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인물원

이지영展 / LEEJIYOUNG / 李智英 / painting   2013_0827 ▶ 2013_0914 / 일요일 휴관

이지영_검은인물원_장지에 연필, 색연필_162×13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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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27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이지영의 근작들 - 「인물원」의 양상과 의미 ● 선입견(prejudice)이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는 대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삶에서 우리는 "선입견을 버려라". "편견을 버려라". "객관적인 눈으로 사태 자체를 직시하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사태 자체를 직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곰브리치(Ernst H. Gombrich)가 『예술과 환영』(1969)에서 지적했듯이 "해석이 가해지지 않은 사실들의 선입견 없는 관찰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아무 기대도 없이 관찰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다는 생각, 우리가 마음을 순진한 백지상태(innocent blank)로 만들고 그 위에 자연이 그 비밀을 기록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세기에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항상 어떤 사태를 특정한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본다. 가다머(H. G. Gadamer)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지평(horizon)에서 세계를 본다.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인간은 자신이 자리한 지평에서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 인간은 '선입견'을 배제하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런데 대개의 경우 내가 속해있는 지평은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지평이 선험적으로 존재했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그 지평에 흡수 내지는 편입됐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해석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즉 나는 내가 속해있는 지평 또는 세계가 정해준 길을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고 움직인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그 믿음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이지영_검은인물원_장지에 연필, 색연필_120×131cm_2013
이지영_검은인물원_장지에 연필, 색연필_130×162cm_2013

「인물원」으로 통칭되는 이지영의 근작들은 인간 삶에 대한 이지영의 관찰의 기록들이다. 이지영은 인간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양태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다. 이 작가에 따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굴레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그것을 '굴레'라고 지칭하는 어법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이지영은 그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19세기 실증주의자들처럼 이지영은 인간이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굴레 없이 인간은 -절대로-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정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인식의 수준에서 그 '굴레'를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판단하며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무모하지만 해볼 만한 것일 게다.

이지영_검은인물원-라일락_장지에 연필, 색연필_162×130cm_2013
이지영_검은인물원-틀_장지에 연필, 색연필_82×132cm_2013

「검은 인물원」(2013)을 표제로 하는 작품을 보자. 여기서 사람들은 줄에 의지해 험준한 산을 기어오른다. 그 끝에 절벽이 있고 그 절벽 끝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못에 뛰어든다. 그 연못은 일종의 진흙탕이다. 그 진흙탕 속에서 마치 연꽃처럼 물에 뛰어든 사람들이 솟아오른다. 그 곁에는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심사위원들이 있다. 이것은 특정 세계에(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속하여 그 세계가 요구하고 지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양상에 대한 포괄적인 은유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들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유희하는 인간들이 있다. 회전목마를 타는 사람들,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저마다의 방식'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가 속한 세계(굴레)가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가 속한 세계가 명령하고 지정한대로 꿈꾸고 유희한다. 그 꿈, 그 유희란 (진정한 의미의)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간혹 그 세계에 있는 누군가가 여기에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고 하면서 작가에게 동참을 권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굴레라고 보는 작가는 그러한 요청에 응하여 「너는 너의 길을 걸어」(2013)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자유롭게 꿈꾸고 행동한다고 믿었던 때가 행복했던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굴레라고 보는 인식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배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아담의 사과처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이 관찰하고 기록한 인간 삶의 양태에 '동물원'을 빗대 '인물원'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은 납득할만한 명명 작업이다. 동물원에서 정해진 틀 속에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동물들처럼 인간들은 정해진 틀 속에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산다. 그 동물들에게 (죽지 않는 이상)동물원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애당초 차단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물원의 인물들에게도 인물원을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지영_인물원-돌고래쇼_장지에 연필, 색연필_61×120cm_2013
이지영_너는너의길을걸어_장지에 연필, 색연필_106×130cm_2013

그러나 하이데거도 말했듯이 인간은 현존재로서의 가능성, 곧 존재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딘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내가 속해있는 세계의 질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어떤 해방의 순간을 구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이 물음의 수준, 또는 이 물음이 가능한 영역이 인물원을 인물원으로 직시하는 지금 이지영의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딘가?"라는 물음은 지금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를 그려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지영에게는 그런 (다른)세계는 상정되어 있지 않다. 탈출을 꿈꾸지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고도의 빠삐용처럼 이지영은 자신이 속한 세계 속에서의 이탈을 염원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지영의 「인물원」 연작들이 폐쇄된 한정된 영역으로 그려진 것, 개방을 의미하는 '문'이 존재하지만 굳건히 닫혀 있는 것은 이러한 양상을 반영하는 모티프들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폐쇄된 영역, 그 프레임 바깥의 텅 빈 공간은 동양화의 여백과 유사한 모양새이지만 많은 동양화들이 제시하는 의미로 충만한 여백이 아니라 불가지(不可知)의 공백에 가까운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이지영은 사고와 판단, 그리고 행동을 제어하려 드는 세계에 맞서 그 세계를 직시하는 인식의 수준을 지켜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2H 연필을 반복적으로 꾹꾹 눌러 그려서 단단하게 구축한 화면은 그러한 노력이 지금 어떤 양상으로 진행 중인가를 시사한다. 그런데 지금 굳건히 닫혀있는 그 문이 열리는 날은 올까? 그리하여 우리가 그 바깥의 불가지의 공백과 직접 대면하게 될 날이 올까? 오히려 진흙탕 속에 뛰어들어 연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이 선택은 쉽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선택의 과정과 경로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만한 것이다. 이지영을 따라 자신이 인물원에 갇혀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 ■ 홍지석

Vol.20130827a | 이지영展 / LEEJIYOUNG / 李智英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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