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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306_금요일_05:00pm
성곡미술관 2009 내일의 작가展
관람료 / 대인 4,000원 / 소인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1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권순관의 살아있는 이미지 ● 권순관의 거대한 사진들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다. 사진의 포맷에 있어서 크기의 확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그것은 뒤셀도르프 학파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수법으로 사진을 단순한 기록문서나 르포르타주와 구분하는 효과를 노린다. 포맷의 확대는 사진을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전통적 사진 기술에서 벗어나 무용한 목적, 즉 갤러리나 박물관의 벽에 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최초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수많은 사진작가들은 작품을 기념비적인 크기로 확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순관도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 학파의 원조인 베혀 부부는 사라져가는 산업사회의 구조물들을 엄밀한 문서적 기법을 사용하여 중성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진이 기록이거나 문서이기를 거부했으며 사물의 흔적이 아닌 독자적인 이미지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예컨대 주체적 감성이나 느낌, 시간적 변화, 사건의 절정 등 소위 뜨거운 것들을 배제했으며, 순간적 의미를 품고 있는 장면의 포착과 주체적 표현 대신에 차갑고 엄밀하고 단단한 구성을 추구했다. 여기서 이미지는 다른 그 무엇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 사실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베혀 부부와 그 뒤를 이은 뒤셀도르프 학파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우발성과 사건성 대신에 엄밀하고 치밀한 구성과 인위성, 실재보다 더 실재인 가공의 실재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맷의 확장 역시, 사진 이미지를 단순한 미메시스가 아닌 예술적인 독자적 실체로 전환하는 효과를 내포한다.
이미지의 팽창은 그 독자성 외에도 예술적 효과 자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위의 뒤셀도르프 학파 중의 한 사람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토마스 루프가 즐겨 애용했던 수법이기도 하다. 토마스 루프는 저해상도의 필름을 고도로 확장시킴으로써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그는 9.11테러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나 잔해 현장을 확대함으로써 사진에서 특별한 사건을 다룬 기록의 냄새를 제거하였다. 확대된 이미지는 현실적인 도시 테러의 한 장면을 낭만적인 전쟁터의 한 장면으로, 과거 예술가들의 상상으로 묘사되어 나올 법한 장면으로, 마치 터너 풍경화의 한 장면처럼 바꿔놓았다. 이렇듯 토마스 루프는 우편엽서나 증명사진, 또는 각종 미디어에 실린 사진들을 실제의 유명 관광지나 실물,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프는 사진의 진정성이 유래하고 또 사진이 기록한다고 믿어지는 '여기 지금'의 생각을 버린다. 그와 함께 재현된 장소는 재현 속에서 사라지거나, 수없이 많은 유사한 사건들 또는 그 모습들의 그렇고 그런 성격 속으로 희석되어 사라지게 된다. 결국 그 장소는 소위 말하는 '이미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의 모방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실재적인 사실의 발생지로 만드는 작업은 권순관에게 중요한 작업인데, 그것은 이미지의 도구인 연출이라는 약간 다른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행해진다. 구르스키의 작업은 현대인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화가들이나 모더니스트 화가들에 의해 길들여진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절묘한 구성을 통해 도시 풍경 속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이 그린 장엄한 자연 풍경을 되살리고자 했고, 대성당의 내부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되살리고자 했다. 권순관의 이미지들 역시 상당부분 구르스키의 등가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베혀 학파의 다른 거장들은 시간의 지속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들과 사건들이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진 상태나 사건이 도래하기 직전의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팽팽한 긴장감을 유도하는 반면, 구르스키나 권순관의 작품에서는 인간들의 행위와 사건이 직접 연출되어 제시된다. 때로는 현장에서 군중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지만 권순관 사진의 대부분은 엄밀한 구성의 원칙에 따라 연출된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 중에 어떤 것은 고전적인 종교화나 풍속화를, 어떤 것은 모더니스트적인 추상화를, 또 어떤 것은 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또 다른 어떤 것은 스포츠 중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권순관은 자신의 이미지들이 엄밀한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인물들의 다소 부자연스러운 동작은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임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여기서 권순관을 사진 예술가가 아닌 퍼포먼스 작가로 분류하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미술사에서 퍼포먼스와 사진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개념 미술이나 퍼포먼스와 함께 미술은 탈물질화되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한 미술들은 사진을 자신들의 증거물로 삼았다. 사진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 미술의 흔적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미술의 물질적인 부산물이나 찌꺼기에 불과하였고, 그런 만큼 사진은 기술적 의도적인 면에서 엄청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사진을 예술적 재료로 삼은 예술가들에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 구성은 오직 사진을 위해서 존재하고, 선택되며, 사진의 예술적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폐기된다. 이제 사진은 어떤 것의 흔적이 아니라 사물과 사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순관의 사진 이미지들은 매끈하고 깔끔하게 치워진 시원한 장들 위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의 전 감각에 호소하는 강력한 빛과 현란한 색채의 유희 속에서 이미지들은 개념적, 시각적 유희를 동시에 제공한다. 그러나 기화하여 중심 없이 날아갈듯 한 색채와 빛의 유희들은 그 강화된 표면성과 함께 더 내밀한 표면성을 보충한다. 특히 그의 거대한 포맷은 사소한 모티브들을 거대한 크기로 만들면서 화면의 모든 위계를 제거한다. 지평선과 소실점을 제거하고, 생생한 현장을 한 눈에 들어오게 포착함으로써 이미지를 깊이가 없는 평면성 속에 가둔다. 위계적 질서 없이 평면적으로 나열된 이미지들, 반복, 중심의 부재, 주변과 변두리의 등가는 관객의 시선을 공허 속에서 떠돌게 한다. 평면적인 이미지 뒤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시선을 고정시키는 중심점도 없다. 이미지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거나 아예 가치가 없어 보이며, 오직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변하며 존재 의의를 찾는다. 여기서는 전반적으로 어떤 공허가 지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 내에서 위계가 부재하듯이, 각각의 스펙터클 사이에도 위계가 없다. 그 모든 장면들은 그 평범한 일상성 속에서, 또는 완벽히 연출된 인위성 속에서 모두 등가물들이다. 오늘의 모든 사건과 스펙터클이 강력한 인위에 불과하듯이, 그러한 사건들을 본 딴 다양한 각각의 순간들은 그저 그런 인간들이나 잡다한 사건들을 조합하고 나열하여 묘사되고, 모든 거북스런 우발성이나 불규칙성은 은밀히 제거된다. 매끈하고 흠 없는, 숨 막히게 투명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거대한 기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무심하고 공허한 행위를 반복한다.
엄청난 장비와 대형 카메라, 조명, 세트, 배우의 선정과 연출까지 집요한 작가적 노동력을 요하는 권순관의 사진은 공허한 우리의 현실을 단단한 이미지의 실체성으로 그려낸다. ■ 이수균
Vol.20090309c | 권순관展 / KWONSUNKWAN / 權純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