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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129_금요일_06:00pm
기획 / 박서정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목요일 휴관
갤러리 소머리국밥 GallerySOBAB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 69번지 Tel. +82.31.774.4147 www.gallerysobab.com
'비평적 극장 Ⅲ' - 오브제에 관한 소고 ● 조새미의 다섯번째 개인전이 '비평적 극장 Ⅲ'이란 제목 아래 열린다. 2009년 도구와 삶의 관계성을 공예의 노동성으로 접근했던 '비평적 극장 I'에서 출발하여, 사람과 오브제의 역학적인 관계를 퍼포먼스라는 연극적 요소를 끌어들여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자 했던 2012년 '비평적 극장 II'에 이은 것이다. '비평적 극장' 연작의 그 세 번째인 이번 전시에서 그는 금속공예가로서 질료에 대한 기술적 표현의 완성도를 전복시키고 공예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 그는 금속공예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기물을 제작하는 일에 몰입하기도 하고 '비평적 극장'이라는 화두를 통해 공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꾸준하게 탐구해 왔다. 작가가 이번에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오브제의 문제를 자신의 관심사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공예 장르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공예 장르의 관심사를 훨씬 뛰어넘어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논쟁의 한 가운데로 진입하고 있다. 알다시피 현대공예가 걸어온 길은 현대미술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작가가 이러한 과제를 설정하는 것은 특히 우리 공예계 현실에서는 그리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사물성에 던지는 낯선 질문 ● 양수역 근처에 위치한 창고형 갤러리 소머리국밥 전시장에 들어서면, 지극히 산업적 생산물이라 할 수 있는 은색의 알루미늄 호일의 금속 물질로 싸여있는 그의 여러 시도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애초에 플라스틱, 나무판 등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상의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물질로 이들을 감싸는(wrapping) 행위를 통하여, 본래 오브제가 가지고 있던 재료적 성질들이 가려진 채, 작품들은 여기 저기 바닥에 놓이기도 하고 천장에 매달리는가 하면 벽에 붙여져 있다. 그래서 사물이 지닌 용도, 현실적인 중량감, 텍스쳐, 색채 등이 증발된 듯이 보인다. ● 예컨대, 산업적 복제품인 마네킹의 머리, 몸통, 다리 등 절단된 신체의 형상들이 일정한 질서 속에 일렬로 반복되거나 원환을 그리며 배치되는가 하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버려진 의자, 유아용 풀의 비닐 튜브 등이 애초의 실용적 가치를 무산시키며 콜라쥬나 아상블라쥬 형식으로 재구성된다. 이질적인 낯선 사물들이 결합되어 탄생한 새로운 오브제들은 은색의 포장으로 자신 고유의 사물성을 잃어버리거나 감금당한 채 우리의 사물관에 질문을 던져온다.
비물질화한 사물들과 인간 사이, 교차하는 욕망 ● 이러한 조새미의 작업들은 때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오브제 논의를 하나하나 소환하여 검토하는 듯하다. 벽에 반복적으로 연이어 부착된 마네킹 다리들은 분명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작품을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받침대가 없는 의자의 기능적인 장애와 무질서한 배치를 보여주는 「자리 001(Chair 001)」, 「자리 002(Chair 002)」는 페르난데즈 아르망의 집적(accumulation)의 수사법이나 아상블라쥬를 활용한 마텐 바의 폐품을 활용한 가구디자인을 환기시킨다. 그 밖에 어린이용 동물모형들을 작은 무대의 프레임 안에 배치한 「谷無虎先生兎(곡무호선생토)」, 유아용 튜브 풀 안에 마네킹 다리들을 거꾸로 박아놓은 「다리(Legs)」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기보다는 초현실주의 사물관을 떠 올리게 한다. 이렇게 산업 생산물인 마네킹과 주변사물들이 충돌하여 만들어내는 다이얼로그는 우리가 삶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겪는 상황을 풍자해 놓은 듯하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성, 혹은 용도를 바꾸는 모든 발견"이라고 「초현실주의 혁명」창간호(1924)에서 밝히고 있듯이, 「도르래(Pulley)」, 「샌드백으로서의 나(Self portrait as a sandbag)」, 「대천사(Angels)」, 「두 개의 기둥(Two pillars)」, 「가서 죽고 가서 살고(Go and die, go and live)」에서 등장하는 머리와 몸통부분 마네킹의 반복적 집합은 본래의 산업적 용도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와 달리 조새미는 이들을 도르래, 샌드백, 기둥 등의 도구적 역할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조립하고 있다.
오브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조새미의 개인전 '비평적 극장 Ⅲ'의 새로움은 이에 덧붙여 마임이스트 김종학의 퍼포먼스에 의해 더 두드러진다. 신체에 부착된 카메라의 시선과 은색 마스크를 착용하여 표정을 알 수 없는 퍼포머의 얼굴이 고정된 프레임 내에서 오브제가 주변적 타자로 조명된다. 마치 오브제가 신체를 대상화하여 신체의 심리적 상태에 개입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전시장에 설치된 이러한 사물들은 그와 조응하여 펼쳐진 퍼포먼스에 의해 이제 오브제를 욕망하던 주체인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의 대상인 오브제에 의해 감시되고 포박당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읽힌다. 신체에 부착된 스마트폰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은색 마스크를 착용하여 표정을 알 수 없는 퍼포머의 상호반응에서 우리는 인간과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충돌과 낯설음들을 만나게 된다. 비물질화된 각종 사물들, 그런 점에서 비대상이기도 한 사물들을 욕망하는 인간이 사물들에 의해 거부되는 가운데 '비평적 극장 Ⅲ'에서는 이들 사이에 교차되는 대상 본질이 지녔던 가치에 대한 욕구가 아닌 사회적인 욕망, 권력에 대한 냉소적인 내러티브가 꿈틀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관조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무가치성'을 통한 진품성의 '아우라의 파괴'의 현장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맺으며 ● 이렇듯이 조새미는 도구와 신체의 관계가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보여 주었던 과거 전시에서 한 단계를 뛰어넘어, '비평적 극장 III' 전시에서는 사물의 총체적인 관계를 현실과 가상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사례는 특히 「은주전자 세트(Silver tea set)」같이 장식적 요소가 누려왔던 과거의 영광에 아직까지도 의지하고 있는 은식기의 공예를 꼬집으며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가상의 오브제로 탈바꾸어 공예가 대상의 물질적 기술을 영웅적으로 대하는 부분을 현대미술과 비교시켜 보여주는 데서 확인된다. ● 갤러리 소머리국밥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공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이다 정지한 듯한 오브제들의 배치는 작가 조새미의 실험적 변신을 위한 최적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 동안 작가의 사용언어였던 도구, 상품, 공예, 디자인, 페티쉬, 연극 등의 요소들은 또 다시 등장하지만 은처럼 보이는 은색 사물들과 그에 내재된 주체성을 기반으로 관람객과 대상의 새로운 관계설정이라는 그의 시도는 지금까지의 작업들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가능케 한다. ●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던지게 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사물에 대해 현대공예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것은 현대미술이 화두로 삼아온 것과 무엇이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미술의 화두와 공예적 화두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하게 그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것 같은 긴장으로 다가서는 조새미의 작품전은 그 해답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여정이다. ■ 윤소림
Vol.20131129i | 조새미展 / CHOSAEMI / 趙새미 / installation.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