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패 위에 흐르는 역사와 현실

김병택展 / KIMBYOUNGTAEG / 金秉澤 / painting   2013_1114 ▶ 2013_1126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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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3_1114 ▶ 2013_1120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 GWANGJ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동구 동구 금남로 231 2층 Tel. +82.62.613.5382 www.artmuse.gwangju.go.kr

2013_1120 ▶ 2013_1126 관람시간 / 09:30am~06:30pm

갤러리 GMA GALLERY GMA 서울 종로구 율곡로 1(사간동 126-3번지) 2층 Tel. +82.2.725.0040 www.artmuse.gwangju.go.kr

카드 패 위에 흐르는 역사와 현실 ● 김병택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실주의와 현실주의는 다르다. 사실주의가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에 천착한 형식적이고 방법적인 측면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면, 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천적 참여와 같은 작업에 대한 창작주체의 입장과 태도 쪽에 방점이 찍힌다. 그림을 어떻게 보고, 또한 왜 그리는가 하는 이유와 당위성이 창작의 계기며 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런 사실주의와 현실주의가 각각 날실과 씨실이 돼 하나로 직조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여기에 일말의 상징주의가 직조된 천위를 수놓는 장식이며 패턴처럼 부가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 그렇게 직조된 그림을 보면 대개 보통사람들의 비루한 삶의 면면을 때로는 담담하게 그리고 더러는 격정적으로 기록한 일련의 사실적인 그림들과 황토 시리즈, 일련의 붉은 그림들과 근작에서의 트럼프 카드를 소재로 한 슬픈 에이스 시리즈로 연이어진다. 이 그림들 각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고 볼 수가 있겠고, 사실주의와 현실주의 그리고 상징주의가 그렇게 통하게 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 면면을 보면,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은 여타의 소재들이 있지만, 그 중 찌그러진 양은냄비 그림으로 함축될 수 있을 것 같다. 찌그러진, 때가 꼬질꼬질 묻은 양은냄비처럼 비루하지만 소중한 삶을 껴안는 작가의 애정이 묻어난다. 여기서 찌그러진 냄비의 주름 속에 내려앉은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상처 내지 상처의식을 내재화한 삶의 연륜이며 경륜이 만들어준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연륜이며 경륜이 일련의 황토 시리즈로 승화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건강한 삶을 생성시키고 유지시켜준 땅의 생명력이며, 그 생명이 키워낸 땅(아님 대지)의 자식들이며 후예들의 현실인식을 증언해준다. 그리고 일련의 붉은 그림 시리즈에서 작가는 일종의 기억의 역사 내지 기억된 역사를 그린다. 황토 시리즈에서 대지에 스며든 땅의 기억을 계승하고 변주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3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3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3

여기서 역사란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리고 부엉이 바위를 말한다. 작가는 이 역사적 사실이며 현장을 흑색의 모노톤으로 그리고 그 표면을 붉은 단색으로 덮었다. 여기서 붉은 색은 현실 내지 실재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종의 베일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한 애도를 의미하며, 그 역사적 현실이 핏빛 기억으로 물들여져 있음을 말해준다. 마치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처럼 아련히 떠오르는 잊힌 실재(자크 라캉은 허약한 현실의 틈새로 출몰한 실재계의 출현이 현실을 위협한다고 했다)며 잊히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것 같다. ● 작가는 이처럼 찌그러진 양은냄비와 땅의 생명력 그리고 기억된 역사를 경유해 슬픈 에이스에 이른다. 보통 에이스라고 하면 유리한 카드 패를 말하고, 이로부터 유래한 의미로서 모든 분야에서 출중한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왜 슬픈 에이스일까. 에이스는 왜 슬플까. 찌그러진 양은냄비와 같은 삶이며 강인하지만 척박한 땅 그리고 핏빛으로 물든 역사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슬프다. ● 여기서 작가는 삶이란, 삶의 역사란 다름 아닌 이전투구의 역사라고 보고, 선남선녀들이 한판 승부를 벌이는 암중모색과 권력과 암투의 역사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트럼프 카드를 소재로서 도입해 이런 역사적 현실이며 현장을 펼쳐 보인다. 트럼프 카드의 패는 상징보다는 도상(상징의 한 갈래이면서도 상징과는 다른)에 가깝다. 상징이 어느 정도 열린 의미며 해석을 아우르고 있다면, 주로 종교와 관련한 중세 아이콘에서 보듯 도상에서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한정적이고 결정적이다.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고, 의미를 한정하는 단점이 있다.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충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며 감각의 문제다.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 80.3cm_2013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3

그 경우에 차이가 있지만, 트럼프 카드는 화투처럼, 체스처럼, 장기와 바둑처럼 세계의 축소판이다. 유리한 패를 현명하게 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다. 삶의 기술이고 권력의 기술이고 도박의 기술이다. 유리한 패가 결정적이란 점에서 운과도 관련이 깊다. 잘 하면 세상을 거머쥘 수 있지만, 여차하면 쪽박을 찰 수도 있다. 그렇게 삶은 삶에 올인할 것을 요구해오는, 매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벌하고 위태롭다. 모처럼의 운이란 그 판 위에서의 막간에 지나지 않는다. 삶에 대한 태도가 공격적이고 시니컬한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삶에 올인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한번 뿐인 삶을 한번 살다 간다는 것이 삶에 올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압축의 강도가 다를 뿐, 모든 사람은 올인하는 삶을 산다. 궤변이랄 수도 있겠지만, 생각의 차이가 삶의 질을 만들고, 그 차이에 관한한 개인의 문제며 몫으로 남는다. ● 그렇게 작가는 그 판을 전개해 보이고, 축소된 세계의 장을 펼쳐 보인다. 이를테면 삽질 공화국과 4대강 프로젝트, 소위 어린이 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아이콘 미키마우스, 피겨의 여왕과 국민 여동생, 유튜브와 1인 미디어 시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재확인시켜준 가수 싸이, 팝의 황제 앤디 워홀과 만인의 연인 마릴린 몬로, 팝 아티스트 리히텐슈타인이 그린 눈물 그림과 삼성 비자금 사건, 벤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와 알카에다, 딴지일보와 나꼼수, 언론과 미디어, 촛불 정국과 쌍용사태, 현대중공업 사태와 크레인 시위, 그리고 여기에 알만한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한 시대와 영욕을 같이 했던 인사들이며 사건들을 카드 패 위에 올려놓는다. ● 이해관계가 한데 얽혀있는 인사며 사건을 라이벌이나 짝패로 대비시켜 그 명과 암이 또렷하게 부각되게 했다. 대개는 그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지만, 더러 서양의 문장처럼 유관한 의미를 그림 속에 숨겨놓기도 했다. 그렇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국내문제를 다룬 것이고, 국외의 경우에도 국내문제와 연동된 경우를 아우른다. 국내 정국을 비롯한 세계정세의 판도며 지형도를 그려 보인다는 점에서, 한 시대를 관통해 흐르는 메인스트림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한 시대를 재현하고 해석한다는 거대담론의 프로젝트에 의해 견인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애와 증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초상화를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김병택_Ace of sor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3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남다른데, 특정 계층의 특정 경험에서 미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보통 경험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 삶의 질을 향상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어쩌면 타고난 자질?) 자체를 미학의 계기로 보는 것. 그런가하면 피에르 부르디외의 미학은 상징투쟁과 인정투쟁으로 모아진다. 저마다의 상징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며 투쟁이 미학이고 예술이다. 어디 예술뿐이랴. 삶이 그렇고 정치가 그렇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 ● 작가의 그림은 이런 보편미학에 그리고 상징투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의 인문학적 배경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정석으로 알려진 게오르그 루카치의 예술에 대한 입장을 보탤 수가 있겠다. ● 특히 작가의 그림은 한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반영이론), 한 시대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총체성 이론), 그리고 한 시대의 전형적인 국면을 반영한다는 점에서(전형이론) 마치 루카치의 미학을 그림으로 해제한 교과서를 보는 것 같다. 그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예술가는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전언이 들려올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트럼프 카드 패 위에 한 시대를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었다. 그 카드 패로부터 역사의 외침이 들리고 잊힌 기억이 되살아나는가. ■ 고충환

Vol.20131126i | 김병택展 / KIMBYOUNGTAEG / 金秉澤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