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aithful Belief; 삼신뎐 三信傳

임영주展 / IMYOUNGZOO / 林榮住 / painting   2014_0408 ▶ 2014_0420 / 월요일 휴관

임영주_신목167 남 the god of tree 167 south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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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 블로그_blog.naver.com/imyoungzoo

초대일시 / 2014_0408_화요일_06:00pm

레스빠스71 2014 YOUNG ARTIST COMPE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레스빠스71 L'ESPACE71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71길 5(청담동 141-11번지) 중인빌딩 B1 Tel. +82.2.511.7101 www.lespace71.com

세 가지 믿음에 관한 이야기 ● 현대사회에서의 믿음은 불순하게 여기는 속(俗)을 철저히 배제한 성스러움에서 온다. 그런데 임영주는 삼신전(三信傳)을 통해 깊은 무의식 속에 침전되어 있던 우리민족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믿음을 깨워낸다. 설화에서 어떤 사물에 감응하여 생명의 잉태가 이루어지는 감생(感生)은 고귀한 영웅적 인물의 비범성과 신이성, 곧 성(聖)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로 자주 해석된다. 그러나 임영주는 감생설화(感生說話)에서 감생(感生)의 잉태와 탄생의 결과보다는 원인에 주목한다. 엉터리 염불을 외우고도 극락에 간 시어머니 설화에서 믿음을 행하는 주체자가 종교적 교리, 교율 준수 엄격함이 아닌 믿음에 대한 진정성과 간절함으로 소원을 성취한 것처럼 감생설화(感生說話)의 본질과 임영주의 시선이 이와 맞닿아 있다. 임영주는 우리의 믿음에 성(聖)만 내세우는 것을 경계한다. 작가의 삼신전(三信傳) 감생(感生)에는 성(聖)과 속(俗)이 공존한다. 삼라만상에 대한 통속적 믿음이 곧 성(聖)이 된다. ● 작가가 전하는 일신(一信)의 대상은 자연물 '신목'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처음 내려온 곳이 신단수 아래다. 웅녀가 감응하여 단군을 잉태한 곳도 신단수다. 마을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것이 당나무이고, 굿을 할 때 신이 좌정하는 곳이 신목이다. 신목은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그저 크고 오래된 나무에 불과하지만, 기원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는 이에게는 신령한 기운으로 교감한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단단하게 쌓여온 믿음이기에 누구든 정성을 다하면 어느새 신령한 기운은 비손을 하는 주체의 몸과 정신, 작가의 작품 곳곳에 깃들어 다양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는 신성(神聖)을 만나게 해 줄 것이다. ● 작가가 전하는 이신(二信)의 대상은 인공물 '임신아파트'이다. 임신아파트에 대한 믿음은 지형이 지닌 형상에 따라 남녀근석으로 조화를 이루려는 음양사상을 기반한 풍수신앙에서 출발한다. 아파트에 대한 믿음은 아파트가 지어지고 난 뒤에 형성된 것으로 시기는 최근에 가깝다. 하지만 믿음의 기반이 되는 음양사상은 개인적 믿음 이전의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존재해 왔고,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는 바다에 빠져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를 해랑당신으로 모시고, 남근을 깎아 제물로 바치고 있다. 여기에는 풍요와 다산의 생산력에 대한 개인적, 공동체적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이는 오랜 민족문화 기저에 깔려있는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믿음이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존속될 믿음이다.

임영주_신목167 북 the god of tree 167 south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13

작가가 전하는 삼신(三信)은 '삼위일체 영롱한 소리'이다. 삼위일체 반지를 흔들면 영롱한 소리가 난다. 이는 무당이 흔드는 요령의 소리와 비슷하다. 작가는 삼위일체 소리 듣는 법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무당이 요령을 흔들어 신과 접신하여 무아지경에 빠지듯, 작가는 사람들이 삼위일체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과 교감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앞의 두 믿음을 통해서는 오래도록 쌓이고 쌓여 영험함을 지니는 외부의 힘을 보태어 나를 완성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영롱한 삼위일체 소리를 통해서는 자신이 그 동안 발견하지 못한 내면의 힘을 통해서 스스로 나를 완성해 나갈 수 있다. 이는 나를 찾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믿음이 될 수 있다. ● 임영주의 드로잉 과정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상상력과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 구조가 선명해지고, 다양한 변이형을 만들어내는 설화 창작원리와 동일하다. 작가의 작품은 여러 사람의 경험과 염원, 그리고 생각이 모여 완성되었다. 작가의 작품은 감생(感生)에 대한 여러 사람의 상상과 느낌이 모여서 감생(感生)이미지로 형상화된 공동창작물이다. 작품에 대한 관람객 개개인의 상상과 생각이 덧입혀지면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감생(感生) 이야기 창작과 이미지 형상화가 가능해진다. 관람객 개개인이 설화적 상상력을 펼쳐 작품을 감상하고, 자신만의 감생(感生)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보길 바란다. 설화는 향유하고 상상하는 사람의 것이니까. ■ 박현숙

임영주_그림자 붓다 shadow Buddha_캔버스에 유채_2013

르포작가의 음란한 종교화 ● 수수께끼는 매력적이다. 알쏭달쏭한 맛에 그렇다. 쉬이 질리거나 지레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황금균형은 마성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계속해서 그 앞에 머물도록 하는 힘. 임영주의 그림은 처음엔 그저 우리에게 편한 맘 잡숫고 오라오라 한다. 친숙하고 알만한 소재들이니 마음 놓고 다가서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메두사의 주술은 효력을 발생하고 스핑크스와의 게임은 시작된다. 중앙난방이라 이름 붙은 붉은 기둥그림, 쌓여진 방석들과 접신이 가능할 듯한 방, 귀가 여럿 달린 토끼나 서로 코가 뒤엉킨 코끼리그림 등, 친숙함과 낯설음이 뒤엉킨 작품들 앞에서 우리 몸은 순간 정지, 자동적으로 퀴즈를 풀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녀의 그림들 앞에 다가가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철저히 낚인거다.

임영주_명곡리 중앙난방 시스템 central heating system in Myeonggok-ri_ 캔버스에 유채_194×112cm_2014

사사로움의 위대함 ● 우리가 쉽게 저항할 수 없고 이끌려갈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작업이 갖는 사사로움의 위대함에 있다. '내가 직접 체험한 내 것' 이라는 '대체 불가능함'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 실제로 작업의 근간인 무속신앙, 감생설화(感生說話) 등은 작가가 성장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접한 다양한 종교들에서 기인한다. 무속이나 종교적 소재들은 삶이 작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에 겸허히 귀 기울인 결과일 뿐이다. 제 땅, 제 주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주제들에 관심을 갖게 됨은 물이 아래로 흐름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강력한 무기가 된다.

임영주_술술술 아파트 Sul Sul Sul APT_단채널 영상_00:05:00_2014

발로 뛰는 작가 ● 그녀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르포작가다. 전해들은 이야기를 체험하기 위해 현장을 찾는다. 어딘가에서 읽은 밑줄들은 그저 고마운 참조 (reference)가 될 뿐이다. '신목 시리즈'를 위해 예천과 원주로 간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 얽힌 이야기를 듣고, 오래오래 머물러 보고, 신목과 대화하며 그것들을 그려낸다. 또, '임신아파트'를 작업으로 꺼내놓기까지, 풍수지리박사님을 만나고, 동네주민들과 마을이장님도 만난다. '감생설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선, 지인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초대하여 하룻밤을 극진히 대접, 그렇게 얻어진 아랫목 얘기들을 적고, 그린다. 임작가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에서 시작된 1차원의 점을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들이 모인 3차원의 실재로 연결시키고, 그걸 다시 풍자와 메타포가 섞인 4차원적 그림우주로 완성시킨다.

임영주_三 in cartier red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4

우리시대 풍자화 ● '임신이 잘되는 아파트', '소원을 이뤄주는 나무', '성교 없이 수태가 가능하다는 감생'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실상, 오랜 세월 맹신해온 과학 이론도 한 순간에 뒤집히는 게 사실이니까. 직접 보고 느끼고 채집한 진정성 넘치는 과정들로 통해 탄생된 임작가의 작업들은 신심을 촉구하는 특정 종교화도, 토속적인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민속화도 아니다. 유머와 풍자가 골고루 섞인, 지금 우리의 모습일 뿐이다.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를 믿는다. 그 대상이 신이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말이다. 그녀가 포착한 것 역시 무속이나 종교 자체가 아닌 '믿는다는 행위'이다. 그리고 믿는다는 행위는 굉장히 성스러운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에 기반한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떠날 수 없다.

임영주_삼위일체 영롱한 소리를 듣는 방 a room for trinity holy sounds_ 스피커, 실크 천, 실크 방석, 반지, 프로젝터_가변설치_2014

거룩과 욕망의 사이_삼위일체 링 ● 설치와 그림 등으로 이뤄진「삼위일체」시리즈는 임작가가 관객을 상대로 한 제대로 사기극이다. 그걸 눈치채기 위해서 우리는 '삼인 까르띠에 레드'라는 제목을 눈여겨 봤어야 했다. 혹은 그녀가 집필해 놓은 우씨와 장씨의 사랑에 얽힌 삼위일체 링의 전설에 의혹을 품었어야 했다. 이 사기극 에 우리는 제대로 허를 찔린 셈이다. 실은 우씨가 까르띠에 창업주의 손자인 루이 까르띠에 (Louise Cartier)이며, 장씨는 루이의 친구이자 시인인 장 콕도(Jean Cocteau)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의 영롱한 반지는 루이 까르띠에가 장 콕도를 위해 선물한 반지를 전신으로 한 까르띠에 브랜드의 트리니티 시리즈 중 하나이다. ● 링을 흔들 때 무당방울소리인 요령소리 같은 것이 나는 점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사람들이 명품의 기에 눌려 그와 관련된 것들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그리고 명품구입 행위를 마치 성지순례를 마친 듯 떠드는 모습에 주목했다. 실제로 우리 설화처럼 각색된 얘기는 우리에게 큰 흥미나 절대적 신뢰를 주지 않는다. 이 선한 사기극은, 성스러워 보이는 믿음의 행위가 실은 속된 욕망에 기반한다는 것을 다시 정면에서 일깨워 준다. ● 통속적 믿음이란 게 과연 별도로 존재할까? 성과 속은 분리된 것일까? 거룩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빌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메시아는 인류의 죄를 모두 뒤집어 쓰고 죄의 덩어리가 됨으로써 가장 성스러운 미션을 완성했다. 그녀는 '음란한 믿음'이라는 용어를 통해 믿는다는 행위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다. 무속이라는 용어가 성과 속을 구분하면서 생겨난 유교주의적 사고라고 언급하면서도, 자신은 무속이라는 용어가 되려 친밀하다고 말한다. 통속적인 것이 참 좋다며 유쾌해 한다. 음란함과 속됨이 그냥 우리 자신인 거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본질에 관해 끝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때론 우리를 교란시키고, 대놓고 사기까지 치기 시작한 그녀에게서 과연 우리가 놓여날 수 있을런지... 아, 영원한 스핑크스의 승인가? ■ 김소원

Vol.20140408c | 임영주展 / IMYOUNGZOO / 林榮住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