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향자원 淸香自遠

문봉선展 / MOONBONGSUN / 文鳳宣 / painting   2012_0314 ▶ 2012_0401

문봉선_蘭_지본수묵_191×132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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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6:00pm

문봉선 묵란展

주최 / 공아트스페이스

관람시간 / 10:00am~06:30pm

공아트스페이스 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31번지 Tel. +82.(0)2.735.9938 www.gongartspace.com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유연한 "S" 문봉선의 근작전『淸香自遠』에 부쳐 - 1 ● 산들은 푸른빛을 잃고 숲은 온통 하얗다. 월백 설 백 천지 백이라 했지만 온 화면이 눈으로 뒤 덮혔다. 이렇게도 추운 날에 온 산을 헤매는 저 선비는 기실 매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작자 자신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 그림 속 선비라도 된 듯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필자는 소치의「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를 덮어두고 길을 나섰다. 여름도 아니다. 막 설을 쉰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 겨울이다. 이런 겨울 탐매라면 몰라도 심란(尋蘭)을 나선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모한 행각이다. 그것도 심산유곡(深山幽谷)도 아닌 마천루(摩天樓)가 즐비한 서울의 빌딩 숲에서 난을 찾다니. 필시 난이 아니면 필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소동파가 찬미한 대로 난이란 놈은 바람에 향기를 전해오지만 쑥대 덤불이 깊어 볼수가 없는 존재다. 그렇다고 작심을 하고 나선 길을 여기서 돌릴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겨울해가 짧기로서니 이렇게도 짧을까. 게으른 놈 아침에 일어나 오줌 누고 허리춤 올리면 해 넘어 간다고 했지만 이곳저곳 해매다 벌써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일단은 홍대근처에서 언 발을 녹일 겸 주린 배를 따끈한 생태국으로 채웠다. 한참을 걸어 당도한 한향재(寒香齋)의 철문이 열리자 필자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난초 반 글씨 반, 아니 난과 글씨가 하나 되어 그 큰 벽에 만발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별천지다. 심산유곡 춘란(春蘭)의 군락지에서나 볼까 말까하는 장관이다. 조선시대도 아닌 지금 그것도 한겨울 빌딩 숲에서 난향 가득한 한 여름의 깊고 깊은 계곡을 만나다니 심봤다고나 할까 꿈이라고나 할까.

문봉선_蘭_지본수묵_145×368cm_2011

2 ● 난(蘭)은 예로부터 매화 국화 대나무와 함께 군자(君子)의 반열에서 추앙되는 미덕을 지녔음은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가람 이병기가 난의 본성을 두고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고 노래하지 않았더라도 정결(淨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고한 미덕을 지닌 난초라도 이 시대 난을 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보여 진다. 심하게는 고리타분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사에 초연한 도인(道人)의 소일거리 정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지금도 여전히 난을 부지기수로 '그려대지만' 난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는 이미 난을 치는 행위주체자로서 전통시대 문인(文人)은 사라진지 오래다. 물론 그 배경에는 20세기라는 근현대를 거치면서 우리사회가 급속하게 서구화되었기 때문이다. 융복합의 결정체인 문인이 서화(書畵)하고는 관계없는 시인으로 갈라져 나왔고, 서화는 다시 미술로 전이되면서 먹과 아크릴이 물과 기름으로 돌아선 것이다. 전통시대 문인이라면 시(詩)는 당연하고 서화(書畵)까지 일률(一律)로 꿰는 사람이다. 그래서 굳이 구분을 한다면 난은 그림이 아니라 글씨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옳다. 난을 두고 특별히'그리지'않고 '친다'고들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친다고 다 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고도의 학문연마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학문은 물론 작가의 철학이자 사상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다. 화가 또한 이러한 덕목들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난을 치는 일이 유독 문인사대부 공부의 여사(餘事)일수는 있어도 화가의 본업이 될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사가 말한 대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동반되지 않으면 난을 쳐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글씨를 쓰는 붓이 동시에 난을 치면서, 외물(外物)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자의 내면(內面)을 드러내면서 난화는 완성된다. 이때 난은 그냥 난이 아니라 난을 친 그 사람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난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넓게는 문인화(文人畵)의 본령이기도 하다. 추사의「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만 봐도 그렇다. '성중천(性中天)'과 '불이선(不二禪)'이 제시(題詩)에서 경계 없이 넘나든다. 하지만 이것이 시와 난 그림이, 자신을 빙 둘러싼 제시의 글씨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글씨와 그림이 '초예기자지법(草隸奇字之法)'으로 경계 없이 한 가지 필(筆)로 구사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난을 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난이 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도하다.

문봉선_蘭_모시에 수묵_52×58cm_2011

3 ● 그 다음은 난이 조선도 아닌 이 시대를 대변하는 소재가 될 수도 없다는 점이 난을 외롭게 하고 난을 치는 사람을 고민스럽게 한다. 응당 우리시대와 사회를 말하는 예술소재이자 도구 재료는 미디어아트나 사진 영화 따위가 우선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판의 적나라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들과 비교하면 필묵은 실재로 흘러가도 한 참 흘러간 물로 치부된다. 이런 맥락에서 난을 친다는 것은 옛 향수를 자극하거나 그냥 전통시대 매너리즘의 연장에 불과한 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난초는 말 할 것도 없지만 이제는 서양화보다 더 낯선 도구 재료나 소재가 되어버린 지필묵이나 사군자 서예를 들고 이 시대에 나온다 치자. 세상의 변화를 가장 잘 읽어내는 예술가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것들을 비틀어도 한참 비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때가 오늘날 아닌가. 요컨대 아무리 난을 잘 친다 해도 전통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쓰는 그 노고에 대해 찬사는 받을 지라도 예술성 자체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데에는 유독 인색한 것이 이 마당의 풍토 아닌 풍토다. 적어도 현대미술을 한다면 난초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따위를 전시장에 들고 나와야지 당연하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마력의 공간이다. 일단 벽돌조각이나 콘크리트 벽이라도 작가의 손을 거쳐 전시장에 걸리면 물질 스스로가 관객들에게 말을 한다. 소통이 즉발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전시가 작품과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일 바에야 이 작품은 '쉽게'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작가라는 입장에서 말 못하는 고통이 없을 수야 없다. 여하튼 화가가 자기의 철학을 그냥 말이 아니라'조형으로'말하는 사람이라면 그 조형언어의 본질이 되는 소재나 도구 재료의 선택은 작가의 예술생애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문봉선_蘭_지본수묵_46×70cm_2011

4 ● 이런 맥락에서 문화백의 난은 현대미술의 조형어법으로 보면 작가가 의도와는 관계없이 일종의 도발이자 고발이고 전위로 읽혀진다. 여기에서 문화백이 왜 난을 고집하고 있는지도 해명된다. 심산유곡에서 남이 알아주든 말든 홀로 향을 피우는 존재가 난이다. 그 고고함이 본성 내면에 숨은 도도함과 통한다면 문화백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집을 넘어 충분히 도발적이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 작가는 오십 남짓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난을 친지가 35년이나 된다. 이쯤 되면 난이 작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난초가 죽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빌딩 숲속에서 자동차 배기가스의 매캐한 냄새를 거부하며 피어나는 난의 향기라는 점에서 문화백이나 난은 더더욱 시세도 물정도 모르는 고집불통이나 무모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문화백의 난화어법 자체가 도발적이거나 전위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것과는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정통적이다. 난의 잎과 줄기며 꽃은 일경일화(一莖一花)의 춘란이던지 일경구화·의 혜(蕙)를 불문하고 전형적이다. 물론 그 안에서 난의 생태나 성격에 따라 다양한 필획이 자유자재로 구사되고 있지만 현란한 조형실험을 앞세운 전위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이것이 화보풍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문화백의 난은 실경(實景)의 사생(寫生)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서 화보 넘어에 있다. 물론 사의(寫意)만으로도 설명될 수는 없는 지점에 있음도 마찬가지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까운 역사에서는 희귀하게도 의재 허백련의 작품에서 이러한 맥락이 해명될 수나 있을까. 식민지(植民地)와 서구화(西歐化)로 점철된 한국의 근 . 현대기 미술이란 좀 거칠게 말하면 현란한 조형실험이어야 그나마 예술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서화나 필묵과 같은 전통미술은 서양미술에 치여 존재조차 희미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에도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시종일관 일명'작대기 필법'으로 정통 남화(南畵)의 전통을 '내적 혁신'을 통해 고수해낸 사람이 의재다. 그래서 미술사에서는 정통남화의 마지막 주자로 평가 된다. 더구나 남화라면 의례히 고도의 관념(觀念)과사의(寫意)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던 시절, 일본의 고무라 스이운(小室翠雲) 문하에서 하던 공부를 접고 정작 남화의 길을 금강산 사생(寫生)이나 밋밋한 전라도의 황토산에서 찾아낸 의재를 통해 문화백의 난초가 이해된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백의 공간경영 만큼은 난을 치는 정통필법과 대조적일 정도로 정통과 파격이 혼재되어 있다. 특히 그림과 글씨를 온 화면에 뿌리듯이 꽉 채우는 가하면 그 큰 공간을 한 줄기 S 라인 난과 꽃으로만 배치시키면서 극단적으로 텅 비우기도 한다. 급기야는 상하 좌우 대칭적으로 난을 심어 적막강산을 다이내믹한 화면으로 경영해내기도 한다. 여기에다 화선지나 한지는 물론 모시 비단과 같은 천이 먹과 만나면서 파묵(破墨) 발묵(潑墨)은 물론 윤갈(潤竭) 농담(濃淡)의 무한대의 먹색과 질감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내고 있다. 예로부터 남화 북화 구분의 근간이 결국 먹이냐 채색이냐의 여부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이러한 남화의 먹이 현묘(玄妙)한 동양정신의 고갱이가 된다고 할 때 문화백의 묵법은 특별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난화와 격이 없이 조선화된 왕법(王法)계통의 행초(行草)로 넘나드는 화제 글씨 또한 문화백 난화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서화가 하나인 문인화에 있어 작품의 성격을 마지막으로 결정짓는 것은 사실상 그림이 아니라 글씨다. 문화백에게 있어 글씨는 사실상 반풍수나 마찬가지인 우리시대 사군자나 문인화를 중심으로 하는 수묵화단에 그림이전에 글씨가 그림의 근본이 된다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정통필법으로 두루 넘나드는 그림과 글씨, 이를 토대로 한 다양한 묵법과 열린 공간경영, 사의 이전의 사생과 같은 이러한 덕목들이 문화백의 작품을 여타작가와 단연 차별적으로 보여준다.

문봉선_蘭_지본수묵_185×880cm_2011

5 ●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문화백의 정통 난화가 역설적이게도 결과적으로는 도발내지는 전위로 해석될 수도 있음을 보았다. 난이 살수 없을 지경의 정결(淨潔)하지 못한 현실 환경이나 또 사의(寫意)맹신에 빠져 정작 사실(寫實)이 실종된 오늘날 문인화단에서 문화백의 난은 존재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이고 전위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표면적으로는 문화백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지금까지 본대로 문화백의 붓끝이나 먹에서 도발과 같은 불순한 그런 냄새는 없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읽혀진다는 것이다. 마치 서예사에서 왕법(王法)에 반기를 들고 혁신서풍(革新書風)을 일으킨 성당(盛唐)의 안진경 서예의 성격 해석과도 같은 맥락이다. 생존당시 안진경은 왕희지의 전형적(典型的)인 서법에 반기를 들고자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작가의 기질지성이나 시대상황이 안법(顔法)을 왕법의 혁신이나 반기로 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안법은 시대를 뛰어넘어 소동파 미불 황정경과 같은 송(宋) 3가들이 자신의 혁신아이콘으로 해석해내면서 안진경은 왕희지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자리매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요컨대 문화백의 도발이나 전위 한가운데에는 사실(寫實)이라는 실천과 현장의 역사가 토대가 되고 있다. 그런대 알고 보면 우리시대 여느 문인화 작가와 달리 문화백에게는 화보(畵譜)나 사의(寫意)보다 난의 현장과 사실이 단연 우선된다. 이러한 정황을 문화백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 보자. "제주도가 고향인 나는 일찍이 난초를 접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봄이 되면 화분에 심은 춘란(春蘭)을 보았고, 가을이 깊어갈 즈음엔 서실 한구석에 피어있는 한란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필자에게 회고하고 있다. 작가에게 화보(畵譜)는 그 다음이었다. 요즈음 필자에게는 사군자판에서 자조(自嘲) 섞인 조로 '난초가 아니라 잡초다'라는 소리가 여간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에 와서 군자를 잡놈으로 추락시킨 원인 한 가운데에는 바로 사의(寫意)일변도에 빠져 시종일관 맹목적으로 화보나 스승의 체본을 베낀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이렇게 시작된 묵란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개자원화전』『정판교화집』으로 옮겨갔다. 스승 없이 옛 화보나 고화를 마냥 좋아서 흉내 내는 수준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화백 또한 우리시대 많은 난화작가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그쳤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언설은 왜 문화백인지를 알게 한다. "화보를 어느 정도 익혀갈 무렵이었다.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으니 난초의 잎은 실물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꽃은 내가 본 모양과 너무도 달랐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자만 중국과 제주 춘란의 꽃 모양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화보와 실제 꽃이 왜 다른가 하는 작가의 의구심에서 바로 문화백의 란의 존재가치가 확인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리 필묵이 죽고 미디어아트가 판치는 시대라고 하지만 문화백의 란을 전통시대 문인취미의 복고로 보고는 눈길은 단견으로 생각된다.

문봉선_蘭_견에 수묵_70×46cm_2011

6 ● 재삼 말하지만 사실 우리시대 문인화의 담론은 사의(寫意)에 절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사실에는 담을 쌓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실질이 없는 사의는 공허(空虛)하거나 무기력(無氣力)하다. 추사의「불이선란도」가 사의의 궁극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작가의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는 물론 달준과 추사, 그리고 작품을 둘러싼 사람간의 생생한 현장의 스토리가 살아있다. 더 나아가서는 문화백과 같은 나이 대인 인 50대 초반의 추사가 판교 정섭을 철저하게 내 것으로 만든『난맹첩』이 토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두가 합쳐져서 불후의 명작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불이선란도」의 이런 내력이나 유기적 관계망을 놓치고 있는것이다. 다시 문화백의 난으로 돌아와서 그의 난에서 사진을 찍듯 현장을 사생하는 태도는 일종의 리얼리즘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작가가 안면도에서 본 춘란에 대한『사생첩』의 기록을 다시 보자. "...그 밑 가시덤불 속에 군락을 이루어 많게는 한 촉에 10개 이상의 꽃이 띄엄띄엄 다소곳이 고개 숙여 피어있다. 어떤 꽃은 잎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꽃대만 솟아있고, 꽃은 연녹색을 띄며 대부분 서북쪽을 향해 피어있다. 잎은 강하고 짧은데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유연한 S자 곡선을 하고 있다. 꽃에 코를 대어보니 향기는 없고 혀에 붉은 점이 두세 개 찍혀있다." 난의 생태환경은 물론 꽃의 표정과 색깔 향기부터 잎의 모양의 묘사와 서술까지 그 상세함과 치밀함이란 난초 도감(圖鑑)도 이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線)이 아닌 획(劃)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압축하여 빼내는 문화백의 란은 추상(抽象)의 극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묵란(墨蘭)이야말로 용필용묵(用筆用墨)의 탄탄한 기초위에서 문자향(文字香)은 물론 한 치의 망설임이나 가필이 허용되지 않는 일수불퇴 하필(下筆)의 준엄함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여전한 나의 관심사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지금까지 본대로 문화백의 란은 사실과 사의가 하나가 된 말하자면 우리시대의 새로운 난화고 문인화의 경지를 열어젖히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맹목적인 사의와도 다르고 사진 같은 사실과도 다르다. 작가는 50대 중반 남짓한 삶을 살아오면서 난의 '현장'에서 태어나 살았고 그것이 유년부터 자연스럽게'화보'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사의와 사실의 반전을 거듭하는 현장'사생'의 궤적으로 이어져 오면서 손과 머리가 하나 되게 우리시대 난화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문봉선_蘭_지본수묵_42×205cm_2011

7 ● 요컨대 문화백의 란은 크게 보면 식민지와 서구화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의 근 현대미술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군자나 문인화의 생존을 위한 무기력한 전통답습의 종언을 선언하는 셈이다. 또 사진이나 영상은 물론 기계나 사이버시대 난의 존재가치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이기도 하다. 그것도 심산유곡이 아니라 빌딩숲속에 홀로 피워내는 것이기에 더 극적이라고 할 것이다. 마치 도연명이 "사람 사는 곳에 움집을 엮었으나(結蘆在人境) / 그래도 거마(車馬)의 시끄러움이 없네.(而無車馬喧) /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소?(問君何能爾) / 마음이 멀어지니 지역이 저절로 구석지지요.(心遠地自偏)"라고 읊은 대로 작가에게는 마음 한번 돌려 먹으니 서울 땅 빌딩 숲속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백은 그냥 화가가 아니다. 사생여행 중 어느 절 회벽에서 만난 다음의 글귀를 전하는 작가의 언설에서는 그냥 화가라면 차라리 붓을 놓겠다는 결기를 넘어 한 소식을 들은 편안함까지 묻어나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을 손질 할 줄 아는 이라면 굳이 화가가 아니어도 좋다"는 작가에게는 더 이상 난이나 붓이 둘이 아닌 경지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붓마저도 난 앞에서는 거추장스럽고 가식적인 것이다. 그래서 빌딩 숲 속에서 '난초 잎을 손질하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더욱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말청초 판교의 난은 울분(鬱憤)이라면 조선말기 추사는 선열(禪悅)이다. 구한말 망명객 운미의 난이 비애(悲哀)라면 일제강점기 이육사는 난을 치며 강철무지개와 같은 꺾을 수 없는 푸른 독립의 꿈을 다지고 다졌다. 그렇다면 우리시대 문화백의 묵란은 무엇인가. 그래서 벌써 다음 전시가 더 기다려지는 것은 필자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 이동국

Vol.20120314e | 문봉선展 / MOONBONGSUN / 文鳳宣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