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의 안과 밖

이웅배展 / LEEUNGBAI / 李雄培 / sculpture   2013_1214 ▶ 2014_0330

이웅배_공동체_스틸_29×79×28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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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경기도_경기문화재단_경기도미술관_경기창작센터

관람료 성인_4,000원(단체_2,000원) / 미취학 아동(48개월 이상)_1,000원 학생,군인,청소년_2,000원(학생단체_1,000원) 경기도민 50% 할인, 7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와 그 배우자, 인솔교사 1인 무료 * 단체_20인 이상

관람시간 / 10:00am~06:00pm / 둘째,넷째 월요일 휴관 *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경기도미술관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36(초지동 667-1번지) Tel. +82.31.481.7007~9 www.gmoma.or.kr

금-속 놀이, 금속의 안과 밖 ● 빨강, 파랑, 노랑 등 다채로운 색채로 칠해진 작가 이웅배의 조각작품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다채롭게 채색되어 율동적이며 유동적인 작품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밝은 겉모습 안에 숨겨진 강력한 금속들이 갖고 있는 '내포'의 의미이다. 금속은 거대하고 육중한 존재로서, 그 자체가 엄격하고 딱딱함이 숨겨진 조형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이러한 작품은 시기적으로 몇 가지 조형적인 특성을 갖고 전개되어 온다. 그의 초기 작품은 「사흘 후」(1998)로부터 시작한다. 그 후, 금속 배관을 용접으로 이어간 작업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수직의 변화 시기 (2002년까지)가 있으며, 2005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곡선의 변화 시기가 있다. 이 작업은 다시 응축적인 조형이나 자유로운 곡선의 변화 등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 제2회 개인전부터 산업용 금속 파이프, 배관을 이용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 무렵부터 작품 속 배관은 금속의 색을 간직하면서 산업적인 제품으로서의 의미가 그대로 있었다. 2005년 이후 현재 작품의 컬러링이 다채롭게 전개되면서, 그 배관은 색 밑으로 숨어든다. 파이프가 작품에 사용되었다라는 점에서 그 정황적 의미는 남아있게 된다. 즉, 작품은 순수한 추상적 형태를 갖지만 '배관'이라는 물질 때문에 실체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는 순수주의적 추상의 양식을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정황적인 의미를 갖는(정황적인 의미는 현재 미술의 매우 중요한 조형적 특성이다. 그 예를 앙드레 까데레(André Cadere)로 살필 수 있다. 까데레는 색 띠 모양의 긴 막대기를 만들어 이것을 늘 가지고 다녔는데 그가 휴대했던 막대기는 작품이라는 정황, 막대기라는 정황을 둘 다 의미하게 되었다. 만약 다른 사람의 개인전에 그가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면, 그 순간 공동의 전시가 이뤄지게 된다. 이 때 작품은 추상적, 독립적 자율성보다 현실의 실제적이고 상황적인 의미들을 포함하게 된다.) 추상이다.

이웅배_공동체_스틸_47×74×43cm_2013
이웅배_공동체_스틸_20×48×19cm_2013

이 정황에 더하여 작가는 '놀이'라는 새로운 정황을 포함시킨다. 2006년 쌈지에서의 개인전을 시점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작품을 선회한다. 그 때, 작품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매달리고 끌어안고 노는 모습을 보며 작가는 새로운 작품의 의미, '접촉'만이 아니라 놀이의 공간으로서의 의미들로 적극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가 이야기하듯이 온 몸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사실 만지기 접촉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면서도 자아와 타자간의 관계를 여는 과정이다(레비나스). 2008년에는 다양한 색상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고, 「공동체」(2008)와 같이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게 되었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가늘게 형태에 변화를 주어 섬세한 의미들을 획득하게 한다. 그 후, 2009년 계상초등학교에서는 본격적으로 놀이의 공간에 공공적인 작품으로서의 의미, 조각의 의미들로 바뀌게 된다. ● 이러한 특징은 2010년도에는 이천 국제조각심포지움과 2012년 포항스틸아트 페스티벌 등의 전시를 통해 더 다양한 곡선을 응축시키거나 펼쳐 놓는 형태로 전개된다. 그 결과, 율동의 놀이를 만들어내고 리듬은 내면적인 생산의 공간(Marcel Jousse)이 된다. 다양한 리듬으로 연출되는 선율은 때로는 길게 메아리 치는 것이 자유롭게 분출되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 형상을 통해 자유로운 입체 드로잉을 연출한다(2010년 포항스틸아트전). 그러한 점에서 관람객의 놀이만이 아니라 곡선의 놀이, 펼치고 늘리는 놀이에서의 형태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무한대의 시각체험을 허락한다. 이것을 '관람'의 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놀이는 정해진 규칙과 개념을 넘어서게 한다. 놀이는 현재 진행적인 행위로 전개된다. 이 놀이는 움직이는 시각 속에서 무한대로 관점(aspect)(작가의 무한대로 제시하는 보기놀이는 마치 비트겐스타인의 '용례'를 생각하게 하며, 보기에 따른 의미의 다양화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고유한 개념에 앞서서, 지속적으로 용례에 따라 변화되는 의미를 갖는다.)을 열어놓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사용 용례(Usage)처럼, 변화되는 의미들을 제시한다. 이는 의미를 넘어서 시각적 개념과 시각적인 놀이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관람객과 조각 사이의 무한히 열린 특성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작품에 변화하는 개념만 있고 고유성과 본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개념을 주제로 취한다. 빈 공간을 감싸는 볼륨은 다양한 변수를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본질의 의미를 취한다. 즉, 변화할 수 없는 본질과 방임적인 변화, 차갑고 딱딱한 금속과 부드럽고 따뜻한 것의 대립, 열림과 닫힘의 모순들이 공유되는 창조의 놀이를 맛보게 한다.

이웅배_공동체_스틸_가변설치_2013
이웅배_공동체_스틸_22×66×22cm_2013
이웅배_공동체_스틸_29×36×31cm_2013

타자와의 한 몸 ● 그는 거리를 두고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조각"의 의미를 반성한다. 작품에서는 "만짐"과 "놀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와 표현 방식으로 제시되는데 금속 파이프가 가질 수 없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원재료를 거역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산업적인 금속의 의미와 달리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색으로 다시 태어나 작품은 인간을 만지고 인간은 작품을 만지며, 관람객이 즐기는 작품으로 변화된다. 그럼으로써, 모더니즘 예술의 의미를 바꾼다. 모더니즘 시대까지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서나 아니면 사람 사이에서의 '타자'의 의미는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적대적인 의미를 버리고 '하나'됨을 꿈꾸며 공동체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다름의 층위들, 다수의 요소들이 '코이노니아' (koinonia,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는 함께 빵을 나누고 삶을 함께 하는 모임(공동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함께 친교하며, 교제하는 것, 섬기기, 공유, 관계, 교통, 동반자, 하나의 몸으로 여러 다른 사람이 연합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라는 개념으로 모일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초기부터 현재까지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공동체"라는 의미이다. 이 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열린 개체라는 특성 때문에 자칫, 리좀과 연관되기도 한다. 그러나 리좀은 아니다. 무정부적이고 완전히 무한으로 옮겨가는 무기체로서의 리좀과는 다르게, 그 체계들이 열려있으면서도 중심을 갖는 거대한 유기체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중심을 가지면서, 그 중심의 지체(肢體)로 참여하는 몸의 의미를 갖는다. 그 뜻은 그러한 측면에서 매우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영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이 연결은 '다른 부분'(autre)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타자(autre)는 이분법안에서 자아와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한 몸으로 연결된 지체인 것이다. 이는 이분법을 해체하기보다 개방하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타자의 개념을 작가는 만지기나 접촉, 공간, 또는 용접 등을 통해서 다양한 개방적인 연결을 갖고 있다. 작가는 레비나스의 생각처럼 타자를 자아의 적대적 관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아가, 하나의 공동체처럼 각자 거대한 신체의 일부분으로 '지체'라는 의식을 갖는다. 배관이 서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사이의 공간은 배관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형성된다. 이러한 작품과 작품 사이의 공간은 2010년 이후, 공동체 시리즈에서 특히 돋보인다. 하나의 공간을 장악하는 리드미컬한 선은 공간을 꿈틀거리듯 움직여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선들은 바로 외부의 공간을 가로 지르고 있어 그 선이 빈 공간과 함께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의 중요한 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많은 공간을 유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이는 단순하게 볼륨과 볼륨 사이만이 아니라, 하나로 공동체를 이루는 다양한 개인들, 다양한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다. 그의 연결은 우선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배관이라는 물질들의 연결이며,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배관 안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연결'이다. 이 연결은 비어 있음으로 형성되는 단 '하나의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은 말 그대로 '하나됨'을 통해 공동체의 본질적인 의미를 형성화시킨다. 다시 말하면 이 하나의 공간 (중앙의 빈 공간)은 물질적으로 공동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공동의 몸이며 타자간의 공동의 공간(空-間)이다. 그래서 이 배관을 연결, 접합하는 것은 하나의 공동의 몸, 즉 공동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데 적합한 소재이다. 그러한 점에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존재하여 타자와 자아의 이분법을 열어놓는 존재론을 매우 실체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작품이다. 즉, 자아와 타자의 현존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을 형성시키기 적합한 물질이다. 그러나 작품의 겉은 물질성을 가지면서도 속은 비어있어 이중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빈 공간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것은 실제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현실'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보이지 않기에, 오감에서 비현실적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물질적인 것과 그 속에 물질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체화된다. 그래서 작품의 배관은 비가시적인 세계, 초월의 세계를 상징하는 빈 공간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이는 매우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세계이고 이성과 논리의 세계이다. 이러한 것은 이성적이고 경험적이면서도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믿음이나 예언과도 같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웅배_공동체_스테인리스 스틸_250×300×200cm_2013

다시 그의 붙이기의 조형성으로 돌아오면, '붙이기'는 공간적인 증식이기는 하지만 존재적인 '수'의 증식은 아니다. 하나의 존재 안에 다종 다양한 것이 연결되고 확산되는 더하기이다. 그가 조형적인 층위에서의 덧붙이는 것은 결국 '하나'의 공간이다. 그 형태들은 특히, 초기 작품에서 다양하게 다른 배관 금속을 연결하여 새로운 볼륨(volume)을 만든다. 이는 양감을 갖는 볼륨(volume)이다.(볼륨은 여기서 라틴어의 볼류멘(volumen)이기도 하다. 이는 두루마리(volumen)를 의미하는데 공간 속에 이리 저리 감거나 펼치는 조형성(volume explicare)을 나타낸다. 즉, 작품은 두루마리 책을 펼쳐놓듯 이야기들을 펴내가는 것이다. 또한 읽기 위해 글자들의 묶음을 펼쳐놓는 것 같은 의미 (evolvere volumen epistularum)이기도 하다. 작품 안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선은 그의 응축과 펼침의 운동 속에서 양감을 형성한다. 작품 「공동체」(2012)처럼, 이것은 곧 양감이면서도 때로는 자유롭게 공간을 드로잉하는 선과 같다.) 그의 작품은 빈 공간을 감싸는 볼륨으로 코이노니아적 공간을 통해 변화하지 않는 중심을 만들면서도, 그것을 바라 보는 시각에서는 무한대로 개방된 다양화와 용례의 의미를 주고 있다. 이러한 다양화와 본질은 작품의 정황성과 고유성, 놀이와 엄격함, 빈 공간과 고체의 금속공간 등의 조화로운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배관을 쌓아가며 만들어내는 뛰어난 조형성은 분명, 놀이와 변화를 통해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고,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의 작품은 인간을 위하며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진리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 강태성

Vol.20131215b | 이웅배展 / LEEUNGBAI / 李雄培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