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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2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8:00pm / 백화점 영업 시간과 동일
롯데갤러리 대전점 LOTTE GALLERY DAEJEON STORE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9층 Tel. +82.42.601.2827~8 www.lotteshopping.com
이원경의 '몸'에 대한 경계의 사유, '존재의 뜨개질' ● 식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인 것, 여린 이파리 같지만 철과 같이 단단한 몸체는 이원경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 방식이다. 이원경의 작품은 일견 아름다운 식물들을 와이어로 드로잉 한 조각들처럼 보인다. 전시장의 벽과 바닥 위로 움직이듯 혹은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식물들의 줄기와 이파리들은 단순한 '장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손으로 전부 뜨개질 된 알루미늄 와이어의 식물들은 기관 없는 몸통을 철망 밖으로 드러내고 있기에 징그럽고 기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것은 분명 식물의 이미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볼수록 점점 더 동물적인 공격성마저 포착되는 것은 왜일까?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거기엔 식충식물, 벌레잡이통풀, 끈끈이주걱과 같은 동물적 식물의 종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식충식물의 이중적인 본질처럼, 어쩌면 인간도 분리할 수도 분리해서도 안되는, 차라리 식물과 동물의 경계와 같은 것에 모호하게 기대서 있는 존재는 아닐까?
이원경의 식물들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갖는 유연한 곡선을 확대함으로써 문명이 건립해 온 '각이 진 것'들을 해체시킨다. 이렇듯 뚜렷하게 나누고 선을 긋는 행위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의 사유인 바,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성과 감성의 대립, 정신과 육체, 문명과 자연의 대립에 있어 후자 즉 감성과 육체, 자연의 억압을 종용해왔다. 모더니즘의 '그리드', 즉 사각의 감옥이라고까지 부르는 건축양식 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들, 사각의 스크린과 같이 '각이 진 것'들은 곧장 어디론가 뻗어나가야만 하는 직선의 성질들로서 에두르고 휘어가면서 시나브로 변화하는 자연의 맛을 모른다. 난폭한 직선의 사유는 오직 '진보'를 향해 과학과 기술의 채찍을 인류에게 휘두르며 내달리길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것들, 이름이 없거나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은 거부되고 망각되었다. 혹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문명의 이편으로 합류되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모호한 정체의 것들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몰아내야 했다. 초현실주의의 몽타주들이 이러한 모호함을 꿈의 연상과 기억으로 환기시키고 싶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원경은 자신의 손뜨개로 탄생된 자연, 즉 식물-동물의 이미지에서 확고하게 명명되어 온 '몸'의 경계들을 재현한다.
경계의 모호함을 드러내는 이원경의 식물들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더 다른 '몸'으로 확장된다. 생선비늘처럼 보이는 식물의 몸, 그것은 알루미늄 와이어로 뜨개질하면서 저절로 생성된 패턴이다. 멀리서 뿌리식물의 열매, 꽃 이파리, 씨앗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그것들과의 거리를 좁히거나 뒤로 더 멀어질 때 쥐, 버섯, 가자미, 올챙이, 알 등과 같이 변화무쌍한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단정할 수 없는 존재들, 처음 본 이미지와는 다른, '명명할 수 없는 몸'으로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몸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그럼으로써 이원경의 뜨개질은 남성과 여성, 동물과 식물, 강한 것과 약한 것, 유기적 생명체와 무생물,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이분법적 언어들을 해체한다. 해체된 몸은 그러므로 나를 규정해온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과거의 이름들 안에 갇혀 있던 단단한 언어의 껍질들, 부정하고 싶었던 규정들, 지우고 싶지만 지우지 못하도록 그리드의 창고 안에 가둔 주민번호와 같은 자아규정들, 이원경의 부유하는 '몸'들은 그것들을 부숴버리고 나와서 바람에 나부끼듯 경계를 넘나들며 춤춘다. 이는 관리되는 사회의 이분법적 언어들이 주는 무게와 상흔을 치유하려는 이원경의 '존재의 뜨개질'이다. 따라서 그의 뜨개질 된 '몸'은 사회의 어떠한 이데올로기로부터도 구속되지 않을 자아의 권리, 사물과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 유현주
알아가는 것 ● 사람을 만날 때 처음에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보통 '첫인상' 이라는 말이 있고, 좀 부정적인 의미로 '선입견' 이라는 뜻도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 거의 끝까지 간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직관이 강한 것인지... 내 경우엔 대부분이 처음의 이미지와 많은 차이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강해 보이는데 속이 참 여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날아갈 듯 연약해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더없이 단단한 사람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강하거나, 약한 혹은 여린 이미지로 단번에 드러나는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보다 복잡한 이미지를 갖는 이를 만나는 경우에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의 첫인상은 점차 다른 모습이 되어간다. ● 식물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식물인간인체로 지내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난 끊임없이 여길 봐달라고 외쳤어요." "난 살아있어요. 내 마음은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요." 식물인간의 가족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환자에 대해서 포기할 것을 권유 받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포기할 것을 권유받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것인가? 그저 움직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뿐인 그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사람처럼 섬세한 감정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동물들은 어떠한가? 움직임마저 보이지 않는 식물에 대해선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감정이 없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 식물, 꽃, 나무.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나 보다. 눈앞에서 재롱부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는 먹이도 주고 예뻐하며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길가의 잡초나 꽃과 나무는 생물임을 알면서도 살아있는 생명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빠른 움직임이 없어서였을까? 예쁜 꽃이 피어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꺽기도 하고, '밟지 마시오!' 란 푯말이 없으면 거리낌 없이 풀밭을 밟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보살피고 존중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와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화초를 잘 가꾸시는 분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화분과 마당의 나무를 잘 보살피시고, 심지어 지인들이 죽은 화분이라며 가져온 꽃나무를 다시 살려내시기도 한다.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드셔서 거동이 불편하심에도 늘 새벽에 일어나서 그 많은 화초에 물을 주신다. 힘드시지 않으냐고 여쭈면, 그래야 아이들이 좋아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말씀 하신다. 또, 가끔 화분에 말을 건네기도 하신다. "잘 자고 일어났니?" "활짝 웃는걸 보니 기분이 좋은가 보내..." 애완동물을 넘어 자식 대하듯이 화분에게 말을 거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 난 아직도 어머니처럼 그들을 온전한 생명으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등을 돌리고 서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눈에 들어온 식물이 있었다. 식충식물. 벌레잡이통풀, 끈끈이주걱......분명히 식물로 분류되는 이들은 주머니나 촉수처럼 뻗은 몸을 하고, 곤충을 자신들의 소화액으로 녹여 영양분을 섭취해 살아가는데, 그 과정이 흡사, 동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의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뿌리식물(구근식물)과 각종 채소로 분류되는 식물의 이미지를 이용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식물의 잎사귀, 덩어리진 뿌리, 줄기, 꽃의 몸통들은 분리되고 서로 다른 조합과 변형을 통해 식충식물이 가진 양면성이, 식물의 요소가 조합된 동물성으로 전환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금속(Aluminum Wire)과 뜨개질 ● 살아있지 않은, 인공적인 재료와 기법이 필요했다. 살아있는 생명의 형태를 역설적으로 부각시켜줄 재료가 있을까? 오랜 친구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무언가 손 수 만들어서 의미 있게 선물하려했던 Wire작업이 재격인 듯싶었다. 금속이라는 재료는 우선 강한 느낌이 든다. 쉽게 구부리기 힘들 것 같은데, Aluminum Wire는 의외로 조금 힘을 주면 원하는 형태가 나온다. 생각보다 유연한 이 재료를 어떤 방법으로 엮어나갈 것인가? 이전 작업 중에 짐승의 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털실로 짠 사람 정도 크기의 '못' 작업이 생각났다. 철사와 비슷한 이 금속의 재료도 실이 떠지듯이 떠지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개질은 왠지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 이 재료를 가지고 정말 옷을 뜨듯이 촘촘히 엮기는 힘들지만, 뜨개질의 방식을 보여 줄만 했다. 더구나, 고정된 형태가 아니어서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다양하게 변화된 설치가 가능하다. ● 내가 몰입하고 있는 부분은, 하나의 성격이 또 다른 성격과 끊임없이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생명을 갖는 식물이 강하고 단단한 이미지의 금속(Aluminum Wire)과 만나고, 이 금속은 다시 유연성이 드러나는 뜨개질 기법으로 연장된다. 줄기, 뿌리, 잎사귀 등의 식물의 요소는 이러한 뜨개질 기법을 통해 정적인 이미지로부터 동물성의 동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동적인 이미지. 움직임은 곧 상대방이 살아있음을 인지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이런 모든 과정은 나 자신이, 타인이나 처음 접하게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이해의 욕구인 듯싶기도 하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인색했던 어떤 '것' 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 모르는 부분을 만났을 때, 사전을 찾고, 분석을 통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론을 짓는 이해의 방법도 있겠지만, 그 모르는 부분에 괄호 치기나 잠시 밑줄을 그어두고 다음단락으로 넘어가면서,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그것을 뭉근히 바라보는 건 어떨까? 처음 그를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혹은 눈감는 날까지가 그의 참 모습임을 이해하면서 많은 다른 모습도 알아가고 싶다. 그래야 이제 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 이원경
Vol.20130620a |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