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안의 흐름

김운규展 / KIMWOONKYU / 金云奎 / painting   2013_0808 ▶ 2013_0821

김운규_심안의흐름-모과Ⅰ_화선지에 수묵채색_70.5×92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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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_01:00pm~07:00pm

미광화랑 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 701-3번지 Tel. +82.51.758.2247 www.mkart.co.kr

묘사의 집요함에 대항하기 ● 김운규의 작업은 우선 크게 두 가지 대응의식, 혹은 균형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먹과 채색, 묘사와 추상, 면과 선이라는 일차적인 대비와 함께 두 개의 모과, 두 개의 대추, 두 개의 꽃사과, 혹은 한 개와 두 개, 두 개와 세 개라는 그루핑된 대비적 구성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한 화면에서 마주보고 있는 듯한 선긋기와 채색의 배치, 원의 순환적 긋기, 사물의 대칭적 배치들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그리고 먹선의 긋기로 드러나는 선들은 길고 짧음, 굵고 가늠, 옅고 짙음의 차이들이 일별된다.

김운규_심안의흐름-대추Ⅳ_화선지에 수묵채색_60×60cm_2013

선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도 그보다 훨씬 작은 사물, 꽃사과나 대추 등의 충실한 묘사에 의해 선은 배경으로 후퇴하고만 듯하다. 묘사의 집요함이 원인일 것이다. 선이 선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대상의 배경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저 평면 위의 구성적 요소로서 위상을 차지할 뿐 묘사와 채색의 구체적 대상이 모처럼 시도한 한국화적 선을 무위로 만들고 만다. 그것은 긋기라는 동양화의 선의 속성과 의미들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선은 서양화의 선긋기와 다르지 않다. 화면 전체의 구성이나 구도를 위한 한 요소일 뿐, 선이 가지는 대상의 전위적 첨예함, 사의의 경계로서 의미들을 얻지 못하고 있다. 먹선을 사물묘사의 배경 정도나 효과적 소품으로 이해하고 활용한 셈이다. 때문에 도리어 먹과 채색 사이의 극명한 표현 차이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서양화와 동양화의 전형적 문제를 작가 스스로 심각하게, 혹은 치열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묘사의 집요함에 그가 뒤물러 선 꼴이다. 게다가 묘사한 대상들조차 요즘 미술시장에서 유행하고 있는 소재들을 염두에 둔 듯한 인상도 그의 시도를 희석하고 만다. 소재는 작가의 태도와 입장을 무엇보다 잘 보여준다. 소재선택은 작품의 어떤 기술적 기량보다 작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것이다. 세간의 한국화냐 서양화냐 하는 우문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질적인 대비와 소재의 허약함은 이 난관을 도리어 어색하고 부조화한 채 남겨둔다.

김운규_심안의 흐름-꽃사과Ⅰ_화선지에 수묵채색, 금박, 은박_35×103cm_2013

그의 그림들은 서양화인가? 한국화인가? 이런 물음은 정당하기도 하고 우매하기도 하다. 때로는 무의미하거나 논쟁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회화라 하면 될 것을 서양화, 동양화로 나눈 것은 일제시대의 잔재다. 그것도 일본의 자국내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수입한 것이다. 굳이 그런 역사적 연원을 따져 묻지 않더라도 이제는 문제의식과 무관한 상투적이거나 지리멸렬한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 논쟁적 질문으로 작업 성향의 정당성을 묻는 것이라면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공연한 정체성 논란이라면 무의미하다. 한국화라는 장르적 특성이 없어진지 오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한 개인의 작업 성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명목의 문제, 장르 간 분류에 대한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국화라는 분류에 따른 정체성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작가생산의 제도적 문제일 뿐 회화일반의 특성을 구별하는 데는 별다른 답을 기대하기 힘든 물음이다. 근대가 시작하는 시기에 우리 그림은 전근대적인 사유에 의한 산수화나 수묵화, 혹은 민화와 다른 그리기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명백한 다른 사유이고 다른 시각체계이다. 그것은 원근법과 현실에 대한 그리기라는 경험이다. 한국화라는 이름의 정체성 논의는 현재의 문제이다. 전통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현재의 지점에서 논의될 만한 특성들에 관한 것이다.

김운규_심안의흐름-원상Ⅵ_화선지에 수묵채색, 금박_36×36cm_2013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김운규의 그림이 던지는 당혹스러움 때문이다. 장르간의 해체를 이해하고 그런 징후들이 여기저기 보기 어렵지 않고, 앞에 지적한 사실들이 새로울 것도 없다는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회화다 그런데도 한국화라는 명제의 정당성을 묻게 된다. 그가 새삼스럽게 한국화를 묻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이런 물음에 대해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려 보일 뿐이다. 그것은 물음에 대한 회피이며 물음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고, 어떻게 같은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의 작업은 답의 제공이 아니라 물음의 제공이다. 이런 태도는 그의 작업이 당면한 난처한 지점을 의미화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양화, 동양화라는 이분법적 분류로써 이에 접근하고 있다는 면에서 채색이냐, 먹이냐, 선이냐 면이냐, 정신이냐 물질이냐, 입체나 평면이냐의 다툼에지나지 않는다. 그의 태도 역시 일반적인 문제와 대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첨예한 질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품은 느슨하고 분명한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발적 질문이 아니라 강요된 질문에 억지로 답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런 질문에 대한 절실함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화와 동양화를 적당한 선에서 혼합해서 이 혼란에 답을 얻으려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 역시 그런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작업이 그 현실의 지점에 있기에 어떤 답이 아니고 질문인 것이다.

김운규_심안의흐름-원상Ⅶ_화선지에 수묵채색, 은박_50×62cm_2013
김운규_심안의흐름-원상Ⅷ_화선지에 수묵채색, 은박_50×50cm_2013

채색이 묘사와 사물의 실재감에 충실하고 면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전체를 중시한 것이라면, 선은 경계를 짓고 구별하며 명백하고 분명한 이해를 보인다. 그것으로 대상이 가진 실재감에 대항하고 사물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인식으로서 거리를 만든다. 그래서 그는 사물의 묘사에 선으로 저항한다. 그리고 동양화의 전형성이랄 수 있는 선에 매료되어 전환을 꿈꾼다. 그러나 그의 선은 그저 화면의 한 구성요소일 뿐 전통적인 동양화의 개념을 얻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동양화의 선이 서양화의 묘사를 위한 편의적인 배경으로 여겨진다. 사실 그의 작업에서 장르간의 정체성 질문은 그의 관심이 아닐 수 있다, 그는 그림이라는 조형성의 문제로 화면을 생성하고자할 뿐이지 장르적 정체성을 보이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화에서는 장르와 무관한 그리기는 때로 의심받는다. 그러기에 그 의심조차 넘어설만한 기량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우매한 질문에 좋은 답이 될 것이다.

김운규_심안의흐름-청풍Ⅳ_화선지에 먹_162×130.3cm_2013

채색과 먹, 실재감과 추상성의 혼성이 그가 새롭게 시도해보는 낯섦이다. 그런 미학적 전환이 그저 대추나 꽃사과처럼 입맛 당기는 달콤함을 넘어서기 바란다. 미학적 전환은 이미지의 충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번에 내놓는 선만으로 구성된 작품 「김운규_심안의 흐름-청풍_화선지에 먹_210×150cm_2013」 앞에서 그의 새로운 가능성과 감성적 전환을 목격하게 된다. 다른 작품에 비해 대작임이 분명하지만 그곳에는 먹선으로 그은 선들만 번성할 뿐 어떤 형상도 묘사도 없다. 그저 선, 먹의 농담과 먹선의 운동들만이 화면을 메우고 있다. 묘사적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 선이나 화면 구성, 먹의 활용 등이 그만의 독특한 기량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형상도 아니지만 면에서 선으로, 채색에서 먹으로, 현실의 구체성에서 화면의 논리로 또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아낼 수 있다. 그 변화는 비록 자신의 시도이지만 자신에게 낯선 것임에 분명하다. 그가 낯설 때 우리도 낯설고, 그 낯섦이야말로 여태껏 그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만들고 보지 못했던 것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일신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고 그의 앞 시기의 작품과 어떤 연관성과 이탈을 자신만의 형상으로 이끌어갈 것인지는 다음 문제일 것 같다. ■ 강선학

Vol.20130809c | 김운규展 / KIMWOONKYU / 金云奎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