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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211_화요일_05:00pm
관람료 / 일반_7,000원 / 초·중·고 학생, 경로우대 등_5,000원 / 유아_3,000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서울미술관 SEOUL MUSEUM 서울 종로구 부암동 201번지 Tel. +82.(0)2.395.0100 www.seoulmuseum.org
소나무와 바람 ● 필묵을 품고 산천단(山川壇)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흥분된다. 마치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까마득한 태고 속으로 떠나는 시원의 화첩기행 같은 느낌이다.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에는 여전히 곰솔 여덟 그루가 신화처럼 살고 있다. 예로부터 제주 목사(牧使)는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 천제를 올렸는데 산길이 험하고 날씨가 나빠 산천제를 드리기 힘들 때에는 이곳에 제단을 만들어 천제를 지냈다. 곰솔의 수령을 500~60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국내에 자생하는 해송(海松) 중에서는 가장 크다. 곰솔의 껍질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고 깊게 패어 있었다. 솔잎은 짙다 못해 검은 빛에 가깝고 가지는 모진 해풍(海風)에 갈지자 모양을 하고 있다. 두 그루는 태풍으로 인해 50도쯤 기울어져 지지대의 부축을 받고 있는데, 나머지 여섯 그루는 돌담 옆에 곧게 서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나무 위에 앉아 깍깍 소리 내어 울고 처진 솔가지에 바람이 스칠 때면 노송(老松)은 한 층 더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거대한 노송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다. 설상가상, 갈아놓은 먹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노송 주위에 떨어진 솔잎을 태워 언 붓을 녹여가며 그려야 한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때까지 온종일 그림에 매달렸어도 회심작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곰솔처럼 까맣게 애태우기를 몇 번이었던가. 문득 형호(荊浩)의 『필법기(筆法記)』 속에 등장하는 노인이라도 나타나 뵙게 된다면 후생의 간절하고도 답답한 심사를 하소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닮게(似) 그린다고 그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옛 기법을 충실히 따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닐 것이며, 형태를 왜곡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채색을 곱게 칠한다고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얽히고설킨 곰솔 가지 아래를 걸으며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으로 가지들의 포치(布置)를 관찰하다가 잠시나마 가물 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써 고심하던 나의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미완의 작품을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허공에 떠 있는 연처럼 훨훨 날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야말로 '진(眞)', 즉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화도(畵道)의 높은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 이래저래 공수거의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새로운 실패의 연속이 동일한 실패의 반복과는 다르듯이 그동안 경험한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의 축적은 나에게 사생(寫生)의 중요성을 절절히 일깨워 주었다. 1987년 봄이었다. 나는 동아미술제 공모전에 소나무를 출품하여 동아미술상을 수상하게 됨으로써 소나무를 내 그림의 소재로 끌어들였다. 우리나라 옛 그림, 특히 산수화에는 소나무가 빠지지 않는다. 또한, 동양회화를 전공한다면 응당 우리네 삶과 함께해 온 소나무를 연구하는 것도 의미가 적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고 그 상징성으로 인해서 선비들의 문학과 그림의 소재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바닷가나 논두렁, 산야의 바위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색다른 미감을 지닌다. 우리 소나무에는 중국 그림 속의 소나무와는 달리 우리 산하의 풍토를 담은 색다른 조형미가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기만 해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이 소나무이다. 또 누구 하나 돌보지 않아도 온갖 풍상을 겪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노송을 대할 때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나는 1990년부터 산과 땅, 자연을 모티브로 한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고집스레 이어 오고 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북한산, 설악산, 섬진강, 한강 등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했었고, 그 중간 중간에 동양 회화의 오랜 소재인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번 소나무도 이러한 맥락에서 준비한 작품들이다. 나는 지금도 자연에 대한 사랑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통찰력이 내 그림을 조금씩 성장시키는 발전의 동인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일환으로 일찍이 임모(臨模)에 눈을 떴고 지금껏 고금 명가의 많은 작품들을 두루 분석했다. ●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옛 그림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를 말할 것이다. 특히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이면 능호관(凌壺觀) 이인상의 「설송도」가 한없이 보고 싶어진다. 조선시대에 많은 그림 중에서 특히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작가의 정신세계가 화면 위에 오롯이 투영되어 있고 경영위치(經營位置) 또한 어느 작가, 어떤 그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근엄함과 당당함 그리고 상식을 넘어서는 공간의 조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이 작품을 하루 종일 보고 또 보고도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바로 모사(摹寫)를 하여 화실 한편에 걸어 두고 오래도록 감상하기도 했다.
옛 그림 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이인문(李寅文, 1745 ~1821)의 「대부벽준산수도(大斧劈皴山水圖)」 등 많은 작품을 임모해 보았지만, 이 「설송도」를 임모할 때에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긴장감과 숙연함이 앞섰다. 꼿꼿하게 서있는 앞 소나무와 그 뒤를 비스듬히 구부러져 있는 소나무의 간결한 포치에서 절제된 필선이, 맑은 농·담묵(濃·淡墨)의 운용(運用)에서 문인화의 정수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풍상 세월에 뒤틀린 가지와 옹이, 껍질 썩은 둥치의 표현에서는 노송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작가의 냉정함과 분석력이 그림 속에 고루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는 대부분 용트림하듯 구불구불한 곡선미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작품 속의 소나무는 대나무처럼 직선미가 압권이다. 기법에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 설중매(雪中梅), 설죽도(雪竹圖), 폭포수의 표현에서 옛 화법은 종이의 흰 바탕을 그대로 두고, 그 주변을 담묵으로 선염(渲染)하는 것이 보편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화선지 위에 얇은 호분(胡粉)을 여러 번 곱게 바른 후 그 위에 수묵(水墨)으로 그렸다. 종이는 세월이 지나면서 누렇게 변색되기 때문에 처음 그렸을 때의 기운을 유지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인상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세월이 지나도 눈이 화선지에 그대로 남아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미리 바탕을 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이 그려진지 250여 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설송도」의 눈빛은 아직도 선명하게 화면 위에 남아 이인상이 마치 화면 위에 서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년 3월 섬진강 매화 사생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원을 지나 오수로 향하는데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려 잠시 차를 세워야 했다. 도로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십 그루의 노송이 눈에 들어와 얼른 화구를 챙겨 내려가 보니 그곳엔 이인상의 「설송도」와 똑같은 구도의 소나무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여태껏 많은 소나무를 사생해 보았지만 이처럼 옛 그림과 똑같은 구도의 소나무는 만나질 못했었다. 눈 속에 독야청청(獨也靑靑)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개 '문인화'라 하면 작가의 상상으로 그린 사의화(寫意畵)로 여긴다. 그러나 내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노송들의 파노라마 앞에서 어쩌면 능호관도 직접 사생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는 「설송도」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으로 제법 큰 한지(62×112cm) 위에 그려진 작품으로 노송 특유의 곡선미와 받침목의 직선미를 대비시킨 역작이다. 소나무를 단일 주제로 아무런 배경 없이 크게 부각시켜 그린 그림은 그 예를 찾기가 힘들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는 소나무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한국의 자연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소나무라는 사실을 그 어느 화가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정선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직단(社稷壇)의 노송을 찾아 한나절을 사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12개의 받침목, 그 받침목을 받치고 있는 돌, 그리고 화면 왼쪽 부러진 줄기와 옆으로 돋아난 새 가지의 표현을 보면 작가로서의 관찰력과 사생력의 걸출함을 엿볼 수 있다. 소나무 잎의 표현에서는 농묵으로 그리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겸재는 화면의 무게를 생각하여 담묵과 담채(淡彩)로 솔잎을 그리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지팡이에 의존하듯이 이 노송도를 보면 자연과 인간이 다르지 않고 소나무는 노송일수록 아름다운 조형미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을 보면 옛사람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 다름 아닌 부러진 줄기나 썩은 가지를 그대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소나무를 가꾼다고 톱으로 썩은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요즘의 작태이다. 소나무는 톱을 대는 순간 그 기운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정선의 「사직노송도」와 비슷한 소나무는 순천 선암사의 와송(臥松), 예천의 석송령(石松靈), 이천의 반룡송(盤龍松) 등이 있다.
끝으로 소나무 그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세한도」 속의 실제 주인공일지도 모를 제주 대정향교(大靜鄕校)의 소나무에 관한 이야기이다. ● 1981년, 대학 2학년 겨울 즈음으로 생각된다. 제주도가 고향이지만 정작 제주의 속살을 둘러보지는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제주의 명승지부터 그려보리란 야심찬 겨울방학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처음 택한 곳이 산방산(山房山)이었다. 산방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산자(山字) 모양을 닮은 특이하게 생긴 단산(簞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이르니 제주에는 흔치 않던 기와집이 서너 채가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흰 페인트로 칠해진 녹슨 안내판에 대정향교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대문은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바닷바람이 몹시 차가웠지만, 길옆에는 수선화가 한두 송이 피어 있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는데 향교 난간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니 세 그루의 노송이 돌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중 가장 굵은 소나무 하나는 밑 부분이 반쯤 썩어 어린아이 하나가 숨을 만큼 구멍이 나 있고, 줄기는 해풍에 꺾여 부러져 있으며 솔잎은 모진 바람에 잘 다듬어진 정원수처럼 가지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때 문득 '아! 세한도 속의 소나무는 추사가 9년 동안 머물며 늘상 보아 왔던 이 대정향교의 소나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 그 후 10여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인사동에서 지기들과의 술자리를 갖던 중 국립전주박물관 『눈 그림 600백년』 전시회에서 「세한도」를 배관(拜觀)한 이야기며, 지난날 대정향교에서 소나무를 사생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당장 가보자는 제의가 나왔다. 오랜만에 대정향교를 다시 찾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멀리 향교가 눈에 들어오는데도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농부를 붙잡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더니 일 년 전에 병이 들어 고사하여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향교 담장 옆에 잘려진 둥치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고 그루터기만이 노송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전에 보았던 소나무보다는 작은 해송 한 그루가 향교 정문 옆에 해풍을 벗 삼아 팽나무와 함께 말없이 서있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 산천에 묵묵히 뿌리박고 서있는 소나무를 관찰하고 그려 왔다. 어쩌면 우리 소나무야말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만들어낸 비대칭, 비정형, 비상식, 비표준 그리고 겸손, 인내, 당당함 등을 두루 겸비한 진정한 목신(木神)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가가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는 것이 결국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한 끼의 밥을 먹는 일처럼 다반사의 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화법을 개창하여 새로운 송백(松柏)의 정신을 시대의 팍팍한 마음 밭에 심을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더없이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위안해 본다. ● 그동안 갈필(渴筆)을 이용하여 껍질이나 가지를 그리고 마차 바퀴 모양으로 솔잎을 그리는 옛 기법에서 탈피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급기야 농묵과 초묵(焦墨)을 이용하여 서예의 한 획 개념에서 그 방법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넘어질 듯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있는 소나무의 위태로운 자태는 나에게 더 큰 화흥(畵興)을 불러일으켰고, 솔바람은 언제나 버리고 버리며 비우고 또 비우라고 가르쳤다.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송백의 후조(後凋)를 알리라. (임진(壬辰) 가을 한향재(寒香齋)에서) ■ 문봉선
Vol.20121211d | 문봉선展 / MOONBONGSUN / 文鳳宣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