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125b | 이주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121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토요일_10:00am~05: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플래닛 GALLERY PLANET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1번지 웅암빌딩 2층 Tel. +82.2.540.4853 www.galleryplanet.co.kr
1. 무대 ● 막도 없고 무대도 없고 관객도 없지만, 어떤 미술은 극적으로 구성된다. 작품 속 대상의 구성이 고유의 시간성과 공간성으로 드러날 때, 작품 속 배경은 무대가 된다. 그 공간 어딘가에는 작가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는 인식으로, 나는 행동한다는 경험으로, 나는 느낀다는 감각으로, 작가는 그 '곳'에 존재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가의 시선에 노출되고 포획된, 그리하여 작가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어떤 사물과 사건만이 작품으로 압인된다. 대개 작가라는 존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가는 세상에 분노하는 자라서, 그가 깊이 있게 성찰하는 사물과 사건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쓸모없을 가능성이 크다. 작가의 시선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작품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서 지레 겁을 먹거나 미리 기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주은의 작품 속 사물처럼 작고 소소한 것들의 조합일지도 모른다.
2. 조각 ● 이주은의 그림 같은 사진 혹은 그림 같은 입체 작업은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삽백육십오 일 우리 곁에 무심히 놓여 있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봉인한 것이다. 대팻밥과 톱밥먼지가 가득한 목공소에서 가져온 사물을 자신의 선반에 놓아두고, 그 선반을 카메라의 앵글에 담고, 레진과 아크릴, 목탄을 더해 미술로 종결시키는 그의 작업은 작가의 고백처럼 어떤 '결(Grain)'이 느껴진다. 세월의 속살을 간직한 나무에게서 삶의 어떤 흐름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의 작업의 계통을 헤아리기에 뭔가 부족하다. 이주은의 작업은 어려운 말을 사용해 미술을 설명하는, 요사이 유행하는 방식과 거리를 둔 까닭에 어떤 이지적인 단어로 압축할 수 없어서 난감한 것도 사실이다. 겉모습만으로는 정물에 관한 작업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속 사물의 기호에는 드넓은 세상을 자신만의 소실점으로 바라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다. ● 이때 작품 속 단정한 사물은 작가가 주밀하게 분해하고 쪼갠 세상의 조각들이다. 사물을 호명하는 현존재라는 자격으로 세상의 존재자들을 용도와 기능으로 구분하고, 그것이 갖는 존재 이유를 탈각시키는 인간에 의해 소외된 사물에 눈을 맞추겠다는 작가의 연민이 그 조각들을 일상의 '틈'으로 가져다 놓는다. 작가는 무릇 그래야 한다. 세상의 전부를 우악스럽게 집어넣겠다는 작가를 나는 믿지 않는다. 세계의 극히 작은 일부에 눈길을 두고, 비좁은 공간에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종국에 사라짐을 감내하는 작가를 믿기로 했다. 기능을 잃어버린 사물,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사물, 일상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호흡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하나의 '풍경'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이주은과 같은 작가에 믿음이 간다. 미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편의 작품이 다루는 세계는 그렇듯 작고 내밀해야 한다. 사소해짐을 각오하는 자, 그 의미 없음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자에게 작가라는 이름을 헌정해야 한다.
3. 흔적 ●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의 작품에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여러 개의 구역과 문이 있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작가에 나포된 대상(들)이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나갔는지, 어느 구역에 자리했는지 살피는 행위다. 그 문을 찾지 못하고, 그 자리를 점유하지 못한 자는 작품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다행스럽게도 문고리를 손에 쥐거나 공간에 초대받은 자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행운 혹은 축복은 많은 시간을 소진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곳에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자가 미리 정해진 것도 아니다. 그 문은 필경 좁은 문이요, 그 자리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곳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작품의 바깥이라고 맹신했던 곳이 내부일 수도 있고, 안과 밖의 경계가 오히려 드넓게 펼쳐진 경우도 있다. 때론 그것조차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미술을 바라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와 작품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응시하고 대하고 잠입하고자 하는 감상자가 어떤 움직임을 반복하느냐에 있다. 그 움직임이 차례로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일이 작품에 어떤 느낌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느낌을 포개어 놓는 것이 미술이요, 그 공간이 미술관이다. 그 움직임을 쉬이 포기하는 자가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시켜 마지막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소수만이 감상을 완료하게 된다.
4. 사랑 ●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자신을 슬프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 이주은도 사랑에 울고 웃는 작가다. 작품 속 대상을 가리켜, 그는 '너'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날의 기억으로부터 여태 놓여나지 못하는 추억이 둘 사이를 지탱해주는 것이리라. 그 기억 속에 포개어 있는 시간이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그 떠오른 상황이 어떤 무대를 만들게 했다는 것을, 이주은의 작업은 정직하게 고백한다. 감상자로서 확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그 '너'와의 관계 속에 과거라는 이름으로 회상되는 지난 시간이 들어 있고, 서로를 괴롭히는 애증으로 뒤얽힌 현재의 시간이 관통하며,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미래의 이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작가의 생에 아로새겨진 흉터라도 되는 듯 아파하며 간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의 말이 옳았다.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과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주은의 선택이 옳았다. 작품을 통해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감히 나라고 믿어지지 않는 낯선 나로부터 도망친 지난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예술은 그런 것이다.
5. 침묵 ● 사람들은 작가에게 늘 이렇게 묻는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너는 누구냐고,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너는 무엇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면 좋으련만 대다수의 작가는 그렇지 못해서 난감해한다.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바라보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아파하는 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어절로 이루어진 단어 앞에서도 묻는 자와 답하는 자는 동상이몽을 꾸기 마련이다. 오직 드러남을 목적으로 삼는 묻는 자가 사라짐을 감내하는 답하는 자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지만, 다행히 소수의 누군가는 사라짐으로써 생성되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간파함으로써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세상의 목적으로부터 더 이상 쓸모없다고,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고 선고받은 사물에 최소한의 가능한 것을 생겨나게 하는 이주은과 같은 작가를 우리가 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 들뢰즈의 말이 옳았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라고,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라고. 이는 사물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어서, 우리라는 이름의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는 사물을 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길 때, 더 이상 가능한 것이 증발된 이주은과 같은 작가는 그 피로함을 넘어 일상 속 사물의 '소진됨'을 느낀다. 피로 혹은 쓸모없음의 너머에서, 다시 한 번 가능성을 궁구한다. 이주은의 작품 속 사물의 배열과 놓여짐을 보라. 인간이 이지적으로 매긴 순서와의 미화에서 철저히 벗어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한 조합을 통해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기술. 세상에 통용되는 욕구와 선호, 목적, 의미로부터의 자유로움. 사물이라는 하나의 언어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소진됨으로써 생기는 또 하나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메타언어로 말하기. 이주은은 그 침묵을 아는 작가이다. 아무것도 아닌 '무'로부터 생성의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진된' 사물을 조합하는 작가이다. ■ 윤동희
Vol.20131212c | 이주은展 / LEEJUEUN / 李周殷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