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IN MY MEMORY

김승영展 / KIMSEUNGYOUNG / 金承永 / installation   2012_0920 ▶ 2012_1020 / 일요일 휴관

김승영_WALKING IN MY MEMORY_벽돌, 이끼, 잡초, 크리스탈레진, 노란색시트지_가변크기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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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2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WALKING IN MY MEMORY"기억이란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옥타비오 파스)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잊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다만 지금의 사정상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아끼던 여자 제자나 주변 여인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옮기고 「순아」 , 「경자」, 「혜정」, 「예선」과 같은 각각의 그녀들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다. 록밴드 토토(Toto)는 유난히 여자 이름을 제목으로 딴 노래가 많은데, 「Rosanna」, 「Anna」, 「Pamela」, 「Angela」, 「Lea」와 같은 그 곡들은 멤버들이 지금껏 사랑해왔던 여자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 작가 김승영은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드러내지 않고, 단지 그들의 이름만을 늘어놓는다. 참 간단하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작가는 이것을 놀라울만한 계획으로 매번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 이 작업은 물량과 시간과의 싸움이다. ● 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총합이라는 가정에서 김승영의 미술이 시작된다. 이와 같은 현상학적 존재론은 예컨대 전화번호부에 저장해놓은 사람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맺은 친한 사람들의 명단만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 취향과 같은 정체성을 대강 알 수 있는 현실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사진, 조각, 평면, 영상, 오브제 설치라는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조각 연작은 떨어지는 물방울이 일으키는 아름다운 파문을 형상화하고 있다. 찰나의 인지는 동심원의 물결을 만들며 동시에 단단히 굳어있다. 물 위의 작은 요동 앞에 관객은 딱딱한 기억의 깊숙한 밑을 파헤칠 준비를 한다. 옆에 있는 캄캄한 방을 비추는 세 줄기의 빛은 금이 간 비석 형상을 비추는 램프와 LCD 모니터다. 비석을 암시하는 듯한 검은 돌 조각, 그리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촬영한 영상 작업은 한 개체의 죽음 이후 그에 대한 망각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으로 대치된 예술의 언술(Memento Mori!)이다.

김승영_WALKING IN MY MEMORY_부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거대한 비석 모노리스(Monolith)를 연상시키는 검은 조형물은 갤러리 공간을 두 쪽으로 나눌 듯이 가로막고 서있다. 음악가 오윤석이 작업한 사운드가 깔리는 가운데, 여기에는 작가가 기억하는 중요한 이름들이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혹은 폭포수처럼 내려와서 아래에 수조 속에 잠긴다. 그 낱낱의 이름들이 이뤄내는 스펙터클은 다른 어떤 이름들로 대신 바꾸어 놓더라도 장식적인 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남들이 볼 때엔 그냥 이름일 수 있지만, 그 이름의 주인공들은 작가에게 있어서 곧 자신과 같으며, 그들 대부분은 지금 현대 미술계의 최전선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사회로부터 격리된 현대 예술은 그 이름들을 특별하지 않는 작가 개인의 기억으로만 냉담하게 가둔다. ● 그리고 벽돌작업. 이름 작업의 기본적인 틀을 쉽게 이해하게끔 하는 평면 작품을 옆에 두고 무수히 깔린 벽돌은 우리를 경탄스러움과 애틋함으로 몰아간다. 여기에는 작가 본인의 온갖 감정이 그 제공자 역할을 한 이들의 명단과 함께 새겨져 있다. 고유명사와 일반명사, 그리고 함축된 문장이 새겨진 벽돌들의 위치는 무작위로 결정된 건 아니다. 이것도 각각의 뜻을 품고 있다. 어떤 이름은 깨끗한 벽돌에, 또 다른 이름은 낡아서 금이 가고 색 바랜 벽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김승영 작업의 이미지를 파란 색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그는 노란 색에 닿아 있다. 엘튼 존 「Goodbye Yellow Brick Road」의 무의식적인 연상일 것 같지는 않지만, 노란 색으로 바뀐 환경은 벽돌 하나하나마다 그 빛을 스며들게끔 한다. 기억이라는 필름의 몇 층 뒤에 가려진 기억은 노란 색에 의해 아련한 과거를 벽돌의 틈마다 피어 오른 이끼와 함께 전한다.

김승영_항해_벼루석_19×48×37cm_2012
김승영_WALKING IN MY MEMORY展_갤러리 분도_2012
김승영_두개의 물방울_과테말라대리석(백색, 검은색)_25.3×50.3×20.5cm_2012

과거를 매개하는 노랑 혹은 주황빛은 오래되어 변색된 옛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톤이다. 작가는 동시대의 몇몇 회화에서도 발견되는 이 시각적 은유를 이번 전시에서 끌어 썼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 개인의 온전한 죽음은 사후 남아있는 가족사진에서 망자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했다. 역사에 남을 위인들의 얼굴이야 다음 세대 사람들도 기억할 것이므로, 김현의 말은 매우 소시민적인 정서를 반영한다. 나는 김승영의 미술을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김현의 소시민적 문학론의 테두리와 겹친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창하고 무거운 담론 대신, 사소한 인간관계에 시선을 둔다. 『문학과 지성』으로 대표되는 문단을 배경으로 한 소시민적 문학론이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과 맞서던 시기를 지나면서,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의 포스트(post)논쟁이 수입되어 들어왔고, 미술 이론 역시 순발력있게 "포스트 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을 생산해냈다. 김승영의 미술 또한 포스트 민중미술이 진화된 패턴으로 볼 수도 있다.

김승영_기억_단채널 비디오, 수조, 자석, 이끼, 앰프, 스피커 2개_2012
김승영_WALKING IN MY MEMORY展_갤러리 분도_2012

나는 '포스트'가 이전 개념과 이후 개념을 완벽히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원 개념을 더 진지하게 계승하는 본다. 그 내용이란 비판을 비판하는 태도에 있다. 메타비평과도 같은 맥락에 있는 이 태도와 구분되게 단절된 것은 형식적인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1990년대 문학계에서 소시민이 하나의 계급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미술에 그대로 적용해서, 과연 현대미술가들이 하나의 공통된 집단으로서 뚜렷한 목소리를 내는가에 관해 살펴볼 수도 있다. 예술가는 자본과 권력에 박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묘한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계급의식을 김승영 작가도 가지고 있다. ● 미술 이론과 교육 현장에서 그 흐름을 읽어내는 가장 흔하고 안일한 관점이 해체주의다. 현대 미술의 정황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읽어내면 편하긴 한데, 이 관점으로는 김승영의 작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작가의 작품에는 주체가 훼손되거나 상실되어 해체된 게 아니라 훨씬 적극적이고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나'를 빼면 김승영의 작품은 성립되지 않는다. 노란 벽돌길 위를 산책하든, 잔잔한 물결이 이는 수면을 유영하든 그 모든 주체는 기억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예술가들을 평범한 소시민으로 인지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고양된 기예와 정신의 결정체로 인식한다면, 작품의 구성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거창한 예술 역사의 계보를 보여주면서 그 가운데 본인의 좌표를 찍어 넣을 것이다. 김승영은 미술과 자기 자신 사이를 잇는 관계, 일상에서는 숨겨놓은 격정어린 심정을 세상에 펼쳐 보이려는 야심, 이 두 가지를 혁신적인 작업에 담아놓고 있다. 최근작 또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전형이다. ■ 윤규홍

Vol.20120923f | 김승영展 / KIMSEUNGYOUNG / 金承永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