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성의 알레고리 Allegory of In-betweenness

서고운展 / SEOCOUN / 徐고운 / painting   2013_0617 ▶ 2013_0701 / 일요일 휴관

서고운_유폐된 공간에서_130.3×193.9cm_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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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운 블로그_goun83.tistory.com

초대일시 / 2013_062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눈 없이 보기, 귀 없이 듣기, 입 없이 말하기-고운의 작품들이 조각 없이 조각내는 것과 애도 없이 애도하는 것 ●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그의 화력(畵歷)을 생각할 때, 아마도 2011년의 어느 언저리쯤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하여 회고할 뿐이다. 그러나 처음 봤던 순간의 그 열광만큼은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곳은 어디였던가. 만약 이 물음이 그의 작품을 육안(肉眼)으로 직접 본 장소를 묻는 질문이라면, 나는 그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떤 단체전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만을 보기 위해서 전시회 마지막 날에 한 전시장을 찾았고, 거기서 나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직접, 그것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품들을 철수하고 있었고, 미안하고 동시에 감사하게도, 나는 다시 포장되어 작업실로 귀환하기 직전에 놓인 그의 작품들을 재차 열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작품들을 그저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워 용달차에 작품들을 실을 때까지 그 작품들과 함께했다. 보이던 작품들은 다시 포장되었고, 그렇게 다시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보이게 될 것이(었)고, 또한 다시 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고 첫 응시였다, 그렇게 기억한다. 하여 나는 이 만남과 응시를 하나의 작지만 분명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눈 없이 바라보고, 귀 없이 귀를 기울이며, 입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이 부재(不在)의 사건이 존재(存在)했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그러한 부재가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예고, 바로 이러한 사실과 예고에 관한 것, 바로 이 사실과 예고 사이에 위치한 어떤 시간과 공간, 그 기이한 좌표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에 관한 것이다.

서고운_검은 거울이 있는 풍경_97×162.2cm_2013

그러니까 먼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무엇이 사건인가, 그림이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살기 위한 어떤 치열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치명적 관성을 향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방향성의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할 그림 속의 '증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그 눈, 혹은 얼굴이 가려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눈이 없는 존재, 보고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맹인, 뒤통수는 존재하지만 얼굴 자체는 부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이상한 목격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림을 바라보는 나는, 바로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증인의 증언에 대한 또 다른 증인, 저 목격할 수 없는 목격에 대한 또 다른 목격자가 되고 있다. 거기에 사건의 형태로 놓여 있는 것은,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확연히 그려지는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녹아내리는 육체'가 있는 풍경, 따라서 숫제 풍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부재하는 사건의 풍경이다. 이야기 속의 화자 또는 그림 속의 목격자가 바라보는 어떤 사건,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 속의 벙어리 또는 그림 속의 눈먼 이가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어떤 사건, 이 기괴한 사건을 바라보는 기괴한 목격자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말하거나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다시 묻자면, 이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그림 안의 증인은, 그리고 또한 그림 밖의 목격자는, 어떤 애도를 표현해야 하며 또한 표현할 수 있을까.

서고운_눈물의 요새_72.7×60.6cm_2013

무엇을 애도하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애도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도가 과연 가능할까. 섣불리 대답하자면, 그러니까 바로 이 대답을 가장 멀리 지연시키기 위해 대답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도란 어떤 확정적인 대상에 대한 확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이란 그림 속의 어떤 특정한 존재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명명 혹은 호명은 어쩌면 이름 부를 수 없는 그림 밖의 또 다른 목격자들의 '이름'을 위한 것, 따라서 여기서 애도되는 것은 아마도 그림 밖에서 그림 안을 애도하는 자, 바로 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애도는 어쩔 수 없이 깊은 늪 안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우울증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말 그대로 여기서 애도는 그 자신의 탈을 바꿔 쓴다. 「애도의 사막>의 이러한 탈바꿈 속에는 서고운의 작품들이 이후 계속해서 반복하고 변주하며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상들의 어떤 원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의 '원형'이란 기원으로서의 원형(原形)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발생학적 단위로서의 원형(元型)에 더욱 근접하는 것이다. 도살되거나 조각난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접합되는) 고깃덩어리,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는 (무표정의 표정을 지닌) 인물들의 군상, 널브러져 있거나 녹아내림으로써 (비로소) 전시되는 육체들, 무대를 구획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하는 천들과 막들, 더럽거나 정갈한 식탁 혹은 성스럽거나 상스러운 제단, 하늘과 땅 혹은 위와 아래의 (불분명하나 분명 존재하는) 대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모든 형상들에 의해, 오히려 애도하려는 자는 그 스스로가 애도되며, 거꾸로 애도되는 대상은 애도를 통해서 사라지기는커녕 다시금 더욱 일그러진 불안의 형태로 귀환하고 회귀하게 된다. 애도하는 자는, 그 자신의 애도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교살되며 질식한다.

서고운_슬픔의 누런 발산_80.3×116.8cm_2013

서고운의 풍경 속에서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Vanitas, lux mea, (진리가 아니라) 허무야말로 나의 빛인 것.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의 주제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언어적 변용을 하게 되는데, 서고운의 그림들 안에서 증식하고 번식하며 창궐하고 있는 '정물(still life)'이란 또한 '아직도 살아 있음(still living)'에 대한 죽음의 증거, 다시 말해 부재의 존재에 대한 증언이자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한 목격이 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그 존재가 가능해지는 증언과 목격은, 바로 그 존재 자체 때문에, 동시에 부재하고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죽어 널브러진 것들의 일견 정적인 배치의 구도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 곧 지금도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의 적나라한 구조와 힘을 폭로하고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시각적 변증법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서 더 중요한 것, 더 시급한 문제는,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변증법적 투쟁이다. 서고운의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이 만약 어떤 '결과'를 그려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투쟁의 전장(戰場)일 것이며, 만약 그것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들의 어떤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싸움의 풍경(風景)일 것이다. 그것들은 눈 없이 응시하고 귀 없이 경청하며 입 없이 고함치고 있다.

서고운_온몸을 관통한 사유의 방_72.7×60.6cm_2013
서고운_피에타_130.3×162.2cm_2013

서고운의 작품들이 증언하거나 목격하고 있는 풍경들은 순간의 포착이자 시간의 고정이라는 2차원 평면의 회화적 성격에 대해 그 스스로의 평면을 통해 물음을 던진다.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풍경, 그러나 그 순간은 정말 한 사건의 정지된 결과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과정인가. 그것은 벌어진 일인가, 벌어질 일인가, 아니면 벌어지고 있는 일인가. 그 풍경은 일견 이미 벌어진 일인 것 같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순간의 고정적인 포착 혹은 정물의 정태적인 나열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으로 진행 중에 있는 어떤 서사, 과정 없는 과정, 원인 없는 결과, 과거 없는 미래가 서고운의 그림 속에서 펼쳐진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이 가리키며 드러내고 있는 '희생자들'이란 단지 저 정물들이 아니다. 희생되는 것은 우리 희생자들의 육체이며 그 육체가 (지금도) 살아내고 있는 시공간인 것. 서고운의 작품들은 어쩌면 2차원적 평면이라는 시공간을 통해서, 곧 회화라는 바로 그 한계를 통해서, 바로 그 자신의 확정성과 가능성을 가장 불확정적이고 불가능하게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면은 어쩌면 그렇게 오직 평면을 통해서만 극복되거나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완전한 탈출은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자기지시적인 불가능의 폐쇄회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탈출 그 자체가 아예 가능하지 않다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이 폐쇄적이고도 순환적인 역설과 마주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회화의 가장 비회화적인 문제와 마주하여 어떤 불가능을 가능케 해야 하는가. 이 선택의 문제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는 문제, 따라서 단지 회화만의 문제가 아닌 예술 전체의 문제, 비단 예술만의 문제가 아닌 행위 전체의 문제가 된다. 에둘러 증언하자면, 게임은 오직 그 게임을 끝냄으로써만, 게임을 끝내려는 이 선택 불가능의 선택을 통해서만, 그렇게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서고운_잃어버린 얼굴_53×136.5cm_2013

죽음을 향한 눈먼 바라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시선이 가능해지고, 부재를 향한 귀먹은 귀 기울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청취가 가능해지며, 불가능에 대한 입 없는 발설을 통해 비로소 어떤 애도의 증언이 가능해진다는 것, 하여 이 불가능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그려나가겠다는 것, 나는 이것이 서고운의 작품들이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걸어갈 어떤 '애도의 늪', 그렇게 차려낼 '부조리한 식탁'이라고 생각한다. 서고운의 작품들은 따라서 그 자체로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예기치 못한 사건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행의 풍경을 문제 삼는 것, 그 풍경을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사유하는 것, 그런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서고운의 하얀 식탁보 위에 한편으로는 가장 성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더럽게 차려진 제단, 그 위에서 가장 익숙한 것들이 가장 낯설게, 그리고 가장 생경한 것들이 가장 친숙하게 교차하고 교살되며 교미한다. 그러므로 저 제단 위에서 눈을 감아 그림을 바라보고 귀를 닫아 그림에 귀 기울이며 입을 닫아 그림을 증언할 몫은 온전히 나와 당신의 것으로 남는다. 나와 당신은 이 성스러운 것과 더러운 것의 몫을, 구토를 하며, 다시 삼키며, 그렇게 살아내며, 수행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바로 거기서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사건들을 벌이게 될 것이다. 눈 없이, 귀 없이, 입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조각내듯 다시 접합하면서, 그렇게, 바로 그 '사이'에서. ■ 최정우

Vol.20130623a | 서고운展 / SEOCOUN / 徐고운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