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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524_금요일_05:00pm
주관 / 고은문화재단_고은사진미술관
관람시간 / 09:00am~08:00pm
토요타 포토 스페이스 TOYOTA PHOTO SPACE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 해변로 299 토요타 부산 전시장 Tel. +82.051.731.6200 www.toyotaphotospace.org
먼 시선 혹은 무덤의 연금술 ●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 은 무덤 사진들이다. 그런데 무덤을 렌즈로 포착하는 차경희의 시선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그녀는 가능한 먼 시선으로 무덤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 그 먼 시선 안에서 차경희의 무덤들은 프레임 공간의 전부를 차지하는 풍경들 속에 묻혀 있거나 스며있다. 차경희의 사진 공간은 탈주제화의 시선을 통해서 주제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변증법적 공간이 되며, 그 복합적인 공간 안에서 무덤들은 단순한 시각적 주제를 초과해 꼼꼼히 읽어내야 하는 다의적 기호로 변한다.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을 이해하는 일은 다름 아닌 이 기호의 다의성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 나는 우선 존재론적 관점으로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읽는다. 그랬을 때 주목을 끄는 건 생과 사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녀의 새로운 시선이다. 차경희의 시선 안에서 무덤은 오히려 생의 내부로 들어와서 생이 겪는 모든 일들을 함께 겪는다. 조금만 더 깊이 응시하면, 풍경 속에 사소한 디테일로 소속된 것 같은 무덤은 오히려 풍경의 중심인 것처럼 여겨진다. 차경희의 무덤 사진이 존재론적이라면, 그 존재론은 역설적이다.
다음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응시한다. 그럴 때 먼 시선으로 포착된 무덤은 '애도'의 기호로 읽힌다. 프루스트에게 애도는 죽은 자와의 이별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안에 내포 시키는 기억 작업이다. 차경희의 무덤 기호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 오롯이 내포되어 생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듯한 차경희의 무덤들은 이별과 망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지 않고 생 안에 간직하려는 추억과 불망의 이미지를 더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사진 이미지 자체에 대한 메타이론적 관점으로 읽는다. 사진과 무덤 사이의 내밀한 관련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천착했던 사람은, 잘 알려져 있듯, R. 바르트다. 바르트에게 사진은 죽음과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는 이미지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진은 '죽은 자의 귀환'이다. 이 사실은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는 시니피앙으로 읽게 만든다. 사진이 살아있는 과거의 공간이라면, 사진이 된 무덤은 이제 죽음과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살아 있어 현재로 귀환하는 마술적 공간이다. 말하자면 차경희의 사진 행위는 무덤을 죽은 자의 거처가 아니라 산 자의 거처로 바꾸려는 연금술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덤과 사진의 연금술이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자기 마음 안에 무덤을 짓고 죽은 자를 그 안에 간직하는 사랑의 시선으로만 가능해지는 연금술이기 때문이다. 차경희의 사랑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다.
아케디아에서 비타 노바로 ● 차경희의 「生, 바다풍경」 은 아케디아 사진, 삭막하고 메마른 마음의 풍경 사진처럼 보인다. 그래서인가, 하늘과 땅과 그 사이 영역으로 삼분 구획된 사진 공간 안에서 모든 것들은 낮다. 낮은 공간들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공간은 말이 없다. 그 침묵은, 말 없음이 아니라 말 막힘으로 다가온다. 말 없는 사진의 침묵을 듣자면, 그건 환청으로만 들을 수 있다. 지우는 소리, 깨지는 소리, 뚫는 소리, 흐르는 소리, 자라는 소리 - 차경희의 「生, 바다풍경」 은 소리의 풍경 사진이다. ● 하지만 또 하나 들리는 소리가 있다. 그건 소리들 안에서 들리는 소리, 즉 소리들이 변하면서 이동하는 소리다. 차경희의 「生, 바다풍경」 이 소리의 풍경 사진이라면, 그 사진들을 이해하는 일은 다름 아닌 이 소리들의 동선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동선을 나는 아케디아(Acedia)에서 비타 노바(Vita Nova)로 이어지는 동선으로 이해한다. 메마르고 삭막한 아케디아의 땅에서 새로운 생이 발견되고 자라나는 비타 노바의 땅으로 건너가는 생의 행로가 그것이다. 차경희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몹시 아팠던 것 같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백토와 습지 그리고 초지의 풍경들을 채집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풍경 채집을 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아픈 마음의 행로를 따라서 걸어갔던 것은 아닐까. 아케디아에서 비타 노바로 이동하는 생의 행로를. ■ 김진영
님의 다정한 침묵 ●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 시리즈는 유형학적인 사진들과는 변별력을 갖는다. 무덤의 형식이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자리를 잡는가에 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 속의 가치를 투영하며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프레임 안에서 무덤은 주된 소재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아니다. ● 그의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이 무덤 속에 잠든 소중한 '님'을 바라보는 남은 자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사진의 톤을 최대한 은은하고 차분하게 조정하고, 공간감을 깊이 있게 올라오도록 했다. 사실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것은 일상에서 어느 날 한 걸음 헛디딘 것에서 비롯된다. 어처구니없이 찰나적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상실의 아픔은 선뜻 이해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경희는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호소의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여 사진으로 보여졌을 때 그 속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좀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 안에 있는 풍부함을 좀더 들여다보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면 속의 무덤들은 모두 중앙을 벗어나 있다. 오히려 풍경의 일부처럼 여러 구석에서 혹은 마치 흙더미처럼 펼쳐진 시각으로 잡혀있다. 이는 작가가 고정된 앵글을 포기하고, 어느 시점에서 봐야 가장 이 무덤이 안고 있는 슬픔이 가장 애잔하게 표현될지 고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앵글을 달리하고, 색의 느낌을 낮추면서 온전히 자신의 상실감과 그에 대한 회환을 차분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보는 이와의 공감을 통해 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차경희가 동시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현대미술에서 사진매체를 사용하는 태도와 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동시대의 트렌드에 쉽게 응하기보다는 그것이 비록 내적 성향이나 트라우마에 천착했다 할지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하나의 생각을 고집하는 작가적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수고로운 노동을 지불하고, 화려한 색감과 앵글 등을 희생하며 공감하길 바랐던 부분은 바로 죽음만 있을 것 같은 그 장소를 맴도는 생명체들, 즉 죽은 자의 침묵을 감싸던 촉촉했던 바람, 햇살, 부드러운 흙 같은 것들이다. 그런 느낌을 사진 속에 담아 보는 이들의 메마른 가슴에 감각을 일깨우고 이들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죽은 자들과 따뜻한 공감이 가능하기를 소원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위로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라 작가가 고백할지라도 소중한 님을 보내고 마음 아파하는 어떤 이에게 잠깐 동안이나마,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또 그날 작가가 느꼈던 그 공간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분명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님의 침묵은 무척 다정하게 우리를 감쌀 것이다. 비록 현실의 봄이 이토록 늦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강수정
터, 지속된 시간 ● "우리가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면, 죽음마저도 그 사랑에 빠져서 자기의 임무를 그만 잊어버리고, 소멸 시켜야하는 그 사람을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남겨 놓는 건 아닐까. 그것이 사진 이미지가 아닐까."(김진영_'조용한 날들'중 발췌) ● <터, 지속된 시간>은, 먼저 떠난 동생의 죽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죽음은 일상에서 한 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우연한 사건이었다. 이젠 그리움으로 머물 뿐이지만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은 기억 속에 또 다른 존재로 머물러 죽음은 사라짐이 아닌'살아 있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에선 무엇이 보였을까. 그 눈에 우리가 사는 집이 보였을까.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나는 '죽은 자가 살고 있는' 그 흙을 품은 곳, 자연 풍경으로 향하였다. ● 「터, 지속된 시간」의 촬영을 시작하면서 이 땅의 자연 풍경과 생활공간 그리고 죽음의 공간이 하나로 어우러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 속의 대상 가운데 어느 하나만 주목하기보다는 모두를 공평하게 보여주는 위치에서 관찰하고자 하였다. 낱낱의 대상에게 이끌리지 않고, 자연의 미세한 실핏줄까지 들여다봄으로써 그에 순응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계절을 단아한 색으로 재현하여 자연과 산 자의 생활공간 그리고 죽은 자의 거처인 무덤을 하나로 아우르고자 하였다. '터'는 죽은 자의 거처와 산 자의 생활 터전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무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매개체가 된다. 「터, 지속된 시간」은 자연 풍경을 통해 삶과 죽음,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경계나 단절이 아닌 지속의 관계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자 했다. 2013년.
生, 바다풍경 ● 몇 해 전만 해도 이곳은 물이 들어오면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그 물이 빠지면 아낙들이 조개를 줍는 갯벌이었다. 어느 날 바다와 함께 이곳의 많은 생명들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갈라진 이 바다의 흔적 위에 또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바닷게가 갈라진 틈을 파 살아갈 터를 만들고, 염분을 먹고 자라는 칠면초가 억척스럽게 꽃을 피운다. 봄날 그들은 아무리 밟아도 구김 하나 없이 다시 일어서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 조심스러운 발걸음에도 이내 바스러진다. 그리고 다시 봄을 기다린다. ● 5월, 봄의 끝자락에 이곳을 처음 찾아와 계절이 지나는 모습을 내내 바라보았다. 생활의 무게에 밟힌 깊은 발자국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준 이곳은 내게는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을 잃은 다음 다시 그 아름다움을 기다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잊힘이 필요한 것일까? 바다의 흔적만이 남은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서 생의 떨림과 기다림을 배웠다. 나약하지만 제 생명의 값을 당당히 치르고 있는 이들에게서 생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버려진 장갑과 장화 그리고 조개껍데기가 이 땅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고,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이 오늘을 이야기하듯, 이 사진들은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열정을 꽃피우며 살고 싶어 했던 내 젊은 날의 시간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2006년. ■ 차경희
Vol.20130524c | 차경희展 / CHAKYOUNGHEE / 車慶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