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진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까

구명선展 / KUMYUNGSEON / 具明宣 / painting   2013_1112 ▶ 2013_1203 / 월요일 휴관

구명선_여러 개의 진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까_종이에 연필_100×56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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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1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여러 개의 진실중 어느것을 말해야 할까"…그녀는 앉아 있는 그루터기 위에 손을 놓았다. 그러자 마모되어 꺼칠꺼칠한 목재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무는 비와 고독에 바래졌는지 고색창연했다 (하지만 잘려지고 찍혀진 죽은 나무, 불을 지피려고 해도, 판자로 만들려 해도, 연인들의 사랑의 벤치가 되는 것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 이상으로 고독하고 슬픈것이 있을까.).' 이 나무와의 접촉이 그녀에게 일종의 우아한 기분, 애정을 불러 일으켜서 자신도 모르게 놀랍게도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프랑소와즈 사강, 『고독한 연못』) ● 2008년 첫 번째 개인전 『복수할 거야』를 시작으로 구명선의 개인전 제목들은 단호했는데, 이번 4회 개인전 전시 제목부터는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배경이 생략된 화면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구명선의 여자들은 각자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개성을 갖고 있다. 그녀들의 매력은 '복수할 거야', '돈 좀 있어?', '이건 멍미',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 '내가 걷는게 걷는게 아냐'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증폭된다. 이 제목들은 대부분 시대상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유행어 혹은 유행가 가사에서 따온 것들이다. 평소 구명선은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 그녀에게 인상을 준 글을 빼곡히 적어 놓고 그림이 완성되면 이 노트들을 꼼꼼히 살피며 골랐다. 그러니 그녀가 선택한 이번 전시 제목도 어떤 내재적 필연성에 의해서 그녀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구명선은 어릴 적 즐겨 보았던 순정만화의 인물 양식을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여 뾰족한 턱, 가냘픈 몸으로 이상화된 여성스러움과 비현실적인 반짝임을 자신의 고유한 화법으로 만들었다. 한때 한국과 일본의 미대 입시에서 치러지던 연필 데생으로 만화 속 여자들을 현실로 불러낸 구명선의 소묘 작품은 등장과 함께 빠르게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첫 개인전이 있던 2008년 가을, 처음 열린 아시아프 Asiaf prize 를 수상하기까지 했다. 이후로 2010년 중앙미술대전 작가로 선정되고 크고 작은 전시들에 꾸준히 참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지만, 이번 개인전까지는 최대한 전시를 자제하며 숨을 고르듯이 조용히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태원에 위치한 수도원의 작은 기도실을 닮은 폭이 2m가 안 되는 작업실에서 작가가 연필과 종이, 지우개같이 소박하고 단출한 재료로 몰입과 회의를 반복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에게 수도자의 기도를 연상시켰다. 이제 스스로 원한 고독의 시간을 보낸 구명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진실을 보려는 것과 같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실은 회상이라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다중의 화음을 만들어내고, 그녀의 손은 이 리듬과 이 진실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한다.

구명선_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_종이에 연필_51×37cm_2013
구명선_아마 늦은 여름밤이었을 거야_종이에 연필_108×87cm_2013

심리적 초상화들 ● 1906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가들의 뮤즈이자 유럽의 유명 극장에서 주목받던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에서 엘레오노라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어두운 배경과 모호한 얼굴 형태 속에서 또렷이 빛나는 눈동자로 한 층 더 강조된다. 곧이어 그린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인 Woman's Head with Beauty Spot'(1907)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비정상적으로 큰 눈을 가진 여인을 그렸는데, 화면을 꽉 채운 두상에서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은 도전적으로 관람객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불안하게 흔들린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구명선의 작업에서 비현실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이 빛들에 대해 질문 한 적이 없다. 순정만화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되는 빛의 파편을 클리셰 Cliché 로 사용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Timaos 에서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가장 먼저 만든 기관이 '눈'이라고 말한다. 여러 감각기관 중에서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관념과 외부의 실체를 연결하는 눈은 그 안에 존재하는 부드러운 빛 Phōs 이 같은 성질을 가지지만 외부에 존재하는 불 Pyr 을 만나면서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눈에서 나온 빛과 외부의 불이 만나게 되는 순간 '불의 광선'이 형성되면서 실재 세계의 사물은 관념 이미지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구명선의 그림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여자들의 눈동자 속에 풍경 속에 빛나고 있는 반짝임. 나의 눈이 이 빛들에 이르는 순간, 나는 이 반짝거림에 시선을 고정 한 체 내 눈앞에 있는 이미지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그림 속 여자들의 마음과 어두운 밤 풍경의 정서가 내 안에서 또 다른 하나의 관념이 되는 순간이다.

구명선_울음이 터지기 직전_종이에 연필_88×69cm_2013
구명선_착각의 축제_종이에 연필_100×85cm_2013

눈의 산책 ● 2회 개인전 『낭만에 대하여』에서 선보였던 '멋진 신세계'와 '눈을 잃어버린 화가'라는 두 그림은 눈의 생물학적 한계를 기술로 뛰어넘는 망원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여자들을 그린 것이다. 먼저 '멋진 신세계' 속 앳돼 보이는 소녀의 손에 들린 망원경 렌즈에는 반짝이는 빛들이 맺혀있다. 야무지게 다문 입은 시선의 대상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표명한다. 욕망을 감추지 않는 소녀는 흐릿한 형체로 그려졌지만, 렌즈에 맺힌 빛은 또렷하기 그지없다. 이보다 좀 더 큰 크기로 그려진 '눈을 잃어버린 화가' 속 민소매 티를 입고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망원경을 눈을 바짝 갖다 댄 채 무언가를 놀란 듯 보고 있다. 잡지,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황홀한 시각 이미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경험이 부재'하는 세대의 화가가 느끼는 심정이랄까. 3번째 개인전 『추억은 꺼내는 게 아냐』에서 일련의 소묘작품과 떨어져 설치돼 있던 작품 '나는 아직 눈이 여려요'는 '마음이 여리다'라는 관용구에서 마음을 눈으로 대치한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드는 이 그림에서 반짝임은 눈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내면에서 빛나고 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어슴푸레한 빛을 보고 있노라면 이 여인의 얼굴이 하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내면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어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비어있는 눈망울. 눈은 어디로 간것일까. 눈이 기계로 대치되는 도상은 구명선의 첫 번째 개인전부터 등장한다. '잊지 않아'에서 소녀의 눈은 그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자리에 두 개의 검은 구멍이있을 뿐이다. 눈의 기능은 손에 들린 사진기로 대체된다. 눈에 맺힌 상은 눈을 감는 순간 사라진다. 사건도 시간 속에서 사라지기는 마찮가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기억 역시 시간과 함께 잊혀진다. 그러나 파기되지 않는 한 사진은 시간도, 기억도 뛰어넘는것이다. 자신의 눈을 사진기처럼 작동시키고자 하는 구명선의 아웃 포커스out focus 로 그려진 몇몇 소묘는 초점을 맞추지 못한, 즉 적정한 거리 맞추기에 실패한 사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된 모호함으로 완벽하지 못한 시각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기억의 한계를 환기하기 위한 장치이다.

구명선_당신의 눈빛은 참 섬세해_종이에 연필_90×85cm_2013

여러 개의 진실 중 무엇을 이야기 할까 : 하찮은 것에 대하여 ● 구명선은 자신의 그림이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물을 화면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 혹은 사건에 대한 이 관념들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라고 덧붙인다. 실제 그녀는 자신의 소묘를 흰 벽에 연필로 상처를 내듯 긁어내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관념들을 드러내 보이게 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관념을 시각화하는 것. ● 2008년 데뷔 이후, 이 시대 모든 젊은 작가들처럼 다양한 이유로 인해 끊임 없이 '작업을 계속 할 지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졌던 구명선은 잠시 자신을 둘러보기로 한다. 작업의 주제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서 떨어져 나온 관념을 이미지들로 만들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하찮은 것'들, 자신의 고요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설렘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이 만들다가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들, 바로 그 감정적인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고요한 새벽, 알 수 없는 미지의 감각들이 자신 안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기록한 '아마 어느 여름밤이었을 거야'를 시작으로 이제 구명선은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 화면에 등장하게 되고 심연의 고요함을 사려 깊은 눈으로 응시하게 된다. 시간과 함께 퇴색된 감정들을 갑자기 현재의 고통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기도 하고, 감정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뒤 담배 한 개비를 추억으로 피우기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마음을 가진 실체로, 이미지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심연의 평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리듬과 함께 빠르게 혹은 느리게 서서히 채워지는 화면에서 밝음은 지워진 어둠이며, 인물과 풍경은 작가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로 얽혀진 이미지다. 이처럼 자신의 관념을 구현해 내는 과정은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다양한 언어와 기호가 뒤섞여 쓰인 글처럼, 구명선의 그림 속에서 그녀의 기억은 겹쳐지고 또다시 겹쳐져 어느새 가장 진실한 이야기 중 하나가 된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것을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애수와 고통, 후회와 미련 그리고 불 가능태로서의 현재를 증오하게 하고 자신을 그 기억 속에 고립시키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일을 망각하는 것을 쉽게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섬세하고 불완전한 사랑의 감정들을 묘사하는데 뛰어났던 프랑수와즈 사강의 단편소설 중 하나인 『고독한 연못』에서는 만족스러운 삶을 소유한 한 여자가 갑자기 어떠한 감각의 경험을 통해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체험한다. 소설 속 여인은 낯선 연못에서 느낀 이 실존의 고독함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파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연못의 풍경은 그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남겨졌다. 길었던 고독의 시간 동안 연필의 흑연으로 반짝이는 손을 갖게 된 구명선. 그녀의 시간은 이번 전시에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강한 흡인력을 가진 그림들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그녀가 여러 개의 진실을 보았던 고독한 연못에 선 우리로부터. ■ 박기현

구명선_사라지지 말아요_종이에 연필_100×70cm_2013

여러 개의 진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까? ● 그녀는 가방에 꼭 필요한 것만 챙겨 넣기로 했다. 자존심 한 벌과 여분의 자기애 그리고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자신감 등등. 가방은 여행이 끝난 후에 담길 것들의 여유와 무겁다면 흔쾌히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애착으로 담겨졌다. 그녀가 집을 나서자 공허함이 발밑에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 흐린 얼굴을 하고 있는 존재가 그녀에게 다가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어느 흑백사진 저 멀리에 있는 듯 흐린 얼굴을 가진 남자. 그는 짧은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요리는 맛이 있지만 재료는 썩 좋지 않군.' 미식가인 그녀는 그의 요리를 보며 취향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그녀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처음에 너무 조금 따라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부탁했다 '이건 너무 모자라요.' 그가 다시 물을 따라주었을 때 물이 넘쳐버렸다. '난 한잔이 필요해요. 내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의 한잔이요. 찰랑이는 소리가 들리게끔 그러나 넘치면 부담스러워요.' 그는 이해 할 수 없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 묘한 공기를 마시기로 했다. 그녀의 외로움이 두려운 얼굴을 하고 그림자가 되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걸을 때마다 그녀의 옷이 계절처럼 바뀌었다. 그녀의 여름에 진지함의 코트는 너무 더웠고 그녀의 성숙한 가을에 어린 오버롤 팬츠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겨울에 입었던 예쁘기 만한 원피스는 그녀를 더욱 춥게 했다. 모두에게 어울리는 봄과 같은 옷도 때론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외로움은 그녀를 계속 걷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고 그때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기억하였다. '음……. 마음에 맞는 옷을 입으니 나다워 보이네.' 그녀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외로움에 설렘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자 설렘은 그녀에게 자존감을 선물해 주었다. 어느 마을 입구 앞에 서있었다. 마을의 깊은 밤 속엔 차분하고 겸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고 어둡고 모호하지만 따뜻한 영기품고 있었다. 숲속이 있었고 호수가 있었고 별빛을 담은 건물들이 있고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있었다. 진심이 가득한 아름다운 마을이 그녀는 맘에 들었다. ● 광장에 들어섰을 때 마을에 착각의 폭죽이 황홀하게 터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외의 모든 사랑이 가짜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착각하길 축복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얼굴을 하고 중년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어린 불안감과 늙은 소신을 담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이 궁금해진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 마을이 너무 궁금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니? 그럼 나도 소중한 걸 너에게 보여줄게"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너에게 지름길을 알려줄게. 그곳에 가려면 사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왠지 모르게 너에게 끌려."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그의 가슴에 도착했다. 그녀는 소중하게 숨겨두었던 열정이라는 보석을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그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아름다웠지만 지나친 반짝임에 그의 눈은 곧 피곤해졌다. 그녀는 실망했다. '넌 너무 냉소적이야. 넌 왜 나만큼 열정적이지 않아?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녀는 그의 늙은 소신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실망한 그녀는 뒤돌아 빠르게 지름길을 달려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고 처음처럼 반기지도 배웅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내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함정에 빠져 눈이 쌓인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하늘에 구름은 무거웠고 공기는 가득히 차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으며 슬프고 여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미련에 오랫동안 허탈함의 산을 산책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어둠이 익숙해지자 멀리서 봤을 때 강직하고 답답해보이던 산속에 작은 나무, 바위, 돌,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차가운 눈을 밟았을 때 그가 느꼈을 외로움을,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에 그의 분노를,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그의 아픔을, 안개가 진하게 쌓였을 때 그의 불안함을. 오랫동안 그에게서 자라온 경험의 나무와 신념으로 굳어진 바위를 이해하자 그녀는 이내 다름을 깨닫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가 빠졌던 함정은 상처받은 자존심이 만들어낸 그녀 자신의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먼 산위에서 다시 광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너무 멀어 그의 윤곽밖에 볼 수 없었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바라봐주지 않았을지 모를 그의 반짝이던 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같은 열정을 버리고 믿음이라는 소박한 조약돌을 주워 그녀의 가방에 소중하게 넣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만큼 우리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더 깊이 가보는 거야. 심장으로 들어가 보겠어.' 그녀가 그의 심장을 살짝 열어보았을 때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 그곳은 그저 그렇게 두어야 할 곳이었다.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의 심장을 들춰보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직감했다. 진심으로 위한다면 열어보지 말아야할 공간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래. 발로 가보는 거야. 가슴도 머리도 심장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 어쩌면 좀 더 멀리 있는 발로 가는 게 낫겠어.' 그녀는 그가 가는 곳을 같이 따라가 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가는 곳이 새롭고 신비했다. 그러나 곧 그의 선택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대심이 그의 발 앞에 한 발짝 앞서 가기 시작하자 그것을 눈치 챈 그의 발걸음이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기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사랑 법이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그의 발걸음에 그녀의 마음은 불만으로 차올랐다. '난 그를 배려했는데 그는 왜 나만큼 배려해주지 않지? 내가 준 관심만큼 그는 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역시 그는 날 사랑하지 않나?' 그때 그녀는 자신의 가방에 넣어두었던 믿음을 다시 꺼내보았다. '발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그녀는 그의 발에서 그녀의 기대심을 가지고 나왔다. 그랬더니 그는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 여행이 끝난 그녀의 가방은 아름다운 푸른 멍이 들어있고 달콤한 눈물이 가득 차있었다. 지친 그녀가 가방을 땅에 내려놓자 그곳은 깊은 심연의 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기꺼이 푸른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람 같은 파도가 그녀를 덮치고 폭염 같은 숨이 그녀의 목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몸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가슴에 깊음이 가득차자 그녀는 그 어느 곳 보다 숨쉬기 편함을 느꼈다. 기억은 이미 그녀에게 체화되었고 추억은 그녀 자신이 되었다. 푸름은 깊을수록 아름다웠다. ■ 구명선

Vol.20131112g | 구명선展 / KUMYUNGSEON / 具明宣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