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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219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5:30pm / 주말 휴관
경희대학교 미술관 KUMA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번지 Tel. +82.(0)2.961.0640 www.khuart.com art.khuart.com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에 붙여 - 1. 현실 ● 권순관의『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은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해석을 특정한 양상으로 제한하고 고정하는 힘을 변환시키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이는 공통감각의 지층을 인정하도록 억압하는 헤게모니의 잔혹한 이면을 들여다보고, 물신화된 인간적 가치들 속에 내재한 모순점을 발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속에 뿌리박혀 타성이 법칙으로 전환되는 모순과 부조리의 기만적 순간에 직면하여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환상의 모습으로 사고하기를 제안한다. 이 환상은 불현듯 생경하고 낯설게 등장하는 실재라는 점에서 그는 환상의 현실주의자다. ● 필자는 포트랜드 근교의 연구실에서 권순관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포트랜드에서는 드문 햇볕이 눈부셨던 이른 오후였어서 환상보다 더 환상같은 현실을 이야기하던 중 작가는 자신의 노트에서 의미체계의 허상을 발견했던 순간을 적은 글귀를 보여주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사물과 사건은 온 세상으로 분출하듯 터져나가는 울음을 사방에 퍼트린다. 이 울음 속에는 역설적인 의미의 명확함과 함께 수많은 의미들의 결합과 이완 그리고 잉여된 감정과 분자화된 언어의 낱말들이 섞여 있다. 이 울음의 모든 요소는 그 스스로 살아있으며 움직이고 잉태하며 창조한다. 나는 장면 속의 이 수많은 잉태된(?)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 (...) 환상은 외적인 상태가 내적등가물로 물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상은 물리적인 힘을 갖는다. 그때 나의 발작은 시작된다. 그것은 어떤 충동과 활동성 속에 필연적으로 들러붙은 삶의 근원과 관계한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혼탁한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이 견고한 것들의 나약함은 세계의 구성적 질서에 내장된 단단한 힘들에 필연적 구성 요소이다." (권순관) ● 그는 일종의 깨달음의 순간을 가졌던 것같다. 어떠한 사태가 일목요연한 양상으로 보여진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의 공간에서 첨예하게 우뚝 솟아 있는 응집된 끝들의 충돌, 수많은 견해의 교차 속에서 소산되는 가치와, 그것들이 분출하는 힘들의 쟁투, 선의 가치와 판별 등이 명징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맞닥뜨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목요연하다는 것은 가치들의 수많은 분자들이 복잡하게 얼기설기 섞여있는 수많은 줄기의 이합과 접합 속에서 우연히 한 순간에 충돌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뚜렷이 구별되고 내적으로 명확했던 개념들은 수많은 층위의 시간적 퇴적과 분류 속에 뿌리를 내린 줄기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공간을 가득 메울 때 다시 혼란 속에 빠지고 잠시 그 형태를 드러내었던 선명한 형상은 그 자취를 감춘다.
우리가 대상을 혹은 타자를 인지한다는 현상은 무엇일까? 사진가인 그의 입장에서 사고해 보자면 인지의 과정이란 찰나와 찰나 사이라는 보간(interpolation)을 엮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 있다. 자못 분명한 듯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저 여러 사물과 대상의 관계 속에 변화되는 연속적 한 시점의 찰나에 놓여있다. 우리의 육안에 비치는 형상은 하나이면서 수백만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햇살에 빛나며 출렁이는 견고한 수많은 이미지의 조각들이다. 시신경 안에서 이루어지던 겹침을 항구화하여 현재에 이르게 하는 환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보간의 이미지들을 엮는 과정에 적용되는 법칙을 가진다. 사물과 대상은 그 자체로 홀로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여러 층위에서 맞닿은 힘들의 관성과 전체상으로서의 구성 속에서만 활동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우리가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환상의 문법을 빌려 온다. 이들은 마치 눈 앞에 펼쳐지는 무대위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무희의 움직임과 우리 사이에 놓인 얇은 막과 같다. 환상을 끝없이 만들어가는 이 현실 세계에서 '대타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척이라도 해야하는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오로지 그 막에 투사된 형상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의식적으로 그 과정을 늦추어 본다면, 혹은 늘여본다면 영원의 시간처럼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문을 연다. 그는 그의 눈앞에 놓여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기에 두려운 수줍은 대상이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영원의 깊이를 갖는 무엇과 조우할 것이다.
2. 시각성의 변증법 ● 대상의 인지를 넘어서 사실을 판단한다는 것은 여러 다양한 구성요소들의 역할과 그 물리적 공간의 규정을 근거로 결론을 도출하는 총체적 과정이다. 사실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사실 자체이기 보다는 이것이 야기된 상태에 대한 감정이입에 근거한 재구성이다. 바로 이 때 우리가 사회적 현실로 인식하는 것의 상징적 구성이 사실로 둔갑한다. 사실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변수는 그 외부적 상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그 관계는 이데올로기와 패러다임이라는 이름 아래 작동한다. 분명하고 확고한 구성과 판단 속에는 언제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순을 파악하려면 어떻게 구성된 사실인가를 판단하는가 보다는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관해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칠 때 고정적 의미를 규정해 온 틀을 포착하고, 운동과 변화의 장에서 배제되는 '사실'을 관찰한다. 의미화의 차이를 발견하고 기존의 사건 구성 방식을 해체하며 모순을 들추어냈을 때 모순은 변증법적 과정에 도달하고 모순 자체의 구성은 파괴된다. 이러한 파괴는 '말소하에 두고' 추적 가능한 방식의 개발을 통해 항상 분열하는 지도를 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물들의 냉엄한 관찰과 지층들의 단층에 대한 세밀한 탐사를 통한 공간적 좌표 그리기를 통해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파악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틀 아래에서 선명한 힘들의 원리로서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로 질서 지워진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 때에 운동의 질서는 무너지고 사건은 환상이 되며 이 환상 속에서 사실이 갖는 모순의 확연한 형태가 드러난다. 그리고 현실로부터 배재되었던 잔여물은 정확히 그 분광적 환영의 실재 속으로 되돌아 온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권순관은 어떤 사실이 의미 있는 사건이 되기 위해 배치된 전략적 요충의 자리에 깃발을 꽂고 긴장한 채 웅크려 사태를 주시한다. 이 임시적 준거점은 상황의 여하에 따라 급격히 좌표를 이동하며 변화를 야기하는 핵심적 매개공간이기도 하다. 사건이 사건이게 하는 개별 구성요소들의 결속과 거리가 흩어지고 관습적인 의미의 구성이 무너질 때 음험하게 숨겨져 있던 모순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권순관은 특정 사건들이 '이념적 사건'으로 해석하게 하는 전체주의적 통일성을 그리고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지배적 권력의 통일성을 해체하는 그의 방법론이다.
3. 사진은 진실을 말하는가. ● 권순관의 실재를 향한 변증법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회의를 포함한다. 먼저,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표현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1902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를 주축으로 근대 사진의 회화적 표현에 반대하여 사진의 미학적 독자성을 주장했던 사진분리파(Photo Secession Group) 운동 이전까지 사진작가들 전반의 사고를 주도하는 관념이었다. 이미지의 재현성에 대한 믿음이 비교적 적었던 초기의 사진가들은 '사실'에 대한 접근의 한 방법으로 사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진적 재현에 기대어 대상이 내부에 감추고 있던 사실이 혹은 운동이 드러난다는 믿음은 어쩌면 애초부터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대상에 대한 사진적 묘사에 의한 탁월한 외시적 닮음의 효용성에 대한 자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오히려 너무 섬세한 묘사는 대상의 현실적 의미와 상황만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대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외부로 드러나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적 가치들은 그 어떤 매체적 으로 구성된 방식으로부터 열려 있는 그 어떤 기존의 매체적 강요로부터 자유스러운 방식으로 사진을 제작할 수 있었다. 단지 사진발명 이전의 지배적 재현방식이었던 회화적 방식과 시대적 소임으로써 리얼리즘적 재현방식에 포섭되어 있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나 그러한 이유로 다양한 방식의 시도에 대해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사진발명 초기의 사진들은 사진적 순수성을 내재적으로 담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진이 가진 기록으로서의 속성은 시대가 부여한 소명이라는 관념 아래 형식적 공간을 점하였다. 이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래 유럽에서 자리 잡은 세계의 재현방식과 일치하는 사진이 사실주의적이며 객관적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리얼리즘적 가치는 많은 경우 차라리 사진의 표현적인 가치를 중요시했던 사진의 역사의 일정부분보다도 더 표현적이었다고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아래에 제시될 사례들은 기록을 의도한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에서 그것이 포획한 재료를 통해서 우주적인 힘을, 그리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 하는 것으로서의 '표현'이라는 정의에 더 부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진발명 초기 이폴리트 바이야르의 자화상인「익사한 남자 Hippolyte Bayard. self-portrait 'The Drowned Man'. Direct positive 14x14.2cm, 1840」경우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위해 자신이 시체공시소에 진열된 익사한 남자를 연기한 연출된 사진이었다. 최초의 전쟁사진가였던 로저 펜턴(Roger Fenton) 또한 당시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관계로 전쟁이 연출된 장면을 촬영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나리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매체의 음험한 전략적 기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동시대 포토저널리즘의 실체를 그 최초의 로저 팬튼의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 (Julia Margaret Cameron)은 인물사진에서 초점을 빗나가게까지 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부유하는 숭고한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또한 기록을 통해서 외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믿음 마저도 그 내부자인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에 의해 부정되었다. 대상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본질에 다가설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다큐멘터리의 재현방식은 Robert Frank의 [The Americans]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적 서사의 영역으로 이동해 간다. 이제 그 어떤 누구도 사진가의 기록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어떤 진실에 대하여 확증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사진가 내부에 작동하는 여러 힘들의 기제들이 복잡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안다. 혹은 한 개인이 바라보는 외부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사진을 찍는 다는 행위는 사방으로 분출하던 세계를 평면의 세계로 고립되고 고착하는 행위이다. 앞서 증명하였듯이 세계를 평면의 세계로 고착하는 행위로서의 사진찍기는 표현의, 그리고 사적 서사의 영역으로 이동하였다는 맥락에서 사진의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 사회적 조건, 기표들 사이의 내적 관계는 그 사진작가의 인간적 가치와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사진가의 표현이나 사적 서사는 시대의 관습이나, 법칙,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진가는 실상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척도를 적용하여 사진이미지에 준거적 기표들을 포진하고, 이러한 물리적 형태 아래에서 각각의 지점 간의 성질과 교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이와 관련하여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는 한 때는 사람의 마음속에 음각된 영혼으로의 계시이자 권력의 중심으로서 존재했던 '빈 공간' 개념을 제시했었다. 빈 공간은 비옥한 영토였으며 찬란한 잉여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혁명적 불꽃의 전화와 숭고한 이성의 강렬한 단층화 속에서 이 공간은 '제국'의 철창에 갇히고 만다. 왕정과의 투쟁의 장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했던 근대의 혁명가들은 당시의 패러다임을 기초하는 힘, '에피스테메'를 조종해 빈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 체계의 중심부에서 이성의 이름으로 의기양양하게 우발성을 망각하게 하였다. 이제 이 '빈 공간'의 외부에 놓인 개인은 자신만의 방법들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없으며 주어진 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타율적 존재가 된다. 제국에 의한 이 '빈 공간'의 점령은 개인들로 하여금 환상을 걷어내고 진실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 ●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리고 세계의 질서와 분출하던 수 많은 의미들의 평면적 공간으로의 수렴된 사진은 이제 공허한 논리의 위계 위에 세워진 현혹의 허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이 기존의 사실 구성 방식으로부터 비롯되고 이를 통해 다른 배제된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리고 권력적 양식을 반영하는 외부적 현실의 모순점을 만나게 되는 우리는 사실에 대한 다른 수 없이 많을 수 있는 구상이 필요하다. 이 다른 수 많은 사실에 대한 구성은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공동선이다. 역사를 통해서 권력에 대하여 발발되는 관성적 작용들은 계속되어 왔다. 이들이 써온 평행역사는 아마도 이성이 저버렸던 우발성 속에서 생성되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정의를 열망하게 하는 집요한 희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푸코에게서는 광기의 이름으로 그리고 들뢰즈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선취 되어 고착되지 않은 모든 외부로부터 열린 상태에서 구근뿌리처럼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하고, '일관성의 평면(plane de consistence)' 에서 자유로이 탈주선을 그리는 것을 의미하리라. 만약 의미가 그래도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자리바꿈하거나 위장하고 성질을 변형시킴으로써 내용을 변화시킬 수 있으려면 어쩌면 우연과 찰나만이 진실을 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진실이란 그 자체의 사태 안에서 그 어떤 의심도 불허하는 절대적 수준의 고양이라기보다는 가장 낮은 단계의 현상적 작용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의 진실이 아니라 그 진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진은 흥미롭게도 사진이 찍히는 순간 작가의 주관적 현실의 양식은 파괴되고 양식의 양방향성은 상호모순까지 포함해서 가득 들어찬다. 이러한 현상적인 진실의 제시만이 논리의 굳어진 단단함 이전의 그 연약하고 아름다웠던 자유로운 수용의 진실이 아직 숨쉬던 그 순간에 지금 다시 귀 기울게 할 것이다. 그것이 권순관이 제시하는 찰나적 순간들이 가진 진실을 향한 잠재성이다.
4.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에서 권순관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확실해 보였던 실재의 공간을 밀어내고 '무한의 공간'을 만든다. 권순관의 작업은 르포르의 빈 공간에 대한 기존의 점령자와 벌이는 실재적인 판타지를 무기로하는 쟁투이다. 사건화를 특정한 양상으로 제한하고 고정하려는 힘을 갖는 양식의 지층을 변환시키고, 이미지를 분열적 사건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음험한 전략적 기도를 폭로하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의 여러 가치가 가진 힘의 운동과 관성을 관찰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아이러니의 지점들을 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상이한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덧코드화'(Overcording) 하는 것이다. 이때 정언적 상징들은 해체되는 방향으로 지양된다. ● 그가 벌이는 쟁투의 바탕에는 선에 대한 원초적인 규정성이 있다. 권순관은 선의 실재성을 질문하며 산에 오른다. 선의 실재성에 대한 구상은 시대의 그물 밖에 자유로이 노정하는 초경험적, 초역사적 작업이다. '빈 공간' 을 위한 권순관의 쟁투의 전략은 개인들로 하여금 환상을 걷어내고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폴리스'의 철망으로 둘러 싸인 이 공간 바깥의 관객이 환상같은 실재를 바라보도록 한다. 권력들은 구조화된 사회적 세력과 관련한다. 권력과 경쟁하면서 권순관은 각기 다른 선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답을 안고, 사회적 심급으로 구조화되거나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위계의 '장' 에서 투쟁한다. 위계는 상태의 그리고 조건의 다른 표현이다. 외적인 상태는 물화된 내적 등가물로 인해 가시화 된다는 전제 하에 권순관은 주관과 객관, 그리고 신체와 정신이 대립되기 이전의 야만적 사고의 상태로 회기하도록 촉구한다. 이 상태에서는 신체와 정신은 하나이며 외부와 내부는 하나와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다른 힘(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능동적 겹침의 상태이다. 이 겹침의 상태 속에서의 투쟁만이 정의로운 선으로 가는 전제조건이 된다.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은 역사적 공간을 찰나로 붕괴시켜 이야기의 완료를 미루는 모험이다. 권순관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파편적이고 무질서적인 정보들의 감각들(이 담겨진 환상처럼 보이는 사건들)이다. 서로 연관관계를 갖지 못하는 사건의 파편들은 이것을 관찰하고 있는 자에게 혹은 주모자에게로 와서 상황과 사건으로 구성된다. 사건은 이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사건의 위계를 결정짓고 판별함으로써 시작된다. 사건의 위계는 항상 사후에 벌어지는 일로서 그것의 판별기준은 관찰자(나)를 둘러싼 외부적 영향요소와의 충돌 속에서 나타난다. 즉, 사고는 비논리적이며 파편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이성은 그것의 위계를 재배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파간다, 영화, 소설 등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다시 만들어진다. 역사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야기이건, 혹은 사진작가의 주관이건, 혹은 우발적인 주변의 이야기가 포함된 이미지 컷이건, 혹은 지배 권력의 체제유지를 위한 합리화된 변명이건 허구는 만들어지게 된다. 그 이야기에는 언뜻언뜻 권순관도 보이고 지배권력도 보일 것이며 이 이야기를 쓰는 존재하지 않는 평론가의 목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허구일 뿐이고 다만 찰나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관객은 이성의 맞은편에 서서 찰나적 순간들이 가진 진실을 향한혼란의 결투를 벌일 잠재적인 기회를 갖게된다. ■ 데이비드 형섭 최 (교정_신현진)
Vol.20131219e | 권순관展 / KWONSUNKWAN / 權純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