나 인쇄물의 형식이 취하고 있음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문자들의 흔적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작가가 이렇게 텍스트를 재료로 하여 형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게 된 데에는 여기에 영향을 준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문서 분쇄기로 잘려진 듯한 문서 조각들을 작가가 직접 하나의 종이로 된 문서로 밤을 새워 이어 붙여 문서의 원형을 복구한 결과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가족에 대한 어떤 의심과 오해를 풀어낼 수 있었던 과거의 가족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 이 사건은 당시 작가 자신과 가족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었고 아직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자신의 작업 가운데 연장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가 그 당시 경험한 것에는 텍스트의 파편 중에는 의미소(意味素)를 갖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잘려나간 조각들도 있었을 것이며 여기서 일종의 이미지처럼 그림 맞추기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만 지시적 의미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의 작업이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프로세스적 형태로 발전해 가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 당시의 문서를 재조합하여 서류의 원래 형태를 만들어낸 행위와 지금의 작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당시에는 서류의 원형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지금 그의 작업은 재료가 되는 문서의 텍스트가 있었던 문맥적 의미를 재구성하기 보다는 하나의 단어를 연결고리로 하여 기존의 문맥을 무력화시키고 또 다른 새로운 문맥으로 편입 시키는 작업을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면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점검해 보아야 할 지점은 보리윤 작가의 작업이 텍스트가 인쇄된 종이들이 잘게 잘려져 폐품과 같은 상태에서 변모하여 회화작품이라는 아름다운 결과물로 재 탄생되고 승화된 작품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폐품이나 잡동사니를 모아 정크아트라는 장르의 작업을 했던 작가들이 폐품을 재생시키고 승화시켜 다시 속물적이고 유미주의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시도 자체로 도시문명의 구조를 비판하고 전통적 의미의 미술 관념들을 비판 하고자 하였던 바와 같이 보리윤 작가의 작업에서의 방점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지시적 의미를 갖게 된 텍스트들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쇄된 텍스트가 있었던 기존의 문맥으로부터, 다시 말해 기존의 지시적 의미로부터 이탈시켜 회화라는 이종(異種)의 영역으로 문맥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지시성에 대한 문제로부터 이미지의 지시성에 대한 문제로 변조되는 상황 즉 인쇄된 문서 속의 텍스트가 기존의 지시적 의미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면서 이미지의 도구적 소재로 사용되고 이때 이미지라는 또 다른 차원의 텍스트 안으로 편입되어 해체된 텍스트는 메타적 차원에서 중층적으로 텍스트의 지시적 한계가 노출되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될 때 텍스트는 그 의미의 경계를 무한히 열어놓을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보리윤 작가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은 의미의 연결고리를 잃은 텍스트들을 모아서 만든 것일지라도 이것들이 구축한 이미지는 명료한 지시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 하지만 여기에 보이는 텍스트들은 사실상 하나하나 쪼개지고 잘려져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에 아름답기까지 해 보이는 사물의 형상은 작업에 가까이 다가가서 관찰하면 할수록 오히려 부실한 구조물과 같이 허물어질 듯이 구축된 의미의 신기루임을 확인하게 되고 그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리윤 작가의 작업은 의미의 일루젼만을 보게 되는 인간의 시각방식에 대해 파편화 되고 해체된 텍스트를 쌓아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하여 그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명시적인 사물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라는 것 역시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텍스트의 또 다른 국면일 수 있음을 자각하도록 텍스트 그물망에 갇히게 된 이미지의 형태를 통하여 그 한계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이승훈
Vol.20140413a | 보리윤展 / BO-RI YOON / 菩提尹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