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er's Daughter

이림展 / LEERIM / 李林 / painting.photography   2012_0622 ▶ 2012_0701

이림_Beyond Max Ernst(penis envy) no.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photo by Suk Jung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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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23_토요일_04:00pm

후원 / 경기도_광주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은미술관 Young Eun Museum of Contemporary Art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8-1번지 제4전시장 Tel. +82.31.761.0137 www.youngeunmuseum.org

작가 이 림은 지극히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대상을, 혹은 의미를 퍼포먼스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다시 사진으로 넘나들며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 극작가 겸 소설가 '안톤 체홉' 의 인용구 중, '좋은 작품은 여러겹의 레이어가 있고, 깊이의 장치가 있다' 라는 구절을 보면, 이 림의 작품과 절묘하게 일맥상통한다. ● 이 림의 작품을 바라보면, 사진은 회화 같고, 회화는 사진 같기도 하여 그 경계선을 나누기엔 분명 모호함이 있다. 작가는 구스타프 모로, 막스 에른스트와 같이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작가들, 혹은 구전이나 신화, 성경 속 오래된 스토리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관심들이 작품으로 스며들어 작가만의 색으로 새롭게 표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중 분명히 다른 점은, 구스타프나 에른스트의 경우 여성과 남성이 늘 같이 있는 구도를 많이 표현하였지만, 이 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강하면서도 때로는 섬뜩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 림은 어떠한 방식으로 작품 속 이야기를 풀어내고 상기시켜 주는 것일까? 작가는 작품을 통해 현 시대의 이슈 뿐 아니라 지극히 일상 속 이야기 중 놓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이는 작가의 개인사나 범인 (凡人)들의 보편적인 것으로의 연결이 되기도 하고, 문학, 역사, 신화 속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 림의 작품 속에 가장 많이 표현되는 색을 보면 White, Beige, Black 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 유독 Black이 눈에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 (구약성서 1장 1절) 중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는 구절 처럼, 모든 색의 기본도 어쩌면 Black 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림의 Black은 한 가지 색이 아닌 다양한 느낌의 색을 혼합한 것인데, 이는 곧 모든 색을, 나아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색이라는 상징성을 지니며, 모든 매개체에 연결, 적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Black과 White, Beige로 감정이나 감성의 상반된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고, 점점 더 이성적인 부분으로 가까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 더욱 주목할 부분은, 기존의 작품 이미지 위에, Blue 와 Black의 선과 색면으로 덮는 과정을 통해 작품 속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는 영은창작스튜디오 입주기간 동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적 표현이며, 기존에 보여주었던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가는 소통의 통로가 되는 과정과도 같다. ● 이번 『이 림 개인展_Painter's Daughter』은 작가의 의도처럼 작품이 감상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부터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일상, 나아가 사회 속 거대한 이슈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이러한 작가의 노력은 개인적인 추억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작품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보는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감상자들과 작품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데 충분하다. ■ 영은미술관

이림_retrospective (surrealistic painting no.3)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Copyrightⓒ. 2012. Rim Lee. All Rights Reserved

딸들의 욕망을 위한 축제의 장 ● 이림의 '화가의 딸' 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을 차용한 것과 사진, 드로잉과 추상회화 등이다. 그 자체가 화가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작품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와 모성을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모성은 고정된 기표가 아니라, 붙잡을 수 없는 실재의 역동적 과정과 밀접하다. 신비 또는 잔혹과 연결될 수 있는 초현실주의적인 변형(metamorphosis)의 과정은 형상의 유무와 관계없이 관철된다. 관객은 색조와 형태, 스케일의 차이 속에서도 변형의 출발이 되는 참조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신부의 의상」(1939)이다. 원작은 붉은 모피를 두르고 새의 탈을 쓴 중세 회화에 나옴직한 기이한 몸의 비례를 가진 여성이 거울이나 부러진 창 같은 상징적 도상과 함께 등장한다. 미술사가들은 이 수수께끼의 여성을 당시 에른스트의 연인이었던 캐링턴, 또는 죽은 여동생이라고 추측한다. 그 누구이든, 새로의 분장, 또는 새의 의인화는 연인에서 신부로, 또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이를 매개하는 여성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 많은 유산의 과정을 통해 겨우 태어난 여동생을 가진 이림의 작품은 죽음과 여성에 얽힌 오랜 상징주의와 연결된다. 이림의 작품에서 여성, 또는 모성은 삶과 죽음의 주재자이다. 에른스트의 작품에서 붉은 망토와 마스크를 착용한 여성은 화면을 지배하는 기념비적인 형상을 가지며, 순결한 신부의 다소곳한 모습이 아니라 압도적 위용을 가진다. 에른스트의 작품은 이림의 작품에서 반으로 나뉘어 진 주변화 된 성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남근적인 여성, 또는 양성적인 여성으로 변모한다. 반쪽의 역할만을 담당하지 않는 여성성은 기괴하면서도 파괴적이다. 작가는 가이아나 아테나 같은 강인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여성성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유교적인 집안에 태어나, 친척이 모두 여자인 상황에서 아들의 역할까지 맡아야 하는 기대 속에 자라난 작가에게 남근 선망은 무의식에 깊이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31살이 아니라, 거의 13살처럼 보이는 앳된 외모는 그러한 기대를 감당하기에는 다소 벅차 보인다. ● 이러한 실제상황과 주객관적인 기대치의 차이는 작품이라는 대안의 세계 속에서 해소하게 된다. 이림의 작품에서 여성성은 두드러지지만, 그것은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타자화 된 여성성, 즉 열등한 반쪽의 여성성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형적인 여성상이 역전된 것을 모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한 존재인 것이다. 생산자로서의 화가는 단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존재로 고양되어야 한다. 이림은 평소에 즐겨 읽는 책 『카자르 사전』(밀로라드 카비치)에 있는 구절을 소개 한다 ; '나는 어머니의 삶을 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한 시간씩 거울 앞에서, 연극배우처럼 어머니 역할을 연기합니다...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에 들 때에도 그렇게 합니다. 열정을 느낄 때,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어머니가 됩니다...지금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새롭고 더욱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 이림의 작품이 주는 강하면서도 위협적인 느낌은 상당부분 아름다움과 비밀스러움을 동시에 내포한 여성상과 밀접하다. 에른스트의 작품은 이림의 작품 속에서 변형되긴 했지만, 여성의 힘이 발원하는 두 가지 근원은 연속적이다. 이림의 작품은 변모의 과정이 더 강조되어 있는데, 그것은 도상과 의미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면서, 아름다움을 숭고함에, 비밀스러움을 그로테스크에 근접시킨다.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의 정적인 질서는 이림의 작품에서 느슨해지거나 더 가속화된다. 작품 「the surrealistic painting no.3」(2011-12)은 「신부의 의상」을 대칭으로 배열한 것인데, 화면 상단의 눈 부분은 세 개로 증식되었으며, 화면 하단은 남녀의 성기가 합체된 듯한 이미지를 이룬다. 자극적인 색은 빠졌지만, 차용된 원작에 내재된 모호한 성적 암시는 괴물 같은 식욕을 가진 섹슈얼리티로 변모되었다. 거기에는 감싸 안는 것인지 삼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에이리언적인 모성의 기표들로 가득하다. ● 작품 「the surrealistic painting」(2010-2011)에 나오는 여성상은 케잌 위에 얹혀 진 장식 인형처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지거나 녹아내릴 듯하다. 궁정 풍으로 완벽하게 꾸며진 여성은 달콤하게 분해될 것처럼 보인다. 작품 「the condition of surrealistic painting no.1」과 「the condition of surrealistic painting no.2」(2010-2011년)는 줄줄 녹아내리거나 허물어지는 초코 케잌의 부분 같은 모습으로, 움푹하고 불쑥한 여성적/남성적 형태로 쌍을 이룬다. 모호한 유동적 요소로 뒤범벅이 된 형태들은 접촉이나 충돌로 야기된 경계의 와해를 나타내며, 몸과 관련해서는 곧장 성이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전거가 된 「신부의 의상」에서 망토부분이 심하게 뭉개진 형태의 작품은 망가짐, 뒤섞임, 개체의 와해 등을 암시하며, 털 망토라는 물신적 대상에 내포된 은유를 남김없이 실현한다. 마네킹 또는 사이보그같은 여성이 두른 치렁치렁한 모피코트는 대표적인 마조히즘의 물신이다. 물신은 환상의 대상이고 또한 환상 속의 사물로 정의된다. ● 마조히즘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1870년)이다.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연구한 『냉정함과 잔인성』에서, 사드와 마조흐의 스타일을 양적 되풀이와 질적 긴장감으로 대조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욕과 관련된 파괴본능을 내포하지만 욕망의 방향만 다를 뿐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매저키스트의 불안은 쾌감의 무한한 기다림과 강렬한 고통의 기대로 나누어진다. 마조히즘은 기다림의 상태로, 고통, 처벌, 또는 굴욕이 만족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부인(否認), 서스펜스, 기다림, 물신숭배와 환상은 모두 마조히즘이라는 특수한 성좌를 구성한다. 매저키스트는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그 현실을 환상으로 전이시키는 부인에 영향 받는다.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방어 기제로서 부인은, 현실을 인식하는 바로 직전의 순간에 그 현실을 얼어붙게 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위에서 정지된 장면들은 마조흐 예술 특유의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마조흐에 의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날개옷을 입고 꿈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뿐이다. ● 매저키스트는 환상 속에 정지되어 있는 이상을 계속 안전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세계를 부인하고 정지시킨다. 들뢰즈는 마조흐의 모호하고 숨 막힐 듯한 분위기,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장면들의 강렬한 묘사 등을 들면서, 그것이 바로 환상의 예술임을 주장한다. 이림의 작품에도 마조흐의 예술 같은 창백하고 묘한 분위기가 있다. 모노톤의 색채는 암시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묘사가 있지만 대체되거나 얼어붙음으로서 외설성이 배제되고 암시적인 효과만이 남는다. 마조히즘에서 실제로는 내려치지 않는 채찍이나 칼, 육체를 드러내지 않는 모피, 피해자의 몸 위로 영원히 내려오고 있는 여성의 발뒤꿈치, 이 모든 것은 움직임을 넘어서 생과 사의 근원에 최대한 접근한 심오한 기다림의 상태를 말한다. 이림의 작품들 역시 정지된 움직임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있다. 대칭형의 배열은 원작에 내포된 순간 정지를 보다 안정적인 정지로 변화시킨다.

이림_Beyond Max Ernst(penis envy) no.2 photo by Suk Jung Min

원작에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지만, 그 형태를 거의 남겨둔 부분은 모피이다. 모피를 두른 이림의 도상은 마조히즘의 이상이 드러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여성과 관련된 마조히즘의 이상은, 냉정함-모성-엄격함-차가움-감성-잔인성이라는 말들로 요약될 수 있다. 마조흐의 장면들에서 박해자인 여성은 조상이나 초상화처럼 정지된 자세로 얼어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마조흐의 여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잘 발달된 신체에 자신만만한 성격, 친절함과 순진성이 강조되는 순간에도 오만한 의지와 잔인한 성향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마조히즘에 내재된 엄격한 약속, 또는 규칙은 제의의 과정과 유사하다. 성과 제의는 모두 금기(경계) 위반에서 오는 폭력과 신성함을 불러일으킨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파열이 몰고 오는 폭력이 에로티즘의 근본이다. 그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해 버리고 싶어 하며 죽음에 직면하고자 하는 염원은 희생제의에서 달성되는데, 예술이 가져다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제의는 외적인 폭력이고 애정행위는 내적인 폭력일 뿐이다. ● 불길한 괴물이자 강력한 여제사장 같은 이림의 작품 속 여성은 과격한 변모를 가능하게 하는 힘, 그리고 힘의 관통과 연관된 두 가지 성(性, 聖)이 존재한다. 에른스트의 꼴라주 작품에서 출발한 말의 탈을 쓴 작은 소녀가 등장하는 작품은 마치 궁중 광대인 난쟁이처럼 보이며, 무대 의상 같은 것을 걸치고 서 있다. 여성, 광대, 동물 또는 괴물이라는 복합적인 도상이 중첩된 그것은 타자들을 압축하는 존재이다. 분장, 변신, 무대 같은 것들은 이림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주된 코드로, 허구적 속성이 있으며 허구의 세계 속에서 좀 더 용이하게 실행할 수 있는 유희적 측면을 강조한다. 색은 흑백 영화처럼 빠져 있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조합은 거울에 비추어진 허상 같은 느낌을 강조한다. 이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대칭의 구도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게임의 주된 요소로 삼는다. 이전 작품에서도 허구적이고 유희적인 성향은 많이 발견된다. ● 필자가 처음 보았던 이림의 작품은 여성(들)의 몸에 물감인지 크림인지 알 수 없는 걸쭉한 물질들이 얹혀져 뭉개지고 발라지는 반쯤은 파괴적이고 반쯤은 놀이적인 광경이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끈적끈적한 물질들은 언제고 섹슈얼리티와 그 바탕인 몸을 떠오르게 했다. 2007년에서 2011년에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연출된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유화로 그린 것이다. 초현실주의 풍의 그림은 사진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사진은 그림처럼 꾸며져 고풍스런 액자에 담기곤 한다. 그림과 사진이 복잡하게 꼬리를 물며 작품 속 등장인물은 나인지, 너인지, 또는 나(너)의 분신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이전 작품 「beyond Max Ernst(penis envy)」(2010-2011년) 시리즈에서는 부엉이 탈을 쓴 나체의 여자들이 서로 만지거나 이야기한다. 이들의 피부를 뒤덮은 하얀 얼룩들은 원시인들 같은 분장이자, 사진과 회화를 넘나드는 교란의 전술이다, 작품 속 여성들은 비슷한 외모와 친밀성으로 인해 나르시시즘적이며 레즈비언적인 야릇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림_beyond max ernst (penis envy) no.1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photo by Suk Jung Min

틀 속의 틀에서 존재를 변모시키는 마스크와 분신의 이미지는 거울상에 내포된 환상의 드라마를 이끈다. 변모의 드라마는 자신의 작품에도 예외가 없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몇몇 추상화들은 이전 작품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뒤덮은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은 거부하고 싶은 재현성을 지워버린다. 그 결과로 나타난 추상회화는 질적 긴장감(마조히즘)보다는, 양적 되풀이(사디즘)의 스타일이 관통된다. 작가는 한 때 몰두 했던 일련의 작품들을 지우고 뭉개고 긁어내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 바탕 면을 이루는 이전 작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침식하는 선과 면들은 '기하추상'으로 이름 붙여진 질서와 구축의 경향보다는, 말소와 파괴의 의미가 강하다. 여기에서의 부인은 뜨거운 환상과 연결되지 않고 다소간 쿨 하다. 자동기술적인 방식으로, 보다 자유롭게 그려진 작은 작품들인 「abstract drawing」(2012) 시리즈는 다양한 변모의 양상을 실험하는 생성의 장이다. ● 이림의 작품에서 생성과 파괴를 넘나드는 변모의 추동력을 이루는 것은 여성이다. 에른스트를 비롯한 남성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여성상에 내재된 신비스러움과 불길함은 여성작가에 의해 또 다른 변모를 거친다. 남녀의 작가에게 동일한 출발점이 되는 도상은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가지는 신비의 여인이자 운명의 여인(femme fatale)으로 보인다. 수수께끼의 대상인 여성이 주체가 될 때 수수께끼의 지형도는 달라진다. 그녀의 그녀도 여전히 수수께끼지만 그의 수수께끼와는 차이가 있다. 남성이 가지는 여성의 수수께끼는 궁극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야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그녀는 죽음의 화신이 되곤 한다. 나르시시즘은 여성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매개고리이다. 린다 하트는 요부상을 연구한 저서 『fatal woman』에서 나르시스적인 관계에서 사랑의 상호성은 불가능하고 본다. ● 저자에 의하면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지만, 여성은 자신만을 사랑한다. 요부의 죄악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에 있다. 이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명시적이고 잠재적인 거울들은 나르시스적인 여성성을 구성하는 기구이다. 자기성애와 나르시시즘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린다 하트에 의하면 여성은 구별이 잘 안 되는 존재라는 문화적 가정 때문에, 여성들 간의 사랑을 자기성애적인 것으로 보였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나르시시즘과 레즈비어니즘은 이미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여성이 아닌, 나르시시스트로서의 여성은 파괴적으로 보인다. 이상적인 여성상은 이상적인 파괴자로 전도된다. 여성이 거울에 하는 입맞춤은 여성의 도착성을 나타내는 도상적 기호이자 남성에 비호의적인 표상이 되었다. 자기 성욕자이자 자기 몰입적인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재현되었다. 여성 성도착자의 섹슈얼리티를 규정한 것은 그녀가 남성적 특권을 강탈한 것이다.

이림_Athena's shield, Blue cape of Athena_캔버스에 유채_2012 Copyrightⓒ. 2012. Rim Lee. All Rights Reserved

동성애적인 여성은 남성에게 소유되기보다는 남성을 소유하려는 여성이거나 우월한 위치에서만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으로 규정되었고, 여성간의 욕망은 사회질서에 파괴적인 것으로 재현되었다. 「fatal woman」에서 요약될 수 있는 요부상은 나르시시스트이고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여성이며,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이 욕망의 주체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성은 남성과 달리 그 자체로 자족적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린다 하트는 남근 지배적인 리비도 경제에서 여성은 바로 부재하는 공간, 즉 상징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결핍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여성을 수수께끼 화하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여성 자신은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상 문제 자체이고, 따라서 그 문제가 무엇인지 언표하지 못한다고 간주된다. ● 즉 여성은 수수께끼이며 비밀이 체화된 장소일 뿐이다. 말하자면 여성성은 '아버지의 법률'인 가부장적 체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공백으로, 여성성(the feminine)은 이미 항상 남성적인 상상인 상징질서를 유지하는 버팀목으로 구성되었다. 여성은 결여와 부재의 대상으로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는 것은 결국 그녀를 죽임으로서, 따라서 그녀가 야기하는 위협을 제거함으로서 가능하다. 여성을 죽은 육체로 만든다는 것은 그녀의 수수께끼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을 제압해서, 불안정성과 유동성 자체를 명확하고 움직일 수 없는 위치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림의 작품에서 여성은 미끌거리는 크림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그녀들은 시각적으로 물화된 존재가 아니라, 만져지고 변형된다. 섭식되기 위해 뭉개지는 음식물 같은 과정 중의 실체는 유혹과 역겨움을 동시에 야기한다. ● 여성의 깨무는 질(vagina dentata)에 내포된 남성적 두려움, 즉 마구 집어 삼키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역겨움 보다는 매혹에 방점이 찍힌다. 이림의 작품에서 분신들이 자매애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서로를 만지며 변형시키는 과정에는 억압된 여성의 욕망이 분출되며, 형태가 명확한 것들이 주는 압박으로부터 탈주가 있다. 그것들은 물컹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잡히지 않지만 박탈감을 주지 않는다. 모호하지만 어둠 속에 파묻혀있지 않고, 무익한 배설물이기보다는 영양을 주는 음식물 같다. 그리고 씁쓸함 보다는 달콤함이, 날카로움보다는 부드러움이 기대 된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욕망은 타자를 부정하지 않는다. 욕망은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생성된다. 여기에서 욕망은 죽음보다는 생명의 이미지가 강력하다. 다만 그 생명력은 과도해서 경계를 넘쳐나고, 그래서 죽음과 유사해 보일 뿐이다. 과도함과 불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형들은 파괴보다는 희열을 낳는다. ■ 이선영

Vol.20120622b | 이림展 / LEERIM / 李林 / painting.photography

2025/01/01-03/30