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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운 블로그_goun83.tistory.com
초대일시_2009_0706_월요일_06:00pm
오프닝 퍼포먼스_프로젝트그룹 "감각의 발성법"
관람시간 / 09:00am~06:30pm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괴물 충동적인 감각의 해방적 노출 ● I. 작가 서고운의 괴물 서고운의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작품은 「교살당한 자들의 발라드」이다. 이 작품은 제출된 여러 다른 작품들의 원형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에 들어 있는 주제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복합적이고 그만큼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초적인 여러 토대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살해와 피살, 금기와 위반, 감시와 처벌, 인간과 짐승, 동물과 식물, 성욕과 인식, 축복과 저주, 억압과 분출, 뚫림과 배설 등.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그 구성 방식에 있어서 이중교차적인 키아즘(chiasme)의 논리를 활용하고 있다. 현전과 부재는 물론이고 봄과 보임, 봄과 보지 못함, 안과 밖, 수동과 능동 등 간의 이중교차적인 상호치환의 논리가 구사되고 있다. ● 오른쪽 검은 액자 거울 속 8명의 구경꾼들은 이 작품의 내면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면 공간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안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교살의 장면을 아마도 강제적으로 목도함으로써 교살되는 일을 함부로 자행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에 들어있는 '교살당한 자들'을 염두에 두게 되면 이들은 이미 교살당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액자 속에 갇힌 채 죽어 있다. 살해당한 자들이 살해당해 마땅한 욕망을 감시 · 검열하고 있는 셈이다. '감시를 통한 감시를 통한 감시...' ● 정작 감시당하는 자는 90도 각도로 엇비슷하게 마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액자 속 잿빛 톤의 그림 속에 들어있다. 액자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억압되어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만약 액자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위반을 하기만 하면 당장 전기의자를 비롯한 교살의 장치들에 의해 처벌·살해되고 말 것이다. 감시 하에 억압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두 손에 의해 강압되는 맹목을 당하고 있는 털북숭이 반인반수의 괴물이다. 이 괴물의 양 옆에는 잘라진 남자의 성기들을 이어 붙여 세운 두 기둥이 있고, 괴물의 발아래에는 비릿한 배설물의 냄새를 풍김직한 액체가 흥건하다. 두 기둥에서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은 '몸에서 자라는 식물'인 체모를 충분히 연상케 한다. 그런데 왜 괴물은 눈이 두 손에 의해 가려지고 있는 것일까? 인식의 원천인 두 눈은 감시와 처벌의 장치들을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핵심 통로다. 이를 가림으로써 원초적인 충동적 감각으로 넘쳐나는 성욕의 지대로 확실하게 들어가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식이 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괴물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은 오히려 괴물 자신에게서 절로 생겨나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강렬한 에너지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인식을 거부하는 맹목은 원초적인 충동적 감각의 질펀한 성욕을 전신으로 향유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로써 일견 강압에 의한 맹목은 그 심층에 있어서 자발적인 맹목임이 드러난다.
이 반인반수의 자발적인 맹목의 괴물은 회화 작품 「파란사자인간」과 조각 작품 「경계 안에서 울다(Mourn In Boundary)」을 통해 아예 독자적인 방식으로 복제 · 재생되어 나온다. 작가 서고운이 이 반인반수의 괴물에 더없이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란사자인간」은 이원화로 되어 있다. 오른쪽 그림은 마치 화판의 바깥에서부터 두 손이 나와 강제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보아야 마땅한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강압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위장된 감시와 처벌의 세계를 애써 보지 않으려는 괴물 자신의 강렬한 각오라고 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보이는 것이 바로 괴물 주변의 형상들이다. 지독하게 단단하고 예리한 부리를 놀리는 새는 괴물의 푸른 깃털들을 뽑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따끔따끔한 고통은 오히려 충동적인 성욕의 감각을 한없이 배가시킬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괴물은 이제 제 스스로 눈을 감고 있다. 강제와 자발이 이중교차적으로 치환되면서 보지 않음으로써 보고, 봄으로써 보지 못하는 이중교차적인 키아즘의 논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이제 「경계 안에서 울다(Mourn In Boundary)」를 통해 아예 이 괴물을 액자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괴물을 '함부로 위험하게' 해방시켜 우리가 눈을 번연히 뜨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재의 공간 속으로 이 위험한 괴물을 과감하게 끌어낸 것이다. 이 푸른 괴물은 작가 서고운의 심층적인 자화상임에 틀림없다. 이 괴물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동시에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동시에 용감하기 짝이 없는 작가 서고운의 '발가벗은' 자화상이다.
II. 괴물의 눈으로 본 풍경들 ● 그 외 「녹아내리는 육체」,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 「푸르키녜」 등의 세 작품은 괴물의 몸 속 눈으로 본 풍경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풍경들은 특히 한국에서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쉽사리 표현하고자 시도한 적도 없고 시도하기도 쉽지 않은 이른바 초현실주의 예술 정신에 의한 것이다. ● 「녹아내리는 육체」는 「교살당하는 자들의 발라드」에서 보이는 '감시자인 희생자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교살당하는 자들의 발라드」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유사한 의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일단 그 수가 8명에서 21명으로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바깥 공간과 이들이 보고 있는 안 공간이 기실 동일한 존재의 안과 밖임은 똑같은 구조다. 충동적 감각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위태롭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21인의 인물들은 액자 속에 갇혀 죽어 있다. 그런가 하면, 양쪽의 벽을 통해 홍수 난 하수구처럼 쏟아져 내리는 액체는 강렬한 충동적 감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충동적 감각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차단된 공간을 점점 더 높은 수위로 채우고 있다. 그 속에서 잿빛 톤의 인간들은 명상에 잠긴 듯 액체 속으로 녹아내리면서 서로의 개별성을 넘어서서 서로에게 녹아들어가는 일종의 죽음의 제의를 태연하게 연출하고 있다.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전체적인 잿빛 톤을 배경으로 핑크빛으로 그려 죽는 나뭇가지들에 매달아 놓은 내장 기관 비슷한 것들이다. 심장과 창자들 그리고 성 기관 비슷한 것들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마침 두뇌나 눈과 귀 등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일상의 삶을 아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각기 알아서 짐승을 닮은 핑크빛 기관들, 그것들은 작가 서고운의 자화상인 괴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관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에 걸려 죽음에 저항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있다. 물론 일상의 삶은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 「푸르키녜」는 위 두 작품에 비해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싶다. 장엄한 구도에서도 그렇고 배치되어 있는 조형 요소들에서도 그렇다. 푸른 색조로 처리된 아치형 구조물은 분명 신전과 같은 신성한 장소를 나타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운데 공중으로 들린 푸른 두 기둥은 목구멍의 목청을 연상시키기에 이 장소는 목구멍을 크게 확대한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런 구도에서 보면, 얼굴도 없이 그저 기다란 줄을 내 보이는 사제 앞에 정신병원에서 쓰는 죄임 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서 혀를 내밀고 있는 장면은 펠라치오의 성욕을 드러내는 것으로 된다. 이에 신성함과 관능성이 이중 교차적으로 치환되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위태로운 사면을 따라 여러 체위의 성행위에 의해 뒤엉켜 얼굴 없이 그저 몸뚱어리로만 나뒹구는 형상들은 마치 신전에 바치는 제물들인 양 여겨진다. 그와 어울려 방파제를 만드는 거대한 십자 콘크리트 덩이들이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몸뚱어리로 비치도록 한 것은 페티시즘적인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III. 작가 서고운의 초현실주의 ● 작가 서고운은 마치 무당이 작두 칼날 우에서 춤을 추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충동적 감각의 붓을 놀린다. 그 경계 위에서는 차가운 관능과 뜨거운 신성이 뒤범벅이 되어 한바탕 몸의 사육제를 벌인다. 여기에서 성립하는 작가 서고운의 초현실주의 예술의 세계는 몇 가지 형식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 르네 마그리트와 일정하게 닮아 있으면서도 그의 아이러니에 의거한 지성적 초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표현주의적인 측면을 지녔다. 그녀의 작업을 표현주의적인 초현실주의라고 할 때, 표현주의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괴한'이라 번역될 수 있는 그녀의 '그로테스크'는 어쩌면 그녀를 비롯한 인간 집단 무의식의 충동적인 감각의 심층에 대한 직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창조한 '파란사자인간'은 그 자체로 아예 충동적인 감각을 실재 공간에 해방시켜 놓은 직설인 것이다. 날아다닐 수 없는 타조의 기상천외한 푸른 깃털을 뒤덮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강렬한 동물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자의 몸을 가진 인간의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인간의 얼굴, '파란사자인간'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심층의 충동적인 감각을 직설적으로 조형해 낸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렇게 보면 서고운의 초현실의 표현 방식은 오히려 황량한 묵시록적인 계시를 담은 살바드로 달리보다 막스 에른스트를 더 많이 닮아 있다 할 수 있다. 경계 위를 달림으로써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위력은 에른스트의 경우 인간과 동물적인 새의 결합으로 나타났었다. 하지만, 서고운의 필치는 에른스트처럼 정교하지 않다. 오히려 팝 아트적인 재빠르고 간략한 필치를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서고운의 초현실주의는 극사실적인 묘사를 통한 이른바 초현실의 사실성의 강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본래 그러하다는 식이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 정신에 입각한 본격적인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찾자면 민중미술 계열의 신학철이나 임옥상 혹은 안창홍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결코 충동적인 감각 자체와 결코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측면으로 도입한 정도에 그친다. 심층의 충동적인 감각 자체를 나름대로 체계적인 작업의 과정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것은 아마도 서고운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물론 서양의 초현실주의를 잘 알고 있는 관람객들은 '이게 왠 시대착오적인 것이냐.' 하고서 힐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포스터가 지적하는 것처럼 초현실주의가 친숙한 것을 충분히 낯설게 하는 이른바 '언캐니 작업'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선구적인 작업을 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초현실주의는 나름의 시의적인(contemporary)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승인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서구에서 힘을 발휘한 루나 폰틱, 키키 스미스, 로버트 고버 등의 이른바 '애브젝트 미술'은 또 하나의 현대적인 초현실주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서고운의 입체물 '파란사자인간'은 이들과 전통적인 초현실주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불의 괴물 작업과도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불의 작업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생경한 것과는 달리, 서고운의 작업은 다소 정제되어 있어 오히려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서고운의 작업이 설립되는 지대는 일체의 지성적인 논리가 무효화되는 이중교차적인 키아즘의 충동적 감각의 영역이다. 어떤 방식으로건 이 영역을 이미 제대로 잡아채고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새로운 예술 감각의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강력한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전시 주 제목인 '스핑크스의 눈물'이나 부제인 '경계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도'에서 '눈물과 애도'는 사회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갇힌 충동적 감각의 몸 덩어리에 대한 것이리라. 그녀가 흘리는 눈물 방물의 표면에 신성한 관능이 예술 작업을 통해 마법처럼 비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충동적 감각의 세계로 전이되리라 생각한다. ■ 조광제
Vol.20090706b | 서고운展 / SEOGOUN / 徐고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