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임展 / HATAEIM / 河泰任 / painting   2013_0926 ▶ 2013_1005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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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926_목요일_05:00pm

주최 / 가나아트 기획 / 장흥아트파크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1층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세계의 통로에 대하여소거로부터 존재에 이르는 「통로」 분홍, 노랑, 파랑, 초록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색띠(color band)들이 덮이고 교차한다. 무한한 공간에서 자리를 다투던 이들의 교집합은 종내는 쏟아지는 흰색의 띠들로 덮이고 만다. 눈처럼 흰색은 모든 것을 덮고, 언뜻 언뜻 틈새로 보이는 색은 아침 햇살처럼 쏟아져 나와 눈을 황홀케 하는 빛이 된다. 열심히 쌓아올린 색띠들 위에 눈부신 '하양'의 색띠들을 반복하여 얹음으로써 노동력은 무화되고 화면 안의 시간은 사라진다. ● 하태임의 화면에서 유동하는 색의 띠들을 점령하고 최후로 군림하는 흰색은 또한 '덮어버린다'는 속성으로서 '색이 없음'을 실현한다. 안정된 따블로에서부터 언뜻언뜻 드러나는 색의 띠들을 파편화하여 교란시키고, 산란하는 빛으로 만드는 흰색은 '색이 없다'는 공통 층위의 검정을 상상시킨다. 이것이 넘치는 색의 향연인 화면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의 박동과 동시에 의외로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이유다. 거기에는 물리적 색채의 소거와 색의 띠들이 지나간 시간이 캔버스로 스며들어 자연의 캔버스 자체로 회귀하는 무화(無化)가 실현되어 있다. ● 고국을 떠나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거의 모든 이는 소통의 통로를 상실한 경험을 공유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사물이나 사건에 일치되는 모국어를 의식적으로 이국의 언어로 뒤덮어야만 한다. 이 부정의 경험은 때론 자기 환멸, 알 수 없는 공포를 수반한다. 모국어의 부정은 모성의 부정에 대한 죄의식을 수반하고 혼란에 휩싸이게 하며, 현실과 이상이 상호 격렬하게 저항하게 한다. 작가의 초기작에서 화면에 존재하는 색으로 나타난 격렬한 신체성이 감지되는 제스처와 네모, 원, 하트 등 단호한 기호들의 조합은 이러한 자기분열적 상황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제 작가적 양식 혹은 작가의 기호로 통용되는 칼러밴드(color band)라 지칭한 색띠에 이르러, 작가의 몸에서 발원한 제스처가 화면에서 유동하고 교차하고 틈새를 드러냄으로써 은폐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광경을 창출한다. 붓의 축이 되는 사지에서 발원한 작가의 에너지는 투명한 물감을 통해 겹쳐지고 중복되어 형태로 구현된다. 무미건조하며, 도형화된 색의 띠들이 움직이고 드러나는 진동의 상황은 바로 작가의 신체, 몸의 확장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재현을 파괴하는 방식으로서 현대 회화의 주요한 두 흐름인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는 것'과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현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방식'에서 작가 하태임은 색띠를 통해 두 방식을 결합하고 공유한다. 붓의 세세한 올들이 지나간 흔적이 살아 있는 그 색의 띠들은 명백히 리히텐슈타인의 붓자국을 연상시키며 캘리그래피의 추상성과 조우한다. 색의 파편으로서 색띠들은 면(面)으로 인지되지만 공간에 부유하고 중첩하며 그 구성체의 텍스처를 드러냄으로써 붓의 이미지를 통한 선(線)으로 존재한다. ● 구상적 형태로서 붓자국은 규격화한 길이로 인해 전체에서 격리되고, 개개의 형상은 다른 형상들과 관계맺지 못함으로써 재현을 피하고 서술되지 않는다. 격리를 통해 현대 회화의 기본인 재현할 대상도, 재현해야 할 이야기 구조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하나의 띠들은 독자적이며 고독하다. 들뢰즈에 따르자면 하태임의 회화는 순수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상징화된 형태 속에 신체를 숨김으로써 이해나 지각이 아닌 감각의 체험에 위치되는 것이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3

"정확히 이따금 불완전한 재료와 물질들은 간혹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재료와 물질들은 기호로서 풍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를 통해서, 인간성의 근원으로, 다시 말해 분명한 내용보다 기호가 우세했고 문자보다 상형문자가 우세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이 여성은 우리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독해야 할 기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하태임의 현란한 색띠는 반복되는 붓질과 증식되는 형태로서 화면을 확장시키는 기본 음소이자, 그 자체 상징의 기호이다. 자연물을 상상케 하지 않는 색, 몸의 움직임과 힘을 응축한 선은 비가시적인 세계를 화면에 붙들어 놓는다. 클레의 말처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 현대 회화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색띠들은 작가의 팔 길이에 기초한 크기와 속도를 통해 '힘'을 구현하는 현대 회화의 본질을 충실히 수행한다. ● 그동안 색띠를 쌓아올리고 교차시키며 아래쪽의 대상을 비치게 하여 관계짓던 시간들은 흰색의 붓질로 덮여 소거된다. '색의 부재'가 색을 넘는 지점에서 시간 또한 사라진다. 로만 오팔카의 숫자가 덮일수록, 얼굴이 점점 밝게 변할수록 시간이 경과하고 존재가 소거되는 화면처럼 하태임의 색띠들은 내게 시간과 육체로 해독되었다. 화면에 스며드는 공간과 에너지의 통로, 화면 내부의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의식으로서 통로는 은폐를 통해 즉 지우기를 통해 회화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림이 물감이 쌓여 이룩되는 것처럼, 소거의 의미망을 벗어났을 때 그의 지우기는 시형식(視形式)으로 존재한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13

응축과 드러내기의 이중주 ● 지우기 방식으로 '그리는' 화면에서 작가는 때로 흰색의 띠들을 색이 있는 띠의 하위에 둔다. 그리하여 거의 동일한 각과 크기를 갖는 화려한 색띠들 사이에서 흰색의 띠는 공간이 된다. 반복되는 형태와 색채들이 벌이는 경합 속에서 이 틈새는 색띠들을 변별시키고, 감정이입의 감정이 놓일 자리를 마련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색 하나하나의 부딪침은 흰색에 의해 조화되고, 노랑색으로 덮인 채 공간 전면을 뒤덮고 솟아오르는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 그동안 하태임의 작업은 이번 전시를 위한 용트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적 양식을 이룩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이지만, 화면의 색띠들은 이처럼 자유롭고 제각각으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독자적이며 교차하지만 결코 다른 색띠에 의해 가려지지 않은 온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무한한 공간에서 유영하는 색띠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쌓아올려진 흔적이나 그것을 덮어가는 과정이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은 화면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색으로 시각을 사로잡는다. 빨강, 금색, 파랑 등 밑바탕색 위에 올려진 색띠들은 거의 동일한 크기의 반복을 통해 작가의 신체적 움직임, 생명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반복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순환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작품 또한 반복이라는 삶의 논리 아래 탄생한다고 본다. 그 무수한 반복 속에서 작가는 고백한다. "최근 작업에서의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는다면 색채의 반복을 통해 구축되는 화면을 만났다는 점이다. 이전의 작업에서는 지우기의 행위에만 집착했던 반면에 화려한 색은 엄격한 선택으로만 제한했다."(2007년 박사학위청구전의 작가 노트) 작가에 따르면 지우기에서 벗어난 색에의 집중이 의도되었다. 2013년 결코 좁지 않은 작업실의 여러 방에서 내가 만난 그의 작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색의 리듬, 율동 그리고 색 자체의 탐닉이 무수히 기포를 내뿜으며 지글대는 용광로였다. ● 유동하는 색띠들은 부드럽게 애무하며, 공간을 유영하다 우연히 생긴 형태의 공집합에서는 LED 광선처럼 색들은 빛난다. 기존 작품의 '소거'의 도구이자 본질이던 흰색 또한 하늘색이나 황토색 위에서 버젓이 색띠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때로 이 흰색의 띠는 필연적인 '존재 없음'의 성격으로 인해 그 색상의 상대 위치인 검은색이 의미하는 그림자의 위치를 점하기도 한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13

틈새를 통해 흘렀던 형태들은 형태 자체의 움직임으로 흘러간다. 틈새를 통해서만 통로임을 드러낼 수 있었던 형태들은 색면 위에 위치함으로써 그 자신 통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면에 이르는 세계의 통로는 그렇게 작가의 신체에서 분질되어 표면에서 내부로 스며든다. 은폐와 소거라는 행위를 통해 소통 불가능을 상정함으로써 자신을 고립시키는 상징으로 위치하던 색띠들은 마치 정확한 단어전달을 위해 적절히 묵음해야 하는 음소를 일일이 일러주는 언어교습 시간과도 같았다. 이 음소의 부정, 언어의 존재적 부정행위는 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히려 불완전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과 같았다면, 이제 화면 위에서 펄떡펄떡 뛰는 색띠들은 음 하나하나의 완전성, 그것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문장을 말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로만 오팔카의 숫자와 같이 존재 자체로 화면 위에 존재한다. 행위의 주체인 작가의 몸과 관객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 발화하고 산화하는 그 지점에서 색띠들은 통로 혹은 문이라는 기능을 완벽히 수행한다. ● 색띠들은 작가의 신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휘어지고 화면에는 붓의 올이 드러나 언뜻언뜻 띠의 구조를 드러낸다. 때때로 휘어짐이 현저히 작아서 다소 직선으로 보이거나 다른 띠보다 얇거나, 투명도가 적은 색띠를 발견한다. 마치 생물학의 염색체처럼 동일하지만 조금 다른 색띠는 작가 감정의 기조가 색띠에 담겨 있음을, 그래서 반복적인 이 색띠가 차이의 구조임을 확인케 한다. 그리하여 다소 낭만적으로 화면에 감정을 투사할 수 있게 되는데, 붉은색 바탕에 가로로 색띠들이 중첩된 화면에서는 흐름의 규칙 속에서 날카롭게 교차하는 울트라마린블루 색띠에서 신경질적인 혹은 약간 거슬리는 교차의 감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3

황금색 바탕에 가로로 흐르는 색띠와 대구를 이루는 붉은색 바탕에 우측으로 상상하는 색띠의 화면은 회귀와 탈출이라는 대극점에 있지만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파란 하늘을 상기시키는 화면에 놓인 연보랏빛 색띠는 흔들림과 내부의 혼돈을, 흰색의 색띠 위에 연두, 파랑, 주황의 색띠로만 이루어진 화면은 공간의 이동과 분리, 같은 색 바탕에 역시 흰색 띠를 기반으로 하고 위에 빨강, 주황, 초록 그리고 파랑 색띠의 화면은 응축과 그 가운데 버텨내는 중심성 같은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색의 선택 그리고 그것의 생김새나 위치에 따라 마치 작가의 몸이 가족들 사이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내부의 여러 마음의 갈래에서 어떤 양상으로 위치하는 것이다. ● 이러한 색띠는 누군가에는 표정으로, 작가 자신의 감정으로, 그 작가 존재 자체를 의미할 수 있고 또 바라보는 이의 상황을 드러내는 즉 '소통'으로 존재한다.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나의 딸은 우연히 검정색 바탕에 무수한 색띠가 응축되는 작품이 모니터에 띄워진 것을 보며 "의도적 화합"이라고 말했다. 어떤 작품에서는 "분리→절단→날개→자유"라 하고, 검붉은색과 짙은 검정이 대구를 두 폭으로 이루는 작품을 '추종과 출발이 공존'한다고 읽어냈다. 관객의 심리가 투사된 상황이겠지만 색 자체, 움직임 자체가 작가 자신임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주장이, 이 무미건조한 색띠가 요동치며 발언하는 하나의 음소로 화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해, 그것은 극히 예민한 감각의 표피로서 살갗과 살갗이 맞닿은 순간의 접촉과 같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 시간성을 투사하고 다시 소거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모험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회화의 본질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 색이라는 관념이 물질화되는 그 자체의 물질성을 노출시키는 이 회화는 현대미술의 정점에 있으며 숭고와 시뮬라르크를 지나 프로이드의 심리적 상황에 귀환한 것이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160cm_2013

분리, 자유에 이르는 「통로」 ● 공간에 존재하는 색의 띠들이 공간에 존재하는 방식은 붓의 시간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 작가의 에너지가 투사된 그 시간은 색띠라는 단위로 형상화되어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문이며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색채에 대한 자발적인 선택이 교육이나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작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작가의 생각처럼 작가에 의해 선택된 색은 작가 자신의 감각으로 존재한다. 화면 내부와 외부가 소통하는 순간에 감각이 그리고 세계에 이르는 통로가 공존한다. 그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감각이야 말로 회화를 있게 하고 작가를 다른 작가와 변별시키며 세계를 만나게 한다. 그리하여 색을 '그리는 자의 본질'로 규정한 작가의 논리는 호흡과 더불어 작가의 신체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 들뢰즈에 따르면 감각이란 감각기관에서부터 직접 몸에 이르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감각이란 내부와 외부가 접하는 지점에서 진동하는 사건이다. 하태임의 색띠는 안구를 움직여 색띠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이르는 길이를 통해 몸을 축으로 삼아 팔을 휘두른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 색띠의 구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색의 점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여 띠를 이루어 교차하고 소거하는 과정이 담긴 동영상을 통해 가시화한다. 화면 안에서 와글대던 그 감정들이 공간을 뚫고 그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작가의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색채의 폭발 혹은 색띠의 외부를 향한 에너지가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화면 안에서 공간을 유영하지만 여전히 평면일 수밖에 없는 색띠들이 입체물로 제작되어 공간에 실재하게 된 것만을 보아도 그렇다.

하태임_Un Pa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5×75cm_2013

견고하고 예민한 스테인리스 판들은 절단되고 구부려져 색의 띠들로 공간에 우뚝 서 있다. 융합, 화합이라는 조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2차원 화면에서와 달리 이들은 그 자체의 강한 형태로 교차한다. 공간에 존재하는 입체의 특성상 그들은 서로 의지하여 세트를 이루어야만 의미망을 형성하게 된다. 자유로운 유영을 위해 독자성이 포기된 입체 앞에서 삶의 원칙을 발견한다. 서로 교차하며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고, 투명성을 보여주던 색띠들은 입체로 존재하며 하나하나의 색으로 존재한다. 그곳의 교집합은 '모임'일 뿐이어서 어떤 색채나 공간도 공유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유영을 위해 화면에서 분리된 색띠들은 공간에 분리되어 고독하고, 교차하지 못해 고립되어 있다. 흰색으로 덮여 소거되었던 그 회귀된 형태를 작가는 왜 굳이 꺼내보려 하였을까. ● 인간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헤겔은 최고의 공존이 최고의 자유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것에 결부되고, 서로 의존하고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려면 이러한 상호관계 안에서 보아야 하는데 나무는 숲에서, 인간은 사회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태임의 화면에 존재하는 색띠들은 그 자체로 회화의 형식을 만족시키는 붓질로, 의미를 확산시키는 음소의 상징으로 그리고 색을 통해 작가 자신으로 위치한다. 그 색띠가 자유를 위해 상호관계를 선택한 입체 앞에서 관객은 작가의 삶의 법칙에 대한 탐구를 목도하는 것이다. ■ 조은정

Vol.20130926h | 하태임展 / HATAEIM / 河泰任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