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심심함

김형석展 / KIMHYUNGSEOK / 金炯奭 / painting   2012_1024 ▶ 2012_1106

김형석_El Aleph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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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고도 GALLERY GODO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82.2.720.2223 www.gallerygodo.com

깊은 심심함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의 첫 문장이다. 독특하게도 그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 온 억압과 규율에 근거한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현재는 유효하지 않으며 적어도 20세기 말부터는 과잉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 오늘의 사회는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토대로 조직된 억압사회에서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자아는 이제 복종적 주체에서 성과주체로 변모한다. 성과주체는 외부의 감시와 압력을 자기 안에 내면화해서 자기 주도적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으려는 절대경쟁은 자유롭다는 착각의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결국,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를 마모시키며 탈진상태에 이르도록 만든다.

김형석_깊은 잠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12

이러한 자기소진은 필연적으로 신경성 질환들로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근대까지의 타자에 대한 면역학적 시대는 종결되고 21세기에는 자기착취로 인한 신경증적 증상이 사회의 주된 병리학적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 물론 우리사회는 완연한 후기근대에 접어든 서구사회와는 달리 아직 냉전이 종식되지도 않았고 전근대적 문화도 여전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화된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세계의 지배적인 표준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변했으므로 그의 주장은 새롭고 유의미한 문제 제기다. 부피는 얇지만 무거운 내용의 이 책이 개인적으로도 깊게 다가온 이유는 몇 년 전 나 자신이 겪어냈던 병의 뇌관을 투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김형석_from the Silence 08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53×45.5cm_2011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이전처럼 단순한 외적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오직 스스로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그러므로 우울증의 주된 원인은 세계와의 갈등이라기보다는 과잉 자기 관계로 인한 것이며, 스스로 소진되어 가는 자기 질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증상의 치유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각과 반성도 중요한데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깊은 심심함'이라는 언표를 통해 제시한다. 가령, 요즘의 멀티태스킹능력은 후기 근대 문명의 진보로 인한 발달된 인간의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는데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동시적 행위의 실행은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경계 태세 기법이다. 최근의 사회 변화와 그로 인한 주의 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처럼 퇴행시켜 야생적인 환경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김형석_from the Silence 09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좋은 삶에 대한 관심과 가능성은 이렇게 퇴행하는 사회의 구조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자체에 대한 집중과 절박함 때문에 점점 뒤로 밀려나고 희박해지고 있다. ● 예술과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와 여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를 가능케 하는 환경은 과잉주의에 의해 점령당하며 사라져 가고 있다. 대량의 정보와 그것의 동시적 처리, 속도와 재미가 중요한 상황에서 창조적 과정에 필수적인 심심함은 허용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김형석_from the Silence 09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깊은 심심함을 통한 사색적 삶의 회복은 예술행위에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이제 희미해졌지만 그렇다고 사소함과 장식에 머무르는 것을 받아들이긴 여전히 어렵다. 지금, 예술은 결핍으로 허덕이기 보단 과잉 속에서 질식하기 일보직전이다. 그것은 시대의 구조를 지나치게 받아들인 자명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상품세계의 변화속도와 매커니즘이 우리의 세계와 의식을 재편하고 지배하는 이 시대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되고 현란한 세계의 굉음에만 의탁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여전히 느린 예술은 유효하다. 그 점이 오늘, 붓을 잡고 있어도 괜찮다는 유일한 위안이다.

김형석_from the Silence 11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현대회화는 존재론적 고투를 담고 있는 인간의 대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전체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경험의 축적으로 구성된 잠재성의 한 단면들 속에서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점차 현상 너머의 차원을 엿보고 싶고, 그것을 그리고 싶어 하는 형이상학적 갈망은 표현행위의 필연적인 종착역인 것 같다. 그건 '세계'에서 '세계들'로 나아가려 하는, 존재로 고착되지 않고 존재들로 확장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의지에 의한 것이다.

김형석_from the Silence 12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다만, 우리가 뚫고 가야 할 관문은 기 드보르(Guy Debord)가 지적한대로 '현실사회의 비현실성의 심장'인 스펙터클(spectacle)의 사막이다. 뜻밖에도 우울증은 나에게 세계의 실재를 잠시나마 보여주었고(물론, 또 다른 착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 결국, 내게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나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간혹, 우리 삶에 주어진 장면과 장면 사이로 벌어진 틈에서 세계의 무한한 얼굴들의 일부를 엿보고 그것을 기억을 통해 시각적으로 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감당해야 할 시간과 존재와 상황들의 무게를 잘 견디어 내는 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 ■ 김형석

Vol.20121024h | 김형석展 / KIMHYUNGSEOK / 金炯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