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관찰하기 searthing wall

이명아展 / LEEMYOUNGA / 李明娥 / painting   2013_1030 ▶ 2013_1105

이명아_환풍구1 vent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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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57th 갤러리 57th GALLERY 서울 종로구 송현동 57번지 Tel. +82.2.733.2657 www.57gallery.co.kr

이명아는 내면의 공간에서 나왔다. 그녀의 내면은 출구 없는 지하 건축물들의 세계였다. 그 건축물 속에서의 이동은 이상한 폐쇄회로 속을 방황하는 경험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더욱 깊은 지하로 들어서게 되고 창을 열면 어둠이 쏟아져 들어오는 세계. 이정표도 목적지도 없이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하고 들어서거나 나가야 하는 공간. 심지어 누가 이동하는지조차 불분명하여 주체 없는 몸의 쾌락이 공포의 얼굴을 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공간. 어떤 명분도 없는 영웅이 까닭 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는 공간. 그것은 정확히 이미 현실의 엄혹함을 눈치 채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어떻게든 현실과의 대면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주체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녀의 내면이 재현된 그림에는 서로 모순되는 양가적인 정서가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편에 어둠과 공포가 있다면 또 한 편에는 신화적인 향수가 있었다. 그 곳은 무언가를 놓아버려야만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포기해야 할 것은 언제나 아갈마 같이 빛나게 마련이며 이미 지불한 대가는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물 그 자체로 승격되기 마련이다. ● 그녀는 거기서 나왔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내면의 지하에서 지상의 현실로 빠져나오는 출구를 발견한 것일까? 파이프 그림들은 그녀의 은밀한 통로들이었을까? 그녀는 지금 거리로 나와 이 세계를 관찰하고 있다. 세계는 주관적인 내면의 공간이 아니다. 세계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주체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것이 객관적인 한 세계는 그것을 대하고 있는 주체들의 세계이다.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이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현존하는 세계가 주체의 삶과 함께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은 그 만큼 더 구상성과 내러티브를 획득했다.

이명아_검은 표시판 black sign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3
이명아_터널 tunnel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3

그녀는 이제 이 거리의 뒷골목에 있다. 도시의 전면이 매끈한 피부의 화장한 얼굴, 나아가 도시의 정체를 표현하는 패션으로 치장한 겉모습이라면, 뒷골목은 도시의 맨살이 드러나는 장소, 나아가 생성 중인 유기체의 근육과 힘줄 그리고 실핏줄들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가려져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장소, 그 얼굴 표정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의 일말의 진실이 노출되는 순간, 화려한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비루한 삶의 흔적들이 얼룩처럼 묻어있는 퇴락한 풍경.... 그녀의 세계는 거리의 뒷골목이다. ● 그녀는 뒷골목에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우선 오브제들의 스케일, 즉 그것들이 관찰된 거리를 보자. 그녀의 그림은 서너 점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상들과 심리적 동일시가 가능한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대상들이 존재하는 공간적 맥락은 겨우 드러난다. 이러한 거리 때문에 그림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강조되는 것은 대상들의 지적 관념이 아니라 감각적인 정서이다. 오브제 혹은 풍경들은 주체의 외부에 객관적인 관찰대상으로 소외되어 있지 않으며 마치 직관적으로 포착된 주체의 내면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직도 내면을 배회하는 것일까? 유의해야 할 점은 작가의 심리를 재현하는 대상들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대상들은 주체의 내면적 심리에 흡수되어 있지 않고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자신을 주장하고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다른 작품들에 비해 뚜렷한 구상성을 보이는 서너 점의 작품들은 마치 영화의 마스터쇼트처럼 공간의 맥락을 제시함으로써 이런 주장에 근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건물 전면이 기하학적인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쇠한 기관지를 연상시키는 풍화되고 녹슨 거대한 환풍 시설은 건물의 뒤편으로 배치되어야 했다. 다세대 주택의 좁은 뒤꼍에는 폐타이어가 방만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다. 어두운 뒷골목의 조악한 입간판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용도를 증명한다.

이명아_벽1 wall1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3

이처럼 대상은 정서적으로 오염되어 있으면서도 주관성 속으로 흡수되지 않고 객관적 현실의 맥락 안에서 자신의 대상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이 기도하는 것은 주체의 상상적인 내면을 상징적 심급에 등록하는 것이다. 이명아의 그림에서 내기를 거는 모험은 내면적 심리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혹은 주관에 상징적 보편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상적 현실이 주장하는 객관성을 모두 다 수용할 수는 없다는 고집이다. 봉합된 현실의 실밥이 너덜너덜 드러나는 장소인 뒷골목이야말로 이런 고집을 부리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닌가? 이명아의 그림 속 현실은 객관적 권위가 실추되어 있다. ● 현실의 권위가 격하되자 그 권위에 의해 버려지거나 묵살된 것들이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한다. 보도 블럭 위에 떨어진 작은 돌덩어리, 깨진 작은 창유리, 어느 나무에선가 잘려 나와 거리를 뒹구는 나뭇가지, 다 떨어져 버려진 소파, 폐타이어, 고무대야의 뚜껑, 닳아버린 중앙 분리선, 아무런 맥락 없이 도로 한 복판을 차지하고 놓여 있는 육면체, 폐자재들... 버려지고 망각되어 입이 지워진 것들은 그녀의 그림에서 중심을 차지하거나 화면 전체를 점유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대상들에게 말하는 자의 위치를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그림은 몫 없는 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감춰지거나 버려진 것들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누추하고 허름한 것들에게 귀 기울이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실천은 오만한 시혜나 감상적인 자선이 아니다. 정서적인 차원에서 그 대상들은 바로 그녀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몫 없는 것들에게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사하여 몫 업는 그녀 자신의 욕망을 발화하도록 만든다. 그녀의 오브제들은 절박하며 뜨겁고 맹렬하다. 나아가 말을 갖기 시작한 오브제들은 자신들의 말들이 분명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다른' 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그림들에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이중인화 되어 있다. 감상자는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그림을 쪼개 둘로 만들고 이를 다시 겹쳐 보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명아_나뭇가지 twig_캔버스에 유채_27.3×40.9cm_2013
이명아_갈라진 틈 cracked gap_캔버스에 유채_24.2×33.4cm_2013

이를 위해 먼저 그녀가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는 벽들을 보자. 벽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벽은 이쪽과 저쪽 혹은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해 인간의 진로를 막아선다. 벽의 의지, 즉 공간을 자르려는 의도가 분명할수록 벽은 단단하고 육중하며 두껍고 또 높다. 그 물리적인 힘으로 드러나는 벽의 의지는 인간의 돌파력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 벽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정서는 절망이다. 벽이 자신의 의지로서 표현하고 이 표현을 마주한 인간의 정서를 통해 드러나는 메시지는 이 너머를 생각하지 말고 거기 주저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벽은 단순한 벽창호가 아니다. 벽은 보기보다 간교하다. 벽이 단지 인간의 시야와 진로만을 막고 거기 버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벽은 유혹한다. 벽은 거기 있으면서 이편과 저편을 나눔으로써 인간에게 '너머'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벽 저편에 대한 환상이 매혹적일수록 이편의 세계는 지루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벽이 절망에 더해 바치기를 요구하는 정서는 권태와 우울이다. ● 얼핏 볼 때 이명아의 그림은 이러한 벽의 위력에 감염된 듯 절망스럽고 우울해 보인다. 벽은 어떤 면에서 자본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 세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울과 절망이라는 정서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주체의 속성 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울은 우리 시대의 실상을 회피하지 않는 주체의 현실적인 존재 방식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이 곧 무기력은 아니다. 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우울하지만 무기력하지는 않다. 그녀는 벽을 섬세하게 바라보며 벽의 진상을 파악한다. 벽들은 대개 마치 헤겔처럼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라고 주장하듯이 자체의 위엄으로 필연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명아의 벽은 그렇지 않다. 벽의 현실성이 필연적인가를 묻는 작가의 시선에 벽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벽의 현실성은 이제 풍화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현실성의 시효를 밝히기 위해 벽이라는 평면에 집요하게 붓을 갖다 대는 작가의 집요한 시도를 보라. 대개 낡고 초라한 벽들은 균열을 드러내며 스스로 자신의 깔끔한 기하학적 구도를 무너뜨리며 내부로부터 자신의 한계를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무상성(memento mori!)에 관한 주장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무상한 것은 그것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사유하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명아_깨진 창2,3_캔버스에 유채_48.4×66.8cm_2013

몫 없는 주체는 자신의 몫을 박탈한 현실성의 시효를 물음으로써 그 필연성을 박탈하고 말없이 존재하던 것들에게 발언대를 제공함으로써 그것들이 현실적인 것이 되는 다른 시기, 다른 공간을 열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벽의 균열 그 자체, 어둠이 배어나오는 틈으로서 자신을 표상한다. 터널 그림은 바로 이 틈 자체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터널 속의 조명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다. 이 터널은 통로가 아니라 한 세계의 우연성을 표상하는 무이며 다른 세계의 필연성을 배출하는 입이요, 새로운 현실성의 발언대이다. 그것이 반드시 둥근 형태의 구멍일 필요는 없다. 작가는 거의 흑백의 사선으로 표현된 환기창에서도 웅성거리는 어둠을 본다. 골목 끝에서 마주친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 찬 허물어진 건물이 작가를 그토록 매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장소는 그녀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녀의 꿈을 언표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직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것들에 관해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다. 균열된 틈에서 흰 색의 물질이 흘러나와 벽을 오염시킨 상황을 재현하는 그림은 거의 아우성이다. ● 이명아의 그림은 말 없는 말,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이제 내면의 밀어가 아니다. 이미 말하고 있으나 아직 현실적이지 않은 말들은 아직 초라하고 습하고 우울하다. 그만큼 두렵고 위험한 것들이기도 하다. ■ 정혁현

Vol.20131030i | 이명아展 / LEEMYOUNGA / 李明娥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