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rix 매트릭스

전인아展 / CHUNINAH / 全寅雅 / painting   2012_1017 ▶ 2012_1023

전인아_flowing body in fluid_실크에 혼합재료_92×78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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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아 홈페이지_inachun.com

초대일시 / 2012_10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공아트스페이스 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31번지 Tel. +82.2.735.9938 www.gongartspace.com

자유로운 드로잉, 낙서 graffiti(?) ● 낙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구와 순간적인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작가 전인아의 작품은 이러한 자유로운 낙서로 어린이의 얼굴에서 자신의 아이들 모습을 그린다. 작품 속의 아이는 작가의 아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기도 하다. 또한 그림 속의 여인은 작가의 어머니이면서도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족간에 동일시하는 생각은 사물간에도 혼성되고 동일시하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조개와 어머니, 자개, 바다 등은 사실 같은 의미를 나타내지만, 작품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수사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수사는 같은 의미를 일상적이거나 정해진 단어로 제시하기 보다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가는 것을 지시한다. 작가는 수사에 기초한 생각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즉 다른 것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어서 매우 시적이면서도 열린 의미체계를 보여준다. 다시 어머니와 아이의 주제로 돌아가면, 어머니에서 아이들로 이어지는 존재에 대한 동질성과 동일한 정체성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있는 아카시아 나무와 같은 새로운 존재적인 동일성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이러한 모녀간이나 가까운 사이를 동일시하는 심리적 특징은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존재적 특성으로 발전된다. 더욱이 동일한 형태들이 때로는 작가인 '나'와 그의 어머니, 때로는 다른 여인들 등으로 여러 인칭들을 가로지르며 다른 존재들을 지시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같은 것'이면서도 '다른 존재'를 제시하는 것이며, 다른 생활이면서도 같은 생활이 되고 다른 인물인 동시에 같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것은 다른 것, 다른 문장을 연결시키는 접속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하면, 작품내의 하나의 존재나 작품은 다른 것들과 연계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제시된다. 이것은 어쩌면,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같은 리좀(rhizome)적 체계로 보여지기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존재가 야생초처럼 다른 개체와 연결되어 형성되고, 그럼으로써, '나 – 너 – 그'와 같은 인칭간 개체간의 관점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존재는 열린 형태, 자아를 가지며, '나는 너이다'라는 문장처럼 '수사'가 실체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좀은 완전히 열려있어,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의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작품도 얼핏 보면 '기관 없는 신체'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어머니'의 모태적인 측면이 있어서 열린 유기체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전인아_door in your eye_캔버스에 혼합재료_지름 25cm_2012

이러한 존재적인 형태들은 낙서처럼 자연스러운 드로잉 방식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고 서로 중첩된다. 이러한 형태들이 그려내는 여러 정형적이거나 비정형적인 존재들은 하나의 고정된 것과 같으나 작품「Display_ shell_#3-6」에서 보면, 실제로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 다른 형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유동적이다. 또한 채색된 화면 밑에 부분이 보이는 것 같은 투명한 표현은 불투명한 부분과 이웃하여 둘 사이의 이질성이 확보한다. 또한 겹쳐지는 형태로 나타내어 존재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키고 있다. 이러한 밀착은 또 다른 존재간의 경계를 없애는 역할을 하며, 앞으로 전개할 '모성'과 연관된다. 낙서가 실제로 자유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작과 끝의 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낙서는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욕구'에 따르는 작업이다. 현대미술이 낙서와 같은 이미지를 생산한 것은 매우 오래된 사실이다. 자유롭고 충동적인 의미들을 형상적으로 표현하며 '욕망'을 형상화시키는 것은 현대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작가는 어떤 예술세계를 새롭게 개척했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작품 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 이야기 속에서 열린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a 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b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등 같은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서 작품간 구별이 되지 않아 서로 열린 작품의 형태를 갖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혹자들은 작품의 내용적 측면에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점을 작가의 예술적인 창조성으로 이해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서사구조에서 이러한 반복을 금지하고 있으나 작가는 오히려, 이 부분을 새로운 창조의 지점으로 생각한다. '반복'은 프로이드(Sigmund Freud)나 리요따르(Jean-François Lyotard)도 지적하였듯이, '욕망'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욕망은 모든 질서와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열어준다. ● 그의 작품에서 낙서는 작가의 생활을 형상화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작품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와 일상이 작품인 경우, 이 두 경우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작가적 충실함을 '일상=그림'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자신의 충실함은 일상적인 삶이 그림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작품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는 인위적인 예술적 작품보다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열린 작품, 예술적 목적에서 자유로운 작품을 형성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다 보면, 작품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를 결정하는 것, 그리고 작품 하나의 끝과 시작을 물리적으로 한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완성-미완성'의 틀을 열어놓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미 미술사에서 도나텔로 시대부터Non–finito라는 '미완적인 완성'의 개념이 있었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미완성으로 작품을 놓아두며 작품을 한정하지 않는 부정(不定, indetermination)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와 달리 작가는 일상을 작품형식으로 조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옮겨놓는 일상은 끝도 시작도 없이 파편화되어 나타나기도 하며 무한한 행위의 반복이 합리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세계이다.

전인아_oval-shell #11-1_실크에 혼합재료_52×40cm_2011

또한 작가는 이러한 일상에 기초하여 작품 '하나'라는 정체성을 열린 양태로 이해한다. 작가는 작품 하나를 독립적으로 놓을 수도 있으며, 그 작품과 함께 다른 여러 작품을 한 데 묶어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하나이면서도 여러 개인 작품, 여러 개이면서도 하나인 작품은 '작품 상호간 형성되는 작품'의 interstics 한 측면을 가진다. 작가는 그러한 측면에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 작품을 이야기할 때, 인용했던 Tyche (τυχη)라는 용어, 즉 '우연'이라는 말을 이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Tyche가 우연의 사건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톰블리의 작품이 항상 이러한 우연의 힘으로 행운(bonne chance)을 가져왔다고 이해했다. 또한 이 Tyche는 불확실한 우연(aléatoire)이 아니라 영감(inspiration)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바르트는 우연의 행복으로서 나타나는 창조적인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가 전인아에게서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에게도 순수한 우연의 창조적인 힘도 있으나 그 외에도 다른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 예는 Tyche를 용어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다. ● 이 용어는 사전적으로 (A Balley, Dictionnaire du Grec–Francais) '생각하지 않는 우연', '의도되지 않은 것', 그리고 '원인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 단어는 완전히 고려되지 않은 우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고려된 선택을 포함하며 인간행위를 기술하기 위한 것, 프로아이레시스(proairesis, προαιρεσιç)한 이야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프로아이레시스(proairesis)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EN III 5, 1113a) '욕망'을 뜻하며 '신중히 고려하는 대상'이 된다(deliberation). 이는 '선호'와 '선택'을 의미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작품은 '우연'의 과정이며, 욕망에 의해서 선호된 – 선택된 – 것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인아_bird on a lotusleaf_종이에 혼합재료_50×70cm_2012

장식, 추억, 어머니(Mère/Mer) ● 자개를 이용한 가구는 과거 한국여자들에게는 필수품이자 부의 상징이었고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수집대상이었다. 작가는 어릴 때 보았던 어머니의 자개장을 기억하며 인간문화재가 쓰다 남은 재료들을 갖고 작업하여 그 진가를 더욱 강조한다. 어떠한 점에서는 버려진 쓰레기인데 역설적으로 매우 귀한 쓰레기이다. 조개의 다양한 색은 그 색이 여러 색조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조개가 갖는 '어머니'의 의미, 모태의 의미들을 포함한다. 소재를 통해서 '어머니'라는 의미가 은연중에 자리하여 더욱 '어머니'의 향기나 추억으로 들어가게 한다. 추억의 자리는 캔버스 위에 올린 자개로 더욱 깊게 형성되는데 특히, 검은 바탕이거나 암갈색조 바탕의 배경은 동양의 나전예술의 의미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일견, 동양적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외양과는 달리, 작가는 전혀 다른 측면을 부각시킨다. 마치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은 어둡게 처리되고 그 어렴풋한 생각 속에서 분명하게 떠 오르는 잔상들은 자개로 화려한 빛으로 발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은 진정한 동양의 자개장을 구현하거나 그러한 전통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 패턴에서도 차이가 있고 형태적인 데에서도 차이가 있다. 사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단서가 된다. (예, 작품 「세 개의 검은 달_1」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기억의 기록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새로운 층위의 작품을 연결하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흐트러져 있기도 모여있기도 하며, 때로는 새를 연상시키는 형태나 나무 연상하게 하는 형태, 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바탕 등 다양한 존재들이 '대략'의 파편화된 모습을 갖는다. 이러한 것은 특히 정확한 형태이기보다는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는 '모티브', 즉 하나의 단서로서 제시된다. '단서'는 새로운 관점이다. ● 실제로 그의 장식장의 형식은 나전칠기처럼 미적인 장식이기보다는 과거의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의미들을 지시하고 있다. 지난 서정, 추억 속에 있는 아픔과 슬픔, 즐거움과 희망, 어딘지 혼자 있는 아이가 놀 것을 갖고 무한히 반복하는 모습, 외톨이 어린 소녀의 등, 특히 그 아이가 오랜 시간 바라보았을 자개장을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형태들을 모으거나 흩어 놓는다. 이 형태들은 단서로서의 조각이어서, 생각에 들어가게 하는 '접속사'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전인아_세개의검은달_지름 40cm×2, 지름 30cm_2011

작품에서 나타나는 유동적인 형태들(예, 「세 개의 검은 달_1」, 「세 개의 검은 달_2」) 은 일상적으로 리듬으로 이야기하고, 이것은 생명을 나타나는 심장 박동(Jousse)의 의미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작품에서 도처에 뭉쳐져 나타나는데 그 중에, 그려진 대상들은 간접적으로 모태를 이야기한다. 하나의 태(態)에서 나오듯이 뭉쳐져 있다. 다르게 보면 그의 형상은 아직 미분화되었거나 분화되고 있는 과정이다. 미분화된 것은 작품 「세 개의 검은 달_1」에서는 새와 아이가 꼴라주된 것처럼 '함께 있고', 조개와 같은 형태들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형태들이 같이 붙어 있다. 이러한 것은 의식적으로나 존재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며 열어놓는 것이다. ● 작가는 불어를 인용하며 바다의 mer (메르)는 어머니 mere(메르)와 닮아 더 인상적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유는 작품에서 어머니나 여성 등의 개념을 바다와 동일시 하는 생각에서 나타난다. 이는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으로 나타나는데 자유로운 생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속의 자유로움은 비교적 중력적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간을 부유할 수 있다는 것, 가벼운 움직임이 있는 것 등을 느낄 수 있다. 그 속에서 작가는 바다를 비유한 생명의 비밀과 그것이 갖는 희망과 행복, 고통 등을 그린다. 작가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유로운 생명의 고향이며, 생명체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중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움직임의 자유가 있다. 또한 작가에게는 양면적이 경험이 있다. 과거, 익사할 뻔했던 경험은 '바다'라는 공간이 생명의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공포의 공간, 죽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바다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공포를 갖는 모순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이는 분열적이면서도 혼성적 감정의 공간을 형상화하는데 점에서 매우 포스트모던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이러한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과 동시에 성장하는 아이를 보며 느끼는 상실감이나 어머니에 대하여서도 사랑의 대상이자 단절감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이중성을 갖는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paradox, 한 생각, 즉 모순되는 것이 문자적으로는 para와 doxa '서로 병렬적으로 함께 놓여있는 생각 또는 의견'인데 이것은 뛰어난 것, 일상적이지 않은 비상한 것(extraordinary)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기다리지 않은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동화 같은 세계가 서로 엮여간다. 나전의 형태는 “바다를 표상하면서도 조형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이 어머니의 존재는 그 생산과 창조의 공간으로서의 메트릭스(자궁)의 형태에서도 나타나며, 마치 사물들이 잉태되듯 뭉쳐있는 모습을 갖는다. 사물들이 덜 분화된 상태에서 연결되는 것은 태아 상태의 모습처럼 서로 연결된 형태이다. 그러한 점에서 리좀적이기 보다는 작가는 유기적인 모태의 의미가 강하다. 작가도 강조하듯 '세포분열과 같은 생명의 세계'가 이러한 공간에서 그려지는 것 같다. 작품 「sphere with snake」에서도 그리고 작품 「Display_ shell_#7-9 」 에서도 응축된 형태들로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그렇다고 풍경적인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마치 자궁의 태아처럼 응축된 형상을 보여준다. 이 형상들은 모든 다양한 사물들이 하나의 근원에서 퍼져 나오는 세계를 나타낸다. Sym-bol/ 자유로운 열린 작품 ● 작가의 근래 작품은 물 속에 있는 무성의 액체와 유사한 작품들이 많다. 작품 「arm under fluid」의 경우, 그것은 다른 작품 「shell_#13」과도 연관된다. 족자 작품 「three panels with fish」 중 둘째 작품에서는 딸이 되기도 하고 본인이 되기도 한다. 셋째 족자에 우는 여자의 몸은 뱀의 형태를 갖는다. 뱀을 비롯하여 조개, 바다 등의 여러 다양한 이미지들은 일반적인 상징으로 사용되며, 작가의 내면적인 의미와 욕구를 형상화시킨다.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꼭 '상징'의 본래 의미보다는 그것이 갖는 다른 의미들을 '함께' 제시 (sym-bolon)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의 작품은 하나를 제시하면서(bolo) 동시에 (sym) 다른 요소들을 함께 던져주며 – 덩어리로 함께 가져오는 것 (symbolo) 을 의미하며 – '이웃하는 의미'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유일한 존재나 의미'가 아니라 다른 것과 함께 하는 것이다. 작품의 sym-bolon(symbolo)은 아이나 식물, 그와 유사한 형태들, 동물과 자연과 유사한 모티브들이 한데 섞여, 여러 의미구조들로 제시된다. 사실 여러 구조이기보다도 한 곳에 '뭉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들이 한 곳에 뭉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로 뭉친 이미지는 의미가 분절되지 않는다. 그 곳에서 단어나 그와 유사한 하나의 생각들, 그리고 그것이 문장을 이뤄내는 것이 매우 동시적인 구조로 나타나서, 의미체계로서는 일종의 혼돈 상태를 만들어낸다. 관람자가 그 뭉쳐진 개념 중에 몇 부분을 선택해서 임의적으로 읽게 된다. 그것은 해석의 자유이며 의미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선호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다. 이는 예술가의 현대적 임의성이 극대화시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전인아는 작은 작품을 위주로 제작한다. 작품이 작은 이유는 손에서 항상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업의 기초는 '자유로운' 작업이다. 이 자유는 실제, 작품으로서의 시작과 끝과 같은 공간적 개념적 '경계', 그 정체성을 부인한다. 정체의 자유, 작품 경계의 자유, 작품제작의 시작과 끝의 자유, 작품 한계의 자유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유'는 작품 opera(oeuvres, works) 라는 작업의 개념을 부정하며 열어놓는다. 새로운 제시는 마치 음악가, 삐에르 불뢰즈(Pierre Boulez)의 작품 「괄호」(Parenthèse)들이 제시하듯이, 서로 사전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박자와 함께 시작되지만 곧 삽입부가 계속 이어져, 이 부분은 연주자의 의도에 의해서 작품이 연주된다. 이러한 특징과 유사하게 작가 전인아는 형태들을 다 한정하지 않고 열어놓아 관람객이 그것을 해석하도록 자유를 준다. 또한 작가의 작업은 루치아노 베리오의 플롯독주곡처럼 음렬과 음량만을 놓는 방식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참고 움베르토 에코, 열린작품). 이러한 열린 작품의 특성은 롤랑 바르트가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해서 지적했던 인터뷰(Tel Quel)에서 잘 나타난다. "(…) 이 연극을 창작할 때, 브레히트는 의미를 부여했지만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확실히 그는 연극을 (…) 문학언어로 서술하기만 하지 정식화하지는 않습니다. 브레히트의 모든 작품은 관객들이 은연중에 스스로 구체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어 해결책을 찾도록 합니다. 다른 연극과 달리 여기서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니피에(signifié)의 연극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란, 앞으로 그 의미를 해독해 나가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signifiant 의 연극입니다.)" 즉 지금까지 논의했던 많은 지점은 시니피앙을 제시할 뿐, 그 의미(signifié)는 열어놓아, 그것의 해석을 관람객의 몫으로 열어 놓고 있어서 열린 작품으로서의 조형적 창조성을 이해하게 한다. ■ 강태성

전인아_부인의내실_실크에 혼합재료_52×51cm_2012

매트릭스_journey for a live / 틈 / cell-cleavage ● 나의 작업은 살아있는 세포처럼 쉼 없이 움직이며 그 생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journey)이다. 작품 속의 형태는 자연친화적이며(ecological) 생물형태적(biomorphic)인 외양을 지닌다. 주된 형상이 있으며 이를 따르는 개체들이 움직임의 모체(matrix)를 중심으로 해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유기체들은 상하좌우로 확산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모양자체는 연속성을 지니지만 근원(매트릭스)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제나 이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성질을 지닌다. 작업마다 등장하는 인체, 새, 물고기, 껍질의 형상은 매트릭스의 은유이다. 여기서 매트릭스는 생성의 근원이나 발생지를 의미한다. 때로는 인체의 부분이나 다른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은 생물 형태적 추상에 가깝다. 친숙한 대상인 자연물을 가시화해서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고 확산시켜, 개개의 작업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고자 했다. 자연에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 아닌 순응하고 융화되는 과정처럼 개개의 대상은 그 안에서의 조화가 가장 중시된다. ● 나에게 작업과 작업 공간은 생활의 연장이다. 생활과 직업이 구분되지 않은 17세기의 자영업자처럼 작업행위는 생활과 연결된다. 즉, 밥 먹는 식탁에 그림 도구와 개인적 감정 표출이 공존하는 것이다. 신생아에게 의식주가 전부인 것처럼 본인에게 작업이란 최대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제약도 따르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나의 작업에서 인체의 표현은 모호하다. 생물학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적 특질(gender)을 나타내지 않는 상태이다. 즉, 여성인 동시에 남성일 수 있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무성의 인체는 직접적인 표현을 꺼리는 여성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뒷모습으로 존재하는 2차 성징 전후의 어린 소녀는 불안정한 중성적 상태를 보인다. 따라서 모호한 표현은 '여성성'이 존재한다는 전제아래 여성성의 특징을 남성에 비해 '모호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설정하여 이를 시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무성 혹은 중성지대에 놓인 여성은 모호하지만 보다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기에 작업이 지니는 환상(fantasy)적 특성을 고조시킨다. ●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축적된 다양한 흔적들은 이미 쓰여 있는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쓴 양피지(palimpseste)와 유사하다. 여러 번의 가필과 수정, 삭제를 거치면서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시점과 공간감이 형성된다. 간접적으로 모태를 은유하는 나무뿌리, 자개, 민달팽이(括胎蟲, slug)와 같은 자연물의 형태를 화면에 배치하거나 직접 사용한다. 드러내는 방식 역시 직접적이 아니라 그리고 지우는 행위의 반복이다. ● '드러내기_지우기'의 반복을 통해 대상과 배경은 중간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반투명성은 유동성을 지닌 액체의 물성을 지닌다. 투명성(transparency)과 불투명성(opacity)의 중간지대에 위치하는 반투명의 화면은 유동(流動的)인 성질을 지니며 작업의 흔적을 오롯이 보존한다. 내 작업의 유동적 공간은 '숨 쉴 수 있는 공간(Breathing Space)'이며 투명(Transparent)과 불투명(Opacity)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다. 반투명의 화면 또는 유동적 공간은 순간의 우연성과 나의 감정에 의존하는 드로잉과 붓질들이 소통하는 장소이다. 제스쳐와 대상들이 공존하며 보다 호흡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윤활유다. '투명성'이란 빛에 의해서 보이는 비물질적 단계와 유사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비물질적(Non-Material)으로 재현되는 것과 일치한다. 반투명성(Semi-Transparent)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다. 자개(mother of pearl)의 반짝이는 특성은 가볍지만 존재감이 강하다. 그것이 내가 작품 속에 자개를 사용한 이유이다. 자개라는 소재가 가진 장식성, 공예품의 이미지 때문에 그것은 일상의 친숙한 시각적 소재이면서 사용하기 쉽지 않은 이중성을 지닌다. 나는 자개자체의 성격보다 화면 속 아이콘의 하나로 이를 사용하여 그 외의 색상이나 배치, 질감의 변화로 통일감을 주었다. 오브제는 화면에 다른 물성을 병치(juxtaposition)하여 얻는 활력이나 의외성의 효과를 주기도 한다. 특히 긴장감을 유발하는 수단으로 즐겨 사용된다. "낙서는 나에게 일상적인 것이며 호흡이다. 그는 마음의 안으로 들어가게 하며, 자기를 위한 만족이다." ■ 전인아

Vol.20121017f | 전인아展 / CHUNINAH / 全寅雅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