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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01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긍정의 역설 ● 1990년대 일요일 저녁 인기를 얻었던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양심과 가전 제품 사이에 어떤 인과성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주 최고의 양심을 지닌 사람에게 드라마틱한 시상식이 벌어지고 시청자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양심에 뜨거운 눈물과 박수를 보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는 규율에 길들여지는 18세기 군인의 예를 들은 바 있다. 가장 '군인다움'을 강조하는 이 규율은 개인의 신체를 복종시키고 군인다움의 정신이 신체를 통해 현현될 수 있다고 교육한다.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규범에 의해 조정되는 신체를 『인간-기계』론을 펼친 라 메티르La Mettrie)를 참조한다. "『인간-기계』는 정신의 유물론적 환원인 동시에, 훈육에 관한 일반 이론이기도 한데,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석 가능한 신체에 조작 가능한 신체를 결부시키는, '순종'(docility)이라는 개념이다." 과연 인간의 양심이 규율에 의해 훈육된 신체와 행동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것일까? 푸코에 따르면 어느 사회에서나 개인의 신체는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망 속에 구속되어 왔다고 말한다. 이 같이 권력이 지배하는 개인의 신체에 관한 의견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신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의 신체는 진정 내 것인가 아니면 지배 권력에 속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권력의 지배 아래 놓인 신체의 운명이 옛날 이야기일까? 수잔 손탁은 질병과 질서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권력의 지배 원리를 비유한 바 있다. 그녀에 따르면 "질병은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임으로, 치료의 목적은 정상적인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에서는 원칙적으로 늘 낙관적인 결과가 예상되기 마련이다. 사회의 정의에 따르자면 결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대는 비약적인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미래를 찬란히 밝힐 뿐만 아니라 머지 않아 유토피아의 세계가 열릴 것이라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더욱 치밀하고 정교하게 권력의 통제를 받는 게 현실이다. 과거와 큰 차이는 하나의 지배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고 다종다양한 권력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인의 삶과 생각에 침투해 쉴 틈 없이 더 나은 삶, 더 강한 신체, 더 긍정적인 미래를 설파한다. 동시대인을 위한 덕목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끊임 없이 애인,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이웃, 광고 포스터, 상점, 음식, 의복, 주거, 교육, 성, 의학, 법, 종교, 미디어 등을 통해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서로 공격한다. 오늘날 건강, 다이어트, 패션, 이데올로기, 직장, 학교, 주거지(장소), 언어는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덕목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소하지만 결국은 거대한 상품이 되었고 이러한 덕목은 오늘날 대기업을 유지 발전시키는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우리의 신체는 타인과 시선을 나누고 촉감을 느끼며 맛을 즐기고 함께 무언의 대화를 하는 대신 비물질적인 문자 메시지와 TV의 요리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현란한 수사 그리고 영혼 없는 포르노그래피로 실체 없는 교환을 한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슈퍼마켓 일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살균제(sanitizer)로 보이지 않는 안전막을 드리운다. 아마도 1990년대 한국이 추구했던 양심은 보다 발전된 현대인의 모범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 말의 양심은 공공질서로 제한되었지만 21세기의 양심은 아름다움,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 건강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정신'이란 의미로 확대되었다.
박지훈의 『근심 많은 사람들의 음료』는 자기 계발의 미혹의 통제에 구속된 현대인의 몸과 마을을 비유한다. 그의 작업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자연인과 문화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전적 고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다양한 매체와 질료를 사용해 풍자, 은유, 그리고 전유와 재전유를 통해 시각화, 물질화 하는데, 이전의 개인전 『The Flasher』(2004) 에서는 다소 직설적일 만큼 우스꽝스럽게 자신을 비하하면서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모습을 풍자했다. 작업 속에서 작가는 (시대착오적인) 남자로 길들여진 자신과 그 길들여진 남자를 타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동시에 드러냈는데 이러한 접근은 관람자에게 연민과 조소와 같은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을 유도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One Day, One Deal」(2009)에서는 하루 동안 수집된 일간지의 보도 사진들의 일부를 도려내어 한데 쌓아 구체적 시각 정보가 왜곡되거나 변용된 상태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없애는 행위는 상품화 된 미디어에 가한 항의의 행위이자 '부재하는 진실'에 대한 비평적인 물음의 표명이었다.
그간의 전시에서 파편적이고 일화적인 방식으로 자신과 세계 사이의 부조리함을 단상처럼 제시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 전반을 걸쳐 나타나는 사회적 불평등과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시대적 한계를 역설적으로 희망과 긍정의 힘으로 연막을 치는 자기 계발의 시대를 보다 정교한 공작(bricolage) 작업으로 풍자한다. 유리, 금속과 같은 차가운 질료와, 전구, 적외선, 가스통과 같은 뜨거운 질료, 그리고 동물의 이빨 가짜 치아, 크램폰이 착용된 등산화와 사다리와 같은 키치적인 사물 들은 완전한 평형을 이루기 위한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완벽한 정화-물리적으로, 의학적으로, 심리적으로"(2013)는 일종의 정수 기구로 하부에는 적외선이 설치되어 있고 상단부터 하단으로 오염된 물이 살균되는 공정을 전시한다. 실험기구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현대인의 위생 관념 속에 숨어 있는 감염의 두려움과 미래의 희망이 혼재하는 상태를 비유한다. "나는 화나있다.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2013)은 남성으로서의 성적 욕구와 정신적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동물적 욕구와 이성적 초자아 사이의 갈등을 도식화 하고 있다. 한껏 부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각난 야구 방망이-성기의 허세는 언제나 의젓해야 하는 슈퍼맨/우먼을 요구하는 현실의 비애가 느껴진다. 미국의 9.11 사건 이후, 그리고 연쇄적인 경제 불안은 문화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는 화목한 가족, 가정의 가치가 대두하였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절대적 권능을 지닌 초자연적 주인공이 스크린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마치 세기 말이 실재화 된 듯 우리의 현실은 온갖 욕망이 한데 뒤엉킨 상태가 되었다. 긍정적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학원, 은행, 증권, 보험이 그러하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현실이 된 드림 랜드, 관광지, 복권과 복지 등이 또한 그러하며, 철저한 기획과 정책으로 개발된 신도시가 그러하다. 세계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채로 더욱 완벽한 세계를 위해 노력하지만 역설적으로 현대인이 느끼는 삶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위태롭기 그지 없다. "숙고를 위한 무도회장"(2013)은 쾌락을 위한 클럽이 아닌 사원의 내부처럼 고요하다. 평형 상태의 구조물에 설치된 램프가 서서히 회전하고 있고 공간 입구에는 역시 평형 상태의 낮은 테이블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한 저서에서 행복의 조건 중 첫 번째를 '부족함'을 들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현재의 절망은 '과잉'으로부터 초래한 것일까? "자크 라캉과 오스카 와일드를 차용해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완벽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는 동시대 최고의 히트 상품일 것이다. 박지훈이 제시하는 완벽한 평행은 행복한 상태가 아닌 절망의 다른 모습처럼 보인다. 아방가르드 예술 또한 시대의 헤게모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점점 더 통제와 검열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 정현
Vol.20131011f | 박지훈展 / PARKJIHOON / 朴志勳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