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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9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먼 시선 혹은 무덤의 연금술 ●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은 무덤 사진들이다. 무덤이 사진의 주제가 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주제 의식으로 무덤을 찍는 사진들은 그 동안에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무덤을 렌즈로 포착하는 차경희의 시선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그녀는 무덤을 근접 촬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 한 먼 시선으로 무덤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 그 먼 시선 안에서 차경희의 무덤들은, 여타 무덤 사진들과는 다르게, 돌출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공간의 전부를 차지하는 풍경들 속에 묻혀 있거나 스며 있다. 그녀는 말하자면 먼 시선을 통해서 주제를 의도적으로 탈주제화 한다. 그런데 그 '탈주제화'의 시선은 주제 의식만이 아니라 사진 공간을 다층화하려는 프레임 구성 의식의 결과인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차경희의 사진 공간은 그러한 탈주제화의 시선을 통해서 주제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변증법적 공간이 되며, 그 복합적인 공간 안에서 무덤들은 단순한 시각적 주제를 초과해 꼼꼼히 읽어내야 하는 다의적 기호로 변하기 때문이다.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을 이해하는 일은 다름 아닌 이 기호의 다의성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경희의 무덤 기호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는 것일까.
나는 우선 존재론적 관점으로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읽는다. 그랬을 때 주목을 끄는 건 생과 사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녀의 새로운 시선이다. 차경희의 시선 안에서 무덤은, 흔히 그렇게 생각되듯이, 죽음의 거처나 생의 외부가 더 이상 아니다. 무덤은 오히려 생의 내부로 들어와서 생이 겪는 모든 일들을 함께 겪는다. 생이 계절을 지나가듯이, 무덤은 복숭아꽃 피는 봄을, 눈 쌓인 겨울을 지나가며 겪는다. 또 생이 모든 공간 안에 편재하는 것처럼, 무덤 또한 혹은 들판에, 혹은 바닷가에, 혹은 누군가의 집 곁에서 거주한다. 심지어 무덤은, 예컨대 길 한편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무덤은,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창 밖으로 지켜보는 것 같다. 하지만 차경희의 무덤 사진들의 존재론적 특별함이 다만 무덤이 생 안으로 내부화되는 사실에만 있는 건 아니다. 조금만 더 깊이 응시하면, 풍경 속에 사소한 디테일로 소속된 것 같은 무덤은 오히려 풍경의 중심인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산 안개의 연무가 태곳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이미지들 안에서, 풍경들은 무덤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무덤으로부터 생성되고 있다는 연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차경희의 무덤 사진이 존재론적이라면, 그 존재론은 역설적이다.
다음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응시한다. 그럴 때 먼 시선으로 포착된 무덤은 '애도'의 기호로 읽힌다. 그 개념을 정립한 프로이트에게 애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상실의 슬픔이 다시 생으로 귀환하는 리비도 운동, 즉 사랑하는 죽은 사람과의 건강한 이별을 의미한다. 하지만 차경희의 무덤들은 그와는 다른 애도, 프로이트가 아니라 프루스트적인 애도와 더 가까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프루스트에게 애도는 죽은 자와의 이별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안에 내포시키는 기억 작업, 말하자면 죽은 자를 땅속의 무덤이 아니라 마음의 무덤 안에 묻어 간직하는 일이다. 차경희의 무덤 기호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 오롯이 내포되어 생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듯한 차경희의 무덤들은 이별과 망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지 않고 생 안에 간직하려는 추억과 불망의 이미지를 더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이 애도 사진이라면, 그녀의 무덤들은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자기 안에 스스로 지어놓은 마음의 무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사진 이미지 자체에 대한 메타이론적 관점으로 읽는다. 사진과 무덤 사이의 내밀한 관련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천착했던 사람은, 잘 알려져 있듯 R. 바르트다. 바르트에게 사진은 죽음과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는 이미지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다('사진의 아이도스는 죽음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대상을 시체처럼 정지된 죽음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진은 '죽은 자의 귀환'이다. 인덱스 이미지인 사진은 '그때 거기에서 살아 있었음'을 기록하는 이미지, 보는 이의 시선 안에서 그 '살아 있었음' 이 되돌아오는 과거 생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는 시니피앙으로 읽게 만든다. 차경희는 무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러면서 무덤 공간을 사진 공간으로 재현한다. 이 재현은 그러나 다만 대상이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이 애도 사진이라면, 그 사진적 행위 안에는 애도의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내포된다. 사진이 살아있는 과거의 공간이라면, 사진이 된 무덤은 이제 죽음과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살아 있어 현재로 귀환하는 마술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차경희의 사진 행위는 무덤을 죽은 자의 거처가 아니라 산 자의 거처로 바꾸려는 연금술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덤과 사진의 연금술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건 아니다. 그건 자기 마음 안에 무덤을 짓고 죽은 자를 그 안에 간직하는 사랑의 시선으로만 가능해지는 연금술이기 때문이다. 차경희의 사랑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다. ■ 김진영
Vol.20130907b | 차경희展 / CHAKYOUNGHEE / 車慶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