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930d | 신장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15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수요일 휴관
스페이스 선+ Space Sun+ 서울 종로구 삼청로 75-1 Tel. +82.2.732.0732 www.sunarts.kr
길 위의 수행자 혹은 길을 찾는 사람 ● 삼매(三昧)를 찾아서 2007년 내금강을 다녀온 신장식은 만폭동, 보덕암, 표훈사, 장안사터 등 내금강의 아름다운 산하를 표현한 풍경화와 함께 <내금강 묘길상>을 발표했다. 북한이 국보 문화유물 제102호로 지정한 이 묘길상(妙吉祥)은 고려 말기에 묘길상암을 중창한 나옹(懶翁) 화상이 새겼다고 전해지는데 높이 40미터의 암벽에 불상의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마애불이 있는 터에 한때 묘길상암이 있었기 때문에 문수보살을 지칭하는 묘길상이라 불리고 있지만 불상의 상호(相好)와 내영인(來迎印)을 결한 수인 등으로 볼 때 아미타여래임에 분명하다. ●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이미 연꽃이나 만다라와 같은 불교적 특징이 드러나는 작업을 한 바 있고, 2001년의 개인전에서는 명상에 잠긴 작가 자신의 모습을 종이로 주조한 조각을 통해 불교에의 관심을 보여준 신장식이 불상을 그린 것은 묘길상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화면 속에 내금강을 찾은 관광객들을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이 작품은 불상 그 자체를 주제로 한 것이라기보다 불상이 있는 풍경을 실경으로 그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작심하고 불상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경주 삼화령에서 발굴된 미륵삼존불 중에서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있는 우협시 보살상으로부터 국보83호 보살반가사유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등 우리나라의 불상은 물론 중국 맥적산석굴의 보살상과 파키스탄의 간다라 유적에서 출토된 불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번에 그린 불상은 다양한 지역과 시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속에 우리나라의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석굴암 본존불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전시의 주제인 삼매에 집중하여 삼매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불상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 삼매는 고대 인도문자인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를 음역한 것이지만 그 뜻에 따라 정(定), 심일경성(心一境性) 또는 일심불란(一心不亂)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석가모니의 수행을 함축한 개념으로 특히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월광동자(月光童子)의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 붓다가 말씀하신 '일체제법체성평등무희론삼매(一切諸法體性平等無戱論三昧)'는 삼매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삼매를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삼매에 들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출가 이전부터 고타마 보살은 선정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출가 후에는 알랄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와 같은 브라만 수행자를 통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렀으나 그것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극단적인 고행을 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들어 마침내 성도했으므로 삼매야말로 자아를 초월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장식은 지극히 깊은 선정(禪定)에 든 불보살을 새긴 불상을 다시 그림으로써 그 삼매지경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고 있다.
길 위의 수행자 ● 언젠가 신장식은 자신에 대해 "내 인생에 50대는 길 위의 수행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로서는 그가 종교적 발심으로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의 길도 수행자의 길이며, 그림도 수행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찾으러 세상을 그렇게 다니고 동서고금을 헤맸나? 조금의 빛이라도 표현해낸다면 좋겠다. 나는 그림으로 '희망의 아리랑'을 노래하고 싶다."라고 했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수행자는 '길을 찾는 사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 그는 수많은 길을 걸었다. 그 중에서 라사로부터 카트만두에 이르는 티베트 여행과 두 차례에 걸친 인도여행, 그리고 2011년 시안(西安)에서 출발하여 하서회랑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간다라지역에 이르는 실크로드 순례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수행자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진정한 길 위의 수행자인 석가모니와 만났다. 석가모니야 말로 길에서 태어나 길이 있는 숲에서 성도하고, 무수한 길을 다니며 자비로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길에서 열반한 분이시지 않는가. 많은 불경 중에서 '길 위의 수행자'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화엄경』의 「입법계품(立法界品)」일 것이다. 입법계품의 수행자이자 구도자인 선재(善財)동자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誓願)의 실천자인 보살만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난 53선지식에는 보살, 비구, 비구니, 여신도는 물론 불교에서 외도라고 배척해온 브라만, 출가자, 선인, 신을 포함하여 왕, 장자, 의사, 뱃사공, 부인 등의 속인과 소년, 소녀, 심지어 매춘부로 알려진 여인도 있었다. 이처럼 불교는 구도행의 길 위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도에 이를 수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불교의 이러한 개방성과 혁신성이 신장식으로 하여금 길을 걷게 유도한 연기(緣起)일 것이다. ● 신장식이 걸었던 길은 신라에서 당으로 유학을 했던 혜초(慧超)가 구법을 위해 걸었던 길이었다. 그 전에는 법현(法顯)과 현장(玄奘)이 그 길을 갔다. 그 외에도 남북시대 중국으로 유학한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과 담징(曇徵), 백제의 겸익(謙益)과 혜총(慧怱), 신라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등도 한반도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갔고, 당의 수도인 장안에서 출발한 아리야발마는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날란다에서 율장과 논장을 연구하였으나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날란다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오늘날에야 여행프로그램도 있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옛날 구법승들처럼 목숨을 걸고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장식은 그들이 이미 지나쳤던 길을 다니며 석가모니는 물론 구마라습(鳩摩羅什), 마라난타(摩羅難陀) 등의 선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불상을 그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주공간에 편재하는 불성(佛性) ●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불상을 그리는 것일까? 그것도 이미 잘 알려진 문화유산이자 예배물인 불상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불상이 출현했을 때부터 붓다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미 '32상 80종호'란 규범이 적용되었던 바 이 규범은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을 제작할 때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또한 부처님의 성스러운 상호(相好)는 아무나 함부로 만들 것이 아니므로 지극한 신앙심과 수행자의 청정한 마음으로 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장식이 그린 불상은 분명 예배대상이 아니다. 불상을 그리는 것은 예술가로서 그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붓다로 향한 경건한 외경(畏敬心)이 외현(外顯)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했을 때 그 시신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한다. ●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의 몸을 수습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아난다여, 그대들은 근본에 힘쓰고 근본에 몰두하여라. 근본에 방일하지 말고 근면하고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러라. 아난다여, 여래에 청정한 마음이 있는 크샤트리아 현자들과 장자 현자들이 여래의 몸을 수습할 것이다." ● 임종의 때가 가까워지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이여,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라" 라는 최후의 유훈을 끝으로 반열반에 들었다. 마침내 석가모니 붓다가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자 제자들은 붓다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여 일주일 동안 모셨다. 붓다의 열반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급히 오고 있던 마하카샤파(Maha Kasyapa)를 기다리던 제자들은 일주일이 지난 후 붓다의 시신을 마쿠타반다나(Makutabandhana) 사원으로 옮겼다. 마하카샤파가 도착하자 그의 지휘 아래 제자들은 붓다의 시신을 인도의 전통 장례의식에 따라 화장하여 사리를 수습하였다. 석가모니의 열반을 슬퍼하지도 말고,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마지막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온 여덟 명의 왕과 장자, 제자들은 그 사리를 나눠 가져가 각각 스투파를 세우고 그 속에 사리를 모셨다. 바로 이 순간에 불교미술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아소카(Ashoka) 왕은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를 다시 수습하여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 개의 스투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한 동안 붓다의 형상을 새긴 불상을 대신한 수레바퀴(法輪), 붓다의 발자국, 보리수 등으로 붓다의 존재를 상징하던 무불상(Aniconism)의 시대를 거쳐 쿠샨 족이 인도를 지배하던 기원 후 1세기경 마투라와 간다라 지역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불상이 나타났다. ● 헬레니즘과 로마,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과 인도조각의 전통 아래 형성된 마투라 양식은 각각 고유한 양식으로 발전하다 이민족이 세운 쿠샨왕조를 무너뜨리고 다시 인도인들에 의해 수립된 굽타왕조에 이르러 다시 한번 비약적인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석가모니가 성도한 후 범천의 권청(勸請)으로 첫 설법을 했던 사르나트의 박물관에는 굽타시대인 5세기경 제작된 사르나트 양식의 아름답고 우아한 불상이 있다. 물론 이미 불교는 아소카 왕의 전제적인 포교정책에 의해 인도 전역은 물론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남방과 서아시아, 헬레니즘 제국으로까지 전파되었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인도로 침입했던 쿠샨 인들도 불교로 개종한 후 각별히 불교를 신앙하였으며, 카니슈카 왕의 대대적인 호법, 포교정책에 따라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 기록상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으로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苻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면서부터였다. 이때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들고 왔다고 하므로 그를 통해 불상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불교전래설은 지배계급에 의한 공식적인 수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민간에서는 이미 그 전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침류왕 1년(384년)에는 인도 스님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을 거쳐 백제로 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 역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거치며 어렵게 불교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서라벌에 가람과 탑파가 기러기처럼 많았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빠른 시간 안에 불교를 국가종교로 확립하고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큰 사찰을 세웠다. 그 후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불교를 신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통치이념으로 삼아 무수하게 많은 가람, 불상, 탑을 조성하고 불경을 사경(寫經)하고 불화를 그렸다. ● 이러한 문화유산은 신장식의 작품에서 모티브이자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룸비니로부터 전정각산, 보드가야, 사르나트, 왕사성, 기원정사, 죽림정사, 대원정사, 쿠시나가르, 날란다 유적과 함께 산치대탑, 아잔타, 엘로라석굴 등을 돌아보고 여러 지역의 박물관에서 불상을 친견한 그는 비단 한국의 불상에만 그치지 않고 간다라와 마투라 양식의 불상, 굽타시대의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 중에서 삼매지경의 불상을 골라 그것을 다시 자신의 회화 속에 재현해 놓고 있다. ●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이 불상들을 재현하는 것에만 그쳤더라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모방하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했던 이데아의 모방인 현상계를 모방하는 화가와 무엇이 다를 바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우주에 편재하는 불성(佛性)을 상상했다. 사르나트에서 석가모니가 행했던 첫 설법을 나타낸 초전법륜인을 결하고 있으나 깊은 삼매의 상호를 보여주는 간다라불상의 배경에 조선 초기의 천체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그려놓고 그 좌우에 용주사(龍珠寺) 범종의 천의를 휘날리며 승천하고 있는 비천상을 배치한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좌우의 두 비천이 석가모니의 초전법륜, 즉 자비의 말씀을 우주공간으로 전달하는 형국으로 이것이야말로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시각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처럼 우주공간에 편재하는 불성은 타원형의 성운(星雲) 가운데 불두를 배치해 놓은 작품이나 삼면화 형식의 작품에서 더 극적으로 고양된다. 화면을 세 개로 나눠 좌우에 성덕대왕신종의 날렵한 비천상을 그리고 그 중앙에 무념무상에 이른 해탈의 경지와 중생제도의 염원이 서린 오묘한 미소를 띤 국보83호 보살반가사유상을 반신으로 그려놓은 작품은 무수한 별자리로 수놓인 우주공간의 블랙홀과 같은 깊은 심연으로부터 보살이 문득 돌출하고 있는 듯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부여 못지않게 그의 작품에서 회화적 고려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불상의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화령 미륵삼존불의 협시보살을 그린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강석의 질감이 느껴지도록 표면에 종이죽을 바르고 음영을 표현했다. 그래서 불상의 화강석 질감은 강조되고 있으나 평면적이며 선적으로 표현한 비천과 판화로부터 오려낸 촛불을 붙여 재현과 표현, 입체와 평면, 구상과 추상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화면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맥적산석굴의 북위대에 조성된 불상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데칼코마니한 듯, 서로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내용에서 불교의 불이(不二)의 사상을 떠올리게 만들 뿐만 아니라 화면의 공간감을 통해 형상이 우주공간으로 녹아드는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화면의 중앙으로 갈수록 형상은 사라지고 어스름하고 추상적인 빛의 파동이 파장을 일으키며 중심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혹은 소리의 파동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시청각적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사르나트에서 남산으로, 다시 자기에게로 ● 스스로 길 위의 수행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신장식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여행은 단지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휴지(休止)의 시간이거나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제공하는 보상(報償)이 아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고, 그 대상이 떠오르면 계속 몰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산치대탑에서 무불상시대 석가모니부처가 보리수나 발자국, 법륜으로 표현된 것을 발견했고, 탁실라박물관에서 헬레니즘과 로마미술이 불교와 습합하여 나타난 간다라불상을 발견했다. 사르나트박물관에서는 5세기 인도 불교미술의 걸작과 만났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을 때는 이 길에서 죽어간 무수하게 많은 구법승들의 고행과도 만났다. 탈레반이 출몰할지도 모를 간다라지역의 길기트에서 마애불을 보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 결코 고행은 아니었다. 어쩌면 실크로드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실크로드에서 돌아온 후 그는 혼자 경주 남산으로 갔다. 서산마애불과 같은 부조의 경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시간을 달리하며 그곳을 찾기도 했다. 비단 불상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전거(典據)를 찾아 열심히 불교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그의 대화주제는 온통 불교로 가득하다. ● 금강산여행이 열리기 전 금강산을 그릴 때도 그랬다. 금강산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조사, 연구하며 그것을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이러한 열정은 금강산 개방 후 수많은 현지답사를 통해 그를 '금강산화가'로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 열정이 과도하면 집착이 될 수 있지만 불상을 그리는 것도 어떤 원력(願力)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신앙심에 이끌려 예배의 대상인 불상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불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깃들어있는 깊은 사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상을 방편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이러한 앎에의 욕구란 동기가 작용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분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아리랑으로부터 금강산, 그리고 불상에 이르기까지 신장식의 그림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없다. 그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찾는 것은 '희망의 아리랑'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분명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빛과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에 대해 도달하기 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위빠사나), 집중할 수도 있고(사띠), 그것조차 여의고 지극히 무념무상한 상태(사마디)에 들 수도 있다. 예술의 길과 선정의 길은 다르다. 그 다름이 예술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궁극으로 가고자 하는 것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불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 최태만
Vol.20121115a | 신장식展 / SHINJANGSIK / 申璋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