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 II (Emerging artist from topos)

이성민展 / LEESUNGMIN / 李成珉 / sculpture   2010_0804 ▶ 2010_0810

이성민_Nude_철_54×57×24cm_2010

초대일시_2010_0804_수요일_05:00pm

토포하우스 기획 신진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_TOPOHAU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2층 Tel. +82.2.734.7555 www.topohaus.com

인체는 많은 미술가들 특히 조각가들이 다뤄온 주제다. 인체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으며 또는 작가의 관점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인체작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이성민은 인체라는 주제를 불을 이용하여 쇠를 깎아냄으로서 괄목할 만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지금까지 줄곧 다뤄왔던 '누드'라는 작품 연작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 덧붙여 그가 쭉 관심 가져왔던 인간본연, 실체의 모습에 줄곧 관심을 가져온 그가 이번에는 '새'에 관한 작품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주제와는 달라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의 사전적 의미는 '척추동물이며 앞다리는 날개로 변형되었고, 입은 부리로 되어 손의 구실을 하며, 온몸이 깃털로 덮인 온혈동물이다.'라는 것이다. 새는 또한 '비상', '자유', '순수', '동경', '죽은 자의 넋'등의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그는 새를 작업함으로서 새라는 형상에 또 어떤 작가만의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작품의 소재로 '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 7월 더운 여름, 장마와 불볕더위, 그리고 모기떼들 속에서 행해지는 철을 산소용접기로 녹여 내는 뜨거운 행위들... 이건 참을성을 넘어서 그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나와는 별개인 듯 초월하지 않고는 오랜 시간 견뎌낼 수 없는 일을 그는 잠을 아껴가며 하고 있다. 그 어떠한 성가신 일이나 무던히 견뎌야 하는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이성민_Nude_철_74×54×29cm_2010
이성민_Nude_철_30×50×19cm_2010

그에게 작품을 만드는 그 지난한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작품을 만들어가며 어떻게 완성도를 높일까? 하는 생각을 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집과 관련된 소소한 일들, 마누라(나)에 관한 생각들, 일상에 관한 생각을 하며 철을 녹여 낸단다. 그렇다면 그가 만든 작품은 의도된 것이 아닌 그의 일상적인 삶과 그로부터 수시로 드나드는 생각들이 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봐야겠다. 즉 '누드' 연작들은 단순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 아니라 그의 일상이며 그의 가족이며 그의 친구, 동료들인 것이다. ● 철은 한번 깎아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형태를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는 하염없이 철을 깎아낸다. 그리하여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은 작가의 현재모습을 닮은 마르면서 군더더기가 없는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는 날렵한 형태의 인체를 만들어 냈다. 그는 날렵한 인체 형태뿐만 아니라 작품에 필요하다면 팔, 다리도 서슴없이 잘라내었다. 그리하여 그가 만들어낸 인체는 양쪽 팔이 없는 것은 기본이며 다리가 한쪽이 없거나 양쪽 다리를 모두 없애기도 한다. 작품에서의 머리는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표정을 읽을 수 있은 눈, 코, 입이 없다. 그럼에도 크게 손상된 인체 부위가 눈에 그슬리지 않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의 핵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작가의 배려인 것은 아닐까? 인체가 가진 전체적인 표정과 감정은 인체의 포즈와 불길이 지나간 철의 흔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 그는 처음에 대략적인 인체포즈를 구상하고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계속 깎아나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또는 만들어지게 되는 예상하지 못했던 작품의 결과를 추구한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탄생한 작품은 사람의 눈길을 머물게 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성민_Bird_철_103×76×57cm_2010
이성민_Bird_철_65×55×51cm_2010
이성민_Bird_철_77×57×29cm_2010

'새'작품을 본 나의 첫인상은 민첩하고 날이 서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만든 '새'를 보면 얌전히 날개를 접고 있는 새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새란 날개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크며 자기 몸뚱이보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푸른 창공을 날아야 새답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만든 새에서 보이는 높이 솟아오른 날개, 활강하듯 쭉 펼쳐져 있는 새의 몸짓은 그 의미가 남달라 보인다. 마치 작가가 그렇게 일상에서 날아오르고 싶어 하는 몸짓인 듯하다. 새의 날개는 부드러운 미풍을 타는 부드러운 깃털을 가진 새의 그것과는 달라 보인다. 수많은 뜨거운 불길이 지나간 흔적들에서 거친 바람, 파도, 뿌연 먼지, 또는 적진에서 헤쳐 나오는 처절한 날갯짓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작가도 평온한 일상과 평온한 생각 속에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완성된 새의 모습은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지만 그가 새를 만드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은 또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생각, 현실에서 오는 여러 스트레스들, 마누라와 아이생각, 새는 작가 그 자신으로 날아오르는 새를 통해 자신이 서있는 위치와 그리고 날아올라야 할 그곳을 끊임없이 생각했을 것 같다. 외부적인 복잡하고 머리 아픈 생각들 속에서도 그는 작품을 끝없이 만들어 나간다. ● 평온한 생각과 마음이 아닌 복잡한 생각과 현실들이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그가 바란다. 평온한 호수에 던져진 돌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변화를 줄 수 있음을... 더운 여름, 그것보다 더 뜨거운 작업을 그냥 묵묵히 해나가듯 그렇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새의 모습과 같이 '순수' 그 자체이므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의 작품관은 그의 일상만큼이나 소박하다. 일상의 고단함이 그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아직 젊다. 그의 작품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갈지 기대가 된다. 많은 경험, 많은 책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더 많은 사유를 통하여 그리고 농축된 생각의 기록들을 통하여 더 깊고 더 넓은 작품 세계를 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소통을 위한 작품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윤명순

이성민_Young Man_철_36×73×19cm_2010

이성민은 불로 쇠를 녹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왜냐면, 그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우면 오히려 낫다. 그러나 늦가을에도 1~2시간 불대를 잡고 나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한다. 내가 그의 옆에 있으면서 알게 된 점은 그가 책임감이 강하고, 낯을 많이 가리고, 말솜씨가 후지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어쩔 땐 지독하리 만치 인내심을 부려, 이건 인내를 넘어 집착이 되고, 병이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하염없이 쇳덩이에 불을 갖다 댄다. 누더기 가죽을 덧 댄 청바지, 아! 냄새, 그 더러운 바지를 입고 한 여름 뙤약볕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문제가 많다. 이러한 설정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딱 좋다. 불확실한 미래와 삶의 고단함을 안고 사는, 고독한 모더니스트의 날갯짓? 아니면, 노동 집약이라는 또 다른 전략을 들고 나온, 현대 작가의 뻔 한 전략? 그래서, 그는 미련하다. 그리고 무식하다. 뻔히 들통 날 짓을 - 화상도 입고, 내게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구박도 받고 그러면서 - 한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상황 설정은, 설정 자체로도 쉽게 오해 받고, 쉽게 판단되고, 그리고 정말 심각한 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의 행위에 감동하여 정말 감동하는 것이라고 믿고 진짜 감동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 하지만, 그러기엔, 턱... 하니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약간 어려운 말로 그의 작업에서 존재자가 아닌 존재론이 읽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한 말인데...(하이데거에 대해선 따로 주석을 달기로 해야겠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고, 몇 작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무슨 득도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전부 다 이겠냐? 몇몇 작품, 그리고 어떤 것은 그 작업의 어떤 부분에서, 예를 들어 다리 전체에서 무릎아래 정강이 부분에서만, 등 뒤 오른쪽 허리쯤에서... 마치, 바르트의 스투디움이, 사진의 그것처럼 읽힌다. 그러니까 다시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넘어가, 그의 작품에서 명사가 아닌 동사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해가 가득한 설정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한 불대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 나는 그와 작업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한번은 비아냥거리듯 말을 건넨다. "형태를 버려~ 왜 안 버려! 형태를 버리면 형태가 없냐? 이 바보야!!..." 인내심 강하고 말솜씨 후진 그는 딱히 반박하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 송왕섭

Vol.20100804g | 이성민展 / LEESUNGMIN / 李成珉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