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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0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2층(Café di KiMi)_10:30am~11:00pm
키미아트 KIMIART 서울 종로구 평창동 479-2번지 1,2층 Tel. +82.2.394.6411 www.kimiart.net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으며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부산물(결과물과는 의미가 다르다)이 생긴다. 그 부산물은 미추, 행, 불행, 좋고 나쁜 것과는 다른 그 자체의 부산물이다. 나의 작업은 모든 진행의 부산물로 나온 것들이다." (이성민)
관계와 생명성의 미학(성민의 철 조각)-진행형으로서의 선(線) ● 이성민은 십년 넘게 철을 깎는 조각을 해오고 있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불현듯, 그가 작업하는 것을 옆에서 직접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의 작가노트에서 '과정'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귀찮았을 법도 한데, 다행히도 작가는 나의 긴급한 재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시에 본 작업 장면을 여기에서 간단히 스케치해본다. 두터운 작업복 차림의 작가는 산소 절단기를 들고 철 덩어리와 대면한다. 산소 절단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불과 철이 부딪치면서 작은 불꽃들이 끝없이 명멸한다. 작은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단단한 철은 어느 순간 액체가 되어 마치 촛농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붉게 달아올랐다가도 이내 본연의 색을 되찾는다. 이러한 가운데 작은 덩어리들이 잘려 나가고, 차갑고 매끈한 철 표면에는 생채기 같은 선이 수없이 그어진다. 불이 지나간 흔적이다. 그러고 보니 철이 녹아서 떨어지는 모양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이성민의 철 조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적 특징은, 바로 선(線)에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조형의 최소단위인 점이 연결된 것에 다름 아니다. 점은 선이 됨으로써 방향성과 움직임을 갖는다. 선은 연속된 흐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그리기 행위와 연관되며 형을 상상하게 만드는 단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성민의 선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동원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선은 종종 형을 해체하고, 끊임없이 고정된 형태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부와 저항에서 생동감이 나온다. ● 선이 강조되는 양상은 그의 드로잉 작업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초상조각들을 보면서 흥미롭게 느낀 점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인물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인물은 옆에서 볼 때 어느 새 어두운 표정이 된다.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는 초상조각의 인상은 다름 아닌 이성민 작업의 선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人.間. ● "처음에 관계가 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나와 너』중에서) 이번 전시에서 이성민은 세 그룹의 작품을 선보인다. 가족, 지인의 초상조각인 「friend」와 말 조각인 「racer」, 춤추는 인물의 모습을 담은 「dancer」이다. 얼핏 보기에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이 세 가지를 묶을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인간'이 아닐까 싶다. 이는 이성민의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일찍이 대학시절부터 그의 관심주제는 생명과 순환, 그리고 인간이었다. 「검은 나무」라는 제목의 작품을 통해 목조로 인체를 제시하기도 했었지만, 그 이후로는 철 조각에 올곧게 집중하고 있다. 2000년부터 한동안 철로 된 환봉을 깎아 가늘고 긴 인체표현을 제시했던 이성민의 작업에서 새와 말 형상이 새롭게 등장한 계기는 가까운 이의 죽음과 관련된다. 2008년 2월, 작업실 동료가 세상을 떴다. 대학 동기이면서, 등산도 같이 하고, 머리도 깎아주던 절친한 형이었다. 무엇보다도 작업에 대해 끝없이 토론했고, 가장 가까이에서 날카로운 조언을 해주던 그였다. 그 자신 예술가로서 사진과 드로잉, 입체작업을 다양하게 시도했고 책읽기와 글쓰기를 즐겼으며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던 사람. 그랬던 그가 갑자기 갔다. 4년 반이 지났건만, 이성민은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산다. 인간형상을 다루던 이성민이 2009년 제2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새 작업은 동료가 남긴 마지막 드로잉에서,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말 조각 역시 그의 사진작업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새와 말은 이성민이 그린 고인(故人)의 초상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이는 「dancer」 연작에서 나는 이성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 왜 하필이면 춤추는 사람일까?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사진 속 모델의 매끈한 몸은 과연 인간의 신체일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그들은 하나같이 매우 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탐미적인 이미지들이 이성민의 조각으로 옮겨지면서 어느 새 거친 표면의, 생채기 가득한 신체형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dancer」 연작이야말로 이성민의 무의식 세계의 근저를 엿보게 하는 것 아닌가 싶고, 이 글에서는 이 정도로 더 이상의 논의를 유보하지만 앞으로 그 전개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 할 작업인 것 같다. 어찌되었든 간에 「friend」, 「racer」, 「dancer」 이 세 시리즈 작업은 모두 인간관계, 사람 혹은 인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므로, '인간'이라는 그의 오랜 주제로 수렴 가능하다.
부정 ● "예술작품은 작가가 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바와는 관계없이 그 처리방식에 따라 현명하거나 어리석다." (아도르노 T.W.Adorno, 『미학이론』중에서) 이성민의 드로잉과 조각을 보면서 내내 '부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화 중에 작가는 독일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를 언급했다. 세상을 떠난 형과 함께 리히터의 인터뷰를 보면서 울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유형의 회화를 보여주는 리히터, 어찌 보면 회화라는 장르가 펼쳐낼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리히터는 '양식은 폭력적'이라면서 하나의 고정된 양식을 거부한 예술가이다. 그의 양식원리는 바로 양식파괴인 것이다. 그런데 이성민이 리히터를 얘기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였을까. 평소 내게 리히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노년의 화가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부정을 자기작업의 끝없는 추동력으로 삼고 있는 대표적 예술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미술비평가 벤자민 부흘로(Benjamin H.D.Buchloh)는 리히터를 아도르노의 부정의 미학과 연결짓고, 그를 가장 아도르노적인 작가라고 쓴 바 있다. ● 현대 철학자 아도르노는 기존 서구철학의 동일성 개념과 주관위주의 사유를 비판하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모호성과 짜임관계를 논한 이론가이다. 예를 들어 '연필을 들고 사유하기'라는 아도르노의 비유를 보자. 쉽게 풀어서 얘기하자면, 이것의 의미는 내가 글을 쓰지만 내 사유를 펼쳐내는 도구 연필에 의해 내 사유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내 사유가 연필로 흐르고, 연필이 다시 내 사유로 흐르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끝없는 순환구조를 뜻한다. 여기에서 나라는 견고한 주체의 의미는 소멸된다. 이성민이 자신의 초상작업에 대해 "내가 아는 나를 지우고, 내가 아는 친구를 지우려고 했다."라고 말하면서 철이라는 물질을 대면하는 과정 자체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아도르노의 미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미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라고 얘기했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뿐만이 아니라 현대 미술가들은 눈으로 보는 미술언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표현을 갈망했다. 왜 이러한 역설이 존재할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형언어가 좀 더 진정성을 갖고, 강렬해지고, 풍성해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근래에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이 있었냐는 물음에 이성민은 주저없이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꼽았다. 벨기에 개인전 당시 방문했던 퐁피두센터에서 몬드리안의 대회고전을 보았다면서 그의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에너지 같은 게 뿜어져 나오더라고 얘기했다. 자연주의 미술의 역사적 한계를 뛰어 넘고자 했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작품과 이성민의 작업은 외관상 얼른 연결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성민과 몬드리안의 작업태도만은 왠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저항, 보이는 것 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작업들과 비교해볼 때 이성민의 이번 작품 속에 보이는 일관성 가운데 변화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전에 비해 형태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우주의 근원적 질서와 조화를 예술에 담고자 했던 몬드리안이 정신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예술과 삶의 일치를 추구했듯, 이성민에게 예술과 삶은 따로 있지 않다. 작가는 자기 작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아내라고 말한다. 언젠가 아내를 주제로 한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덧붙인다. 어찌 보면 그의 작업과 삶은 이렇듯 맞닿아있다. 그리고 삶과 함께 가는 예술이야말로 힘을 갖는 것이 아닐까. 작업실을 나서는 내게 그는 '뛰어난 예술가' 보다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첫 개인전 이전부터 꽤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작가이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새삼 느낀 것은 그가 여전히 순수하고, 어찌 보면 무지 욕심 많은 작가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작업과 삶이 함께 가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소망을 말했던 것이라고 본다. 인간과 생명성에 대한 이성민의 변함없는 애정이 앞으로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고, 또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지 큰 기대를 갖고 바라볼 것이다. ■ 김보라
Vol.20120911f | 이성민展 / LEESUNGMIN / 李成珉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